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사례집
공지
[인문책편지] 평범한 사람들이 만든 위대한 길 / 김민경
2015.02.05
1,669

본문

[인문책편지] 평범한 사람들이 만든 위대한 길 / 김민경

 

평범한 사람들이 만든 위대한 길 

-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김민경(남산강학원)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걸까?” 누구나 어떤 충격적인 사건을 겪게 되면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질문하게 된다. 이 점은 19세기 러시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1812년 러시아는 나폴레옹과 큰 전투를 벌인다.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승리하긴 했지만 나폴레옹은 러시아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러시아인들은 나폴레옹을 통해 처음으로 서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던 혁명의 열기를 맛보았던 것이다. 이 전쟁을 기점으로 전통적인 삶의 규율이 무너지고, 그 틈으로 외래문물이 마구 침입하기 시작한다.

 

푸시킨은 극도의 혼란함 속에서 <예브게니 오네긴>을 집필했다. 푸시킨이 살던 시기 러시아에서는 두 개의 파로 나누어져 싸우고 있었다. 한 쪽에서는 서구 문명을 받아들여 근대적으로 혁신해야 한다고 이야기했고, 다른 한 편에서는 오직 러시아어와 러시아 관습만을 고집했다. 하지만 푸시킨은 이 모두를 거부했다. 두 가지 길 모두 이론에 불과할 뿐, 실제 러시아에 살고 있던 사람들과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푸시킨은 <예브게니 오네긴>을 통해 러시아의 현실을 진단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자 했다.

 

가장 평범한 것들에서 위대함을 찾기

 

푸시킨은 새로운 비전이 평범한 러시아 사람들 속에 있다고 믿었다. “나는 악행의 신비한 고뇌 같은 걸 무시무시하게 묘사하진 않으리라./ 그냥 평이하게 당신들께 이야기하리라./ 러시아 가정의 전설과/ 매혹적인 사랑의 꿈과/ 옛날의 풍습 같은 것을.” 그리고 이 비전을 표현하기 위해 ‘운문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택한다. 푸시킨은 시적인 것과 소설적인 것을 구분한다. 시는 가장 비범하고 위대한 것들이고, 소설은 가장 평범하고 사소한 것들이다. 따라서 운문소설을 쓴다는 것은 가장 평범한 것들에서 위대함을 찾기 위한 시도였다.

 

<예브게니 오네긴> 속 등장인물들은 매우 평범하다. 주인공 오네긴과 여주인공 따찌야나 역시 영웅이나 공주와는 거리가 멀다. 이 평범한 주인공들은 러시아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스텝에 있다. 소설 속에서 두 남녀는 서로 사랑에 빠지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그들을 전혀 다른 길로 인도한다. 서로를 만남으로서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삶의 길로 들어서는 동력을 얻는다. 푸시킨은 두 인물을 통해서 평범한 이들이 어떻게 위대하게 변모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오네긴은 치장, 파티, 발레 공연, 연애에만 몰두하는 남자이다. 그러나 이런 생활은 얼마 가지 못하는 법. 그는 ‘우울증’에 걸리고 만다. 전까지 열광했던 모든 것이 시들해지고 인생이 허무해지기 시작한다. 우울증의 원인은 오네긴의 생활이 ‘모방품’이었다는 데 있다. 오네긴이 열광했던 장식품들과 사교계 모두 서유럽 양식을 그대로 베낀 것에 불과했으므로 그는 언제나 공허함을 느낀다. 삶을 권태로워 하는 오네긴과 같은 인물들은 당시 러시아 귀족 사회에 만연해있었다. 이런 귀족 젊은이들을 목격한 푸시킨은 19세기 러시아를 서유럽의 모방품이라고 진단한다. <예브게니 오네긴>이 중요한 이유는 남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모방 생활에 최초로 회의를 느끼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질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오네긴을 좋아하는 여주인공 따찌야나는 ‘러시아적 생명력’ 그 자체이다. 그녀는 화려한 외모를 갖고 있지도, 사교술이 뛰어나지도 않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귀족 여인들과 다른 독특함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신부교육, 파티, 사교계 등에 전혀 관심이 없다. 오로지 혼자 소설책을 탐독하고, 유모가 들려주는 민담을 듣고, 자연을 산책하고 관찰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오네긴이 우울증을 끌어안고 방황하고 있을 때, 따찌야나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낸다. 그녀는 이전에 있던 그 어떤 사람과도 다르다. 따찌야나는 “뒤 콤므 일 포(Due comme il faut)”한 인물이다. ‘뒤 콤므 일 포’는 ‘그래야 하는대로’라는 뜻의 프랑스어다.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자연스러운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이다. 그녀는 부모 세대처럼 습관적으로 관습을 재현하며 사는 것도 아니고 신세대들처럼 맹목적으로 유행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바로 푸시킨이 말하는 러시아적 생명력이다. 푸시킨은 따찌야나를 러시아의 새로운 비전으로 제시한다.

 

모방의 삶을 거부하고 진품의 삶을 살기로

 

따찌야나가 위대한 캐릭터가 된 데는 오네긴과의 만남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어린 시절부터 따찌야나는 독특한 소녀였지만, 자신이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따찌야나는 오네긴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시대가 모방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챈다. 그 후 그녀는 오네긴과 같은 모방의 삶을 단호히 거부하고 진품의 삶을 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변화한 그녀를 본 오네긴 역시 우울증이 아닌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가게 된다.

 

푸시킨은 <예브게니 오네긴>을 통해 현실의 러시아인들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예브게니 오네긴>에는 따라야 할 어떤 매뉴얼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소설 속 주인공들은 스스로 새로운 길들을 향해 나가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예브게니 오네긴>은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고 촉구한다. 새로운 길이란 평범하고 사소한 사람들이 낡은 규범과 신진 유행에 포섭되지 않고 스스로 삶의 규범을 찾아가는 것이다. 소설이 출간된 지 200여년이 지난 지금 모두가 자신만의 길을 찾으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길을 찾기는커녕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만약 진짜 자신답게 살고 싶다면 <예브게니 오네긴>을 읽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