logo
사례집
공지
[인문책편지] 내 몸에 책을 새기는 방법 / 강명관
2015.02.27
1,893

본문

[인문책편지] 내 몸에 책을 새기는 방법 / 강명관

내 몸에 책을 새기는 방법

 

강명관(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서산(書算)이란 물건이 있다. 글을 읽은 횟수를 세는, 종이로 만든 물건이다. 종이를 잘라 봉투처럼 만들고 거죽에 칼집을 넣어 접었다 폈다 하는 눈을 만든다. 글을 열 번 읽어 아래쪽 눈을 열 개를 다 열면 위쪽의 눈 하나를 여는 식으로, 십진법을 이용해서 글을 읽은 횟수를 표시한다. 지금도 고서를 사면 가끔 책갈피 속에서 이 물건이 나오기도 한다.

 

몸에 각인된 글은 언제든지 꺼내올 수 있는 내 것

 

서산을 만든 것은 당연히 책을 반복해 읽은 횟수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책을 읽는 것은 당연히 소리를 내어 읽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책을 다 소리 내어 읽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부의 기본이 되는 텍스트는 반드시 소리를 내어 읽고 외었다. 손쉬운 예를 들자면 유가(儒家)의 기본 텍스트인 사서삼경(四書三經)은 선비라면 반드시 읽고 외어야만 하였다. 그뿐이랴.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산문도 각 작가마다 수십 편을 외어야 했고, 『노자』 『장자』와 같은 이단의 책도 외어야 했다. 성리학의 중요한 텍스트도 당연히 읽고 외는 것이었다. 한시도 한(漢)?위(魏)의 고시는 물론이고, 이백과 두보, 소동파와 황정견 등 당(唐)?송(宋) 대가들의 작품도 골고루 외어야만 하였다. 이것이 기본이었다. 이 기본을 갖추어야만 비로소 과거에 응시할 수 있고, 또 선비로 행세할 수 있었다.

 

책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은, 곧 자신의 몸에 책을 깊이 각인시키는 방법이었다. 소리 내어 읽다 보면, 문득 내가 생각해서 읽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저절로 움직여 소리를 내고 읽고 있는 경우를 발견하게 된다. 몸 구석구석 글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몸에 각인된 또는 배인 그 글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되어, 내가 필요로 하는 어떤 순간 손쉽게 꺼내올 수 있다.

 

외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글 읽기는 아마도 외는 능력을 배양했던 것 같다. 정조는 어느 날 총애하는 신하 윤행임(尹行恁)에게 글을 몇 번 읽으면 외울 수 있느냐고 물었다. 열 번 이상 읽어야 외울 수 있다고 답하자, 정조는 “마음을 오로지 쏟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마음이 오로지 쏟는다면 어찌 열 번이나 읽어야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열 번을 읽고 외는 능력도 대단하다. 하지만 정신을 집중하여 왼다면 열 번까지 읽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것은 책을 읽을 때 늘 외는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배양된 능력일 것이다. 이렇게 배양된 능력으로 조헌(趙憲)과 유희춘(柳希春)은 저 거창한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를 모두 욀 수 있었다.

 

중요한 고전이라면 외워서 내 것으로 만들어 볼 만

 

이제 책을 소리 내어 읽고 외는 사람은 거의 없다. 초등학교 때는 열심히 소리 내어 읽는 경우가 있지만, 중학교?고등학교로 올라가면 소리 내어 책을 읽는 경우는 점점 줄어든다. 책을 읽되 눈으로만 읽는 묵독(默讀)이 보통의 독서법이 된다. 외우는 일은 아예 없어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는 독서 자체가 점점 줄어들어 아주 희귀한 일이 되고 만다. 더욱이 스마트폰의 사용이 일상화되면서 외우는 능력은 날로 쇠퇴하고 있다. 머릿속에 지식을 담아두는 일 자체가 퇴화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은 이제 내부에 있는 나의 것이 아니라, 외부의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있는 남의 것에 불과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모든 공부는 외우는 데서 시작된다고도 할 수 있다. 과거에는 외우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공부를 ‘기송지학(記誦之學)’이라 경멸했지만, 이제는 그 외우는 일조차 하지 않는다. 모든 책을 소리 내어 읽고 외울 필요는 당연히 없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고전이라면 소리 내어 읽고 외어서 온전히 나의 소유로 만드는 것도 좋을 것이다. 새해, 새 학기가 되었으니 올 한 해는 고전을 하나 정해 소리 내어 읽고 외우겠다는 결심을 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