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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칼럼] 문화융성, 결국 사람과 돈에 달렸다 /노재현
2013.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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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칼럼] 문화융성, 결국 사람과 돈에 달렸다 /노재현

[노재현 칼럼] 문화융성, 결국 사람과 돈에 달렸다

[중앙일보] 입력 2013.04.18 00:42 / 수정 2013.04.18 00:42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창조경제’라는 말을 둘러싸고 한동안 시끄러웠다. 급기야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섰다. “과학기술과 ICT(정보통신기술) 융합을 통해 산업과 산업이 융합하고, 산업과 문화가 융합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성장동력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듣고 보니 뭔가 손에 잡히는 듯하지만 여전히 추상적이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더 이상 엄밀히 정의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해 보인다. 창조경제의 실체는 이제부터 ‘창조’해 나가기에 달린 것 같다.article.asp?total_id=11263231&cloc=olink|article|default0

 창조경제뿐일까. 박근혜정부의 3대 국정목표가 경제부흥·국민행복·문화융성이라 한다. 경제부흥은 말이 고풍스럽긴 해도 어쨌든 잘 먹고 잘살자는 얘기로 들린다. 그럼 국민행복은? 무엇이 행복이냐고 따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문화융성도 마찬가지다. 문화가 융성한다는 건 과연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온 국민이 피아노나 바이올린 연주를 할 수 있을 때일까, 아니면 싸이의 말춤·시건방춤을 따라 할 수 있는 상태일까. 시골 할머니들도 음악을 듣고 누구의 몇 번 소나타라고 알아맞히면 문화가 융성한 건가.

 불행한 근대사 탓이지만 우리는 ‘문화’라는 말을 일본에서 수입해 왔다. 한문에 문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건 문치교화(文治敎化), 즉 힘을 사용하지 않고 사람을 교화한다는 뜻으로 뉘앙스가 다르다. 독일어 ‘쿨투르(Kultur)’를 일본인들이 ‘문화’로 번역해 들여왔다. 1910년대 초반이라고 한다(야나부 아키라, 『한 단어 사전, 문화』). 초기에는 문화와 문명을 거의 동의어로 쓰다가 점차 문화는 한 차원 높은 정신적인 것, 문명은 물질적인 것으로 분화되었다. 최록동이 펴낸 한국 최초의 신조어사전 『현대신어석의(現代新語釋義)』(1922년)는 문화를 ‘원래 문화의 의의는 매우 막연한 것이나 일반적으로는 예술·과학·도덕·종교 등 총체의 정신적 산물로서 개개에 인격을 조장 완성해 사회의 진정한 발전을 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정의했다. 같은 책에서 문명은 ‘문화의 뜻과 대략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다’고 해놓았다. 그러나 1934년 청년조선사에서 발간한 『신어사전(新語事典)』은 ‘자연 및 인간관계를 재료로 인류에 이상을 건설하기 위한 모든 노력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 문화이다. 그러나 문명이란 말과는 다소 달라서, 문화는 사회의 상층구조(물질적이지 않은 것)를 의미하니 법률·도덕·국가·과학·예술·종교 등의 총칭이다’라고 정의했다. 12년 사이에 문화와 문명이 나뉜 것이다.

 어쨌든 태생부터 뜻이 ‘매우 막연한’ 것이 문화다. 창조경제보다 훨씬 애매하고 범위도 넓다. 군대문화에서 화장실문화에 이르기까지 문화가 안 붙는 곳이 없다. 문화에 ‘예술’까지 붙으면 골치가 더 아파진다. 그러나 문화는 실체가 분명히 있다. 높고 낮은 수준 차이도 있고, 미술·음악·무용처럼 다양한 분야가 있다. 누구도 한마디로 정의하지는 못하지만 누구나 문화가 있고 필요하다는 걸 안다. 그래서 문화융성이 국정목표의 한 축을 당당히 차지했을 것이다.

 더구나 올해는 문화예술위원회 창립 40주년이 되는 해다. 문화예술위의 전신인 문화예술진흥원은 1973년 10월 공식 출범했다. 고도성장에 따른 자신감을 바탕으로 박정희 정부가 문화에 눈을 돌린 덕분이다. 73년은 ‘문예중흥선언’이 나오고 ‘문예중흥 5개년 계획’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예술가 지원, 고전국역 등 다양한 사업이 펼쳐졌다. 문예진흥원의 74년도 첫 사업비는 8억6200만원. 올해 문화예술위 사업비 1094억4100만원과 비교하면 정말 금석지감(今昔之感)이다.

   예산만 늘어난 게 아니다. 문화예술위의 역할도 엄청 커졌다. 문화이용권(바우처) 같은 문화복지 사업도 매년 확대일로다. 문화기본법·문화다양성보호증진법 제정, 문화행복지수 개발 등 박근혜정부가 약속한 정책들이 시행되면 일은 더 늘 것이다. 딱 두 가지만 당부하고 싶다. 첫째는 문화서비스 전달체계를 제대로 정비하라는 것이다. 일반 복지행정에 누수가 많듯, 문화행정도 예산과 사업이 늘수록 엉뚱한 곳으로 샐 가능성이 커진다. 너도나도 문화융성을 빙자해 예산 따먹기에 몰두할 염려도 있다. 새로운 기관을 만들어 생색이나 내려는 이들도 생길 것이다. 문화융성이 ‘자리융성’ ‘예산융성’으로 변질돼선 안 된다. 40년 노하우를 지닌 문화예술위원회를 잘 활용하는 게 방법이다. 둘째는 문예진흥기금 확충이다. 2004년 5272억원이던 기금이 지난해 말 2600억원으로 졸아들었다. 문화예산 2% 달성은 여기에서 시작돼야 한다고 본다. 문화융성, 뜻은 애매하지만 결국 사람과 돈을 얼마나 잘 부리느냐에 달렸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