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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탐방] 충남 예산 수덕사 - 근현대 선승들의 맥을 잇는 충남 사찰의 자존심 /송일봉
2013.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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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탐방] 충남 예산 수덕사 - 근현대 선승들의 맥을 잇는 충남 사찰의 자존심 /송일봉

인문 탐방-충남 예산 수덕사

 

근현대 선승들의 맥을 잇는 충남 사찰의 자존심

 

글과 사진/송일봉(여행작가)

 

충남 예산군은 당진, 서산, 홍성 등과 함께 이른바 ‘내포문화권’에 속해 있는 고장이다. 그런 만큼 문화적으로 두드러진 특징을 지닌 유적들이 많다. 그 대표적인 명소 가운데 하나가 덕숭총림 수덕사다. 예산의 명산 덕숭산 기슭에 있는 수덕사는 겨울 나들이 코스로 아주 제격인 곳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호젓한 겨울에 만나는 수덕사의 얼굴은 단아하다 못해 상큼하기까지 하다.

   

수덕사 최고의 자랑거리는 대웅전이다. 지붕을 받치는 기둥들은 하나같이 배흘림기둥을 썼다. 엄청나게 무거운 지붕의 하중을 최대한 분산하기 위해 이 같은 방식을 취한 것이다. 대웅전 안의 높은 기둥인 고주(高柱)를 보면 배흘림 형식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건축 양식은 맞배지붕에 주심포형식을 취해 한껏 간결미를 뽐내고 있다. 법당 내부는 부재가 그대로 드러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어 자연스러운 멋을 더한다. 이처럼 수덕사 대웅전은 화려함 보다 기능적인 면에 치중한 고려 시대 목조 건축물의 교과서와도 같은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1.수덕사 대웅전 전경.jpg


수덕사 대웅전은 부석사(경북 영주) 무량수전, 봉정사(경북 안동) 극락보전 등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 가운데 하나다. 이들 가운데서도 특히 수덕사 대웅전은 건립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 건축물로 유명하다. 현재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는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 시대 충렬왕 때인 1308년에 세워졌다.

   

4.수덕사 대웅전 앞마당에 세워져 있는 삼층석탑.jpg


수덕사 대웅전의 진면목은 양쪽 외벽에 집약되어 있다. 대웅전 앞마당에서 봤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웅장함과 평온함이 모두 이곳에 담겨있다. 웅장함은 유난히 넓은 지붕의 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종도리(마룻대)를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4개의 중도리와 1개의 주심도리(처마도리)가 있다. 웬만한 건축물에서는 보기 힘든 11량 집인 것이다. 벽면 바깥으로 살짝 돌출된 색 바랜 부재들에서는 묘한 평온함마저 느껴진다.

 

3.수덕사 대웅전의 아름다운 벽면.jpg


수덕사는 근현대에 훌륭한 선승들을 많이 배출한 사찰이다. 그 시작은 구한말에 우리나라 선종을 일으켜 세운 경허 스님(1849~1912년)이다. 최인호의 소설 ‘길없는 길’의 실제 주인공인 경허스님은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 가운데 하나.

   

1886년 5월의 어느 날 경허 스님은 탁발을 마치고 절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뒤를 따르는 젊은 스님은 걸망이 무겁다며 투덜거렸다. 이에 경허 스님은 “그럼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버려라. 하나는 무겁다는 마음이며, 다른 하나는 무거운 걸망이다.”라고 말했다. 젊은 스님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투덜거렸다. 그러자 경허 스님은 길가 우물가로 가더니 물동이를 머리에 인 아낙네에게 입을 맞췄다. 이를 본 동네 남자들이 몽둥이를 들고 쫓아오기 시작했다. 두 스님은 사력을 다해 뛰기 시작했고 어느 새 절 앞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경허 스님이 물었다. “죽기 살기로 도망칠 때도 걸망이 무겁더냐?” 그때 경허 스님을 뒤따르던 젊은 스님은 만공 스님(1871~1946년)이다.

 

경허 스님의 제자로서 일제강점기 때 꿋꿋하게 우리 불교계를 지킨 만공 스님은 근화필(槿花筆)로 유명하다. 우리가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된 다음 날에는 땅에 떨어진 무궁화로 ‘세계일화(世界一化)’라는 글씨를 썼다. 그 글씨로 만든 편액이 스님의 누더기 가사와 함께 현재 수덕사 근역성보관에 전시되어 있다. 만공 스님은 1946년의 어느 날 거울을 바라보며 “이보게 만공, 자네와 70여 년 동안 동고동락했는데 오늘이 마지막 날일세”라는 말을 남기고 앉은 채로 입적했다.

 

5.만공스님의 근화필.jpg


만공 스님이 수덕사에 있을 때 한 어린 사미승이 인사를 드리러 왔다. 만공 스님은 가만히 주장자를 들어 어린 사미승의 머리를 쳤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어린 사미승은 “아야”하고 소리를 쳤다. 그날 저녁 만공 스님이 어린 사미승을 불러 “어디가 아프더냐?”라고 묻자 “머리가 아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만공 스님은 “참 이상도 하구나. 왜 맞지도 않은 입이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을까?” 그리고는 “소리를 지른 그 놈은 도대체 누구냐? 엄마를 보고 싶게 만드는 그 놈은 또 누구냐”라고 질문을 던졌다.

 

곧바로 답을 할 수 없었던 어린 사미승은 이를 화두로 열심히 수행에 정진해 훗날 훌륭한 선승이 되었다. 그가 바로 수덕사 3대 방장을 지낸 원담 진성 스님(1926~2008년)이다. 스님은 특히 달마도를 잘 그렸으며 선필(禪筆)에도 능했다. 수덕사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에서 스님의 글씨를 만날 수 있다.

 

2.원담스님의 필체인 수덕사 대웅전 편액.jpg

 

▲찾아가는 길 : 서해안고속도로 해미나들목→45번 국도→수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