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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편지] 죽음을 기억하고 삶을 시작하라! / 구윤숙
2015.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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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편지] 죽음을 기억하고 삶을 시작하라! / 구윤숙

?죽음을 기억하고 삶을 시작하라!???


구윤숙(남산강학원 연구원)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사실 이 책은 보카치오의 순수 창작물이 아니다. 그는 창작자가 아니라 수집가, 작가가 아니라 편집자였다. 문헌에 실려 있는 고대의 이야기부터 항간에 떠도는 소문들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다. 그럼에도 보카치오를 이 책의 저자라고 명명할 수 있다면, 그건 그가 이야기가 펼쳐질 시공간과 열 명의 이야기꾼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이 설정이 참 특별하다.


죽음은 당신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1348년, 아름다운 도시 피렌체에 페스트가 돌았다. 페스트는 엄청난 전염성과 치사율을 자랑하며 멀쩡해 보이던 사람을 삽시간에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 병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귀족과 서민을 가리지 않고 찾아왔다. 사람뿐만이 아니다. 돼지 한 마리가 환자의 누더기 옷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더니 이내 쓰려져 죽고 말았다. 페스트는 이처럼 동물과 인간을 가리지 않고 단시간에 죽음으로 내몰았다. 예상치 못한 시간에 찾아오는 무차별적인 죽음. 이것이 페스트다. 이렇게 온 도시가 검은 죽음의 그림자로 가득할 때, 아름답고 우아한 열 명의 청춘 남녀들이 즐거움을 찾아 교외로 떠났다. 그들은 그곳에서 매일 서로에게 재미난 이야기 한편씩을 들려준다. 그렇게 열흘이 흘러 100편의 이야기가 생겨났고 그것을 모은 것이 <데카메론>이다. ‘데카deca’는 십을 나타내는 말로 ‘데카메론’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열흘간의 이야기’가 된다.

 

청춘 남녀의 싱그러움과 열흘간의 유쾌한 이야기 축제는 제법 잘 어울린다. 그러나 그 앞에 왜 하필 ‘검은 죽음(黑死病)’이라 불리는 페스트를 두었을까?

 

페스트는 일반 질병과 달리 별다른 증상이 없다. 그런데 검은 멍울 같은 것이 생기면 단 며칠 만에 사망에 이르게 한다. 전염성도 강해서 사망자는 즉시 묻어야 한다. 때문에 페스트가 창궐해도 페스트의 환자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원인도 모른 채 도시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사라진다. 즉, 어느 날 갑자기 별다른 기미도 없이 낡은 세대, 고루한 옛 시대가 사라지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옛것이 사라진 순간 인간 개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솔직히 펼쳐볼 수 있는 장이 마련된다. 비로소 어떤 이야기를 해도 괜찮은 축제의 시공간이 열리는 것이다.


동시에 페스트는 독자에게 강력한 충격을 주기 위한 도구다. 대개의 인간은 편안하고 살만할 때엔 그다지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강력한 위험,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 등을 자각해야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그때서야 자신의 모든 지혜와 용기를 동원하게 되는 것이다. 보카치오가 남들이 잊고 싶어 하는 끔찍한 페스트를 굳이 꺼내는 건 독자에게도 이럴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여러분들은 최후의 순간을 앞에 두고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지금처럼 그렇게 사실 건가요? 보카치오는 페스트를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그들은 바라던 것을 이루었답니다’


앞서 말했듯이 <데카메론>의 열 명의 청춘남녀들은 그 와중에 파티를 하러 교외로 떠났다. 죽을 때 죽더라도 잘 먹고, 잘 놀면서, 재미나게 지내보자! 그들은 산보를 하고 낮잠을 자고, 노래를 하고 춤도 춘다. 그리고 재미난 이야기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자세 참 멋지다. 이들은 우울해하지도 않고, 음란한 쾌락에 빠지지도 않았으며, 혼자 고립되지도 않았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남들이 하는 얘기도 즐겁게 들어준다.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 특별하진 않지만 즐거운 그것. 보카치오는 그 일을 지금 여기서 지금 시작하라고 말하고 있다.


<데카메론>의 100가지 이야기에 등장하는 많은 등장인물들도 비슷한 삶의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아주 솔직하게 자신의 욕망을 위해 돌진한다. 그런데 이분들, 솔직해도 너무 솔직하다. 유부녀가 하인과 바람이 나고, 신부와 수녀가 애인을 만들고, 과부가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다. 온갖 연애 스토리가 난무한다. 때문에 몇몇 이들은 <데카메론>을 그저 ‘야한 이야기책’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이 책에서는 ‘19금’이 될 만한 묘사가 없다. ‘그들은 바라던 것을 이루었답니다.’ 이정도가 가장 수위가 높은 표현이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데카메론>의 사랑이란 각자가 ‘바라던 것’을 통칭하는 말이다.

 

당신의 사랑. 그것이 당신이 어찌할 수 없는 욕망이라면, 보카치오는 그 사랑을 응원할 것이다. 당신의 열정. 그것이 당신이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일이라면, 보카치오는 그 행위를 인정해 줄 것이다. 다만 하나의 조건이 있다. 당신도 온 마음과 시간을 그 일에 바쳐야 한다. 그리고 용기와 지혜를 총동원해 지금, 여기서, 당장 시작해야 한다. 당신이 착하다고, 다른 일 때문에 바쁘다고, 죽음이 기다려주지 않는다. 죽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당신의 진정한 삶을 시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