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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자료] 고미숙의 인문학 강연(원고 일부)
201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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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자료] 고미숙의 인문학 강연(원고 일부)

지난 8월 13일(화) 오후 2시에 있었던 고전평론가 고미숙 선생의 강연이 있었다. 아래는  "몸과 인문학 : 인문학, 의역학을 만나다"라는 주제로 이뤄진 강연 내용의 일부이다. <편집 주>


‘스마트’폰과 ‘스투피드’한 일상

“천하를 이 손안에!”라고 외친 황제가 있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외친 재벌회장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황제가 아니어도, 재벌회장이 아니어도, 천하와 세계를 주름잡을 수 있다. 막강한 군사력과 대자본을 거느릴 필요도 없다. 그냥 터치만으로도 무진장의 정보를 다운받을 수 있고 수천, 수만의 사람들과 동시적으로 접속할 수 있다. 초능력 혹은 마법의 일상화! 조만간 터치도 필요없어 진단다. 입만 벙긋해도, 눈만 찡긋해도, 아니 잠깐 생각만 스쳐도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왜? 그게 스마트한 삶이니까. -“혁신이란 그런 것이니까.”

자, 이 대목에서 한번 물어보자. 그럼 몸은 대체 어디다 쓰는 거지? ‘팔다리도 필요없다, 근육과 뼈도 필요없다, 손가락마저 필요없다,’ 그럼 이 사지육신은 대체 뭘 하란 말인가? 그저 주구장창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으란 말인가? 오, 그런 것 같다. 아닌게 아니라 사람들은 왼종일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지하철에서도, 거리에서도, 혹은 잠들면서도 스마트폰이 쏟아내는 정보의 바다를 헤엄치느라 익사하기 직전이다. 가히 오매불고, 주야불고, 생사불고(?)의 경지다. 이쯤 되면 헷갈리기 시작한다. 사람이 스마트폰을 쓰는 건지 스마트폰이 사람들을 부리고 있는 건지, 혹은 사람이 정보를 검색하는 건지 정보가 사람의 마음을 ‘서치’하는 건지. 정보와 욕망의 혼연일체! 단언컨대, 어떤 독재자도, 어떤 자본가도 감히 이런 수준의 세뇌를 시도하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이제 자기에게 유용한 정보를 검색하는게 아니라, 검색을 하기 위해 유용성을 만들어낸다. 왜? 달리 할 일이 없으니까. ‘스투피드한’ 너무나 ‘스투피드한’ 일상!

그럼 우리 몸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상중하가 각개약진한다. 머리 따로 몸통 따로 발바닥 따로~ 세상은 점점 가까워진다는데 내 몸의 기관들은 자꾸만 멀어져간다. 이건 명백히 ‘반생명적’이다. 이걸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아기들이다. 아기들은 ‘양기’ 덩어리다.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외부와의 소통을 맹렬하게 시도하는 것, 이것이 양기의 특성이다. 그래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기들한테 스마트폰을 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빛의 명멸을 탐닉하느라 사람이고 사물이고 주변의 모든 것에 무관심해진다. 스마트폰이 양기를 몽땅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이건 혁신이 아니라, 중독이다. 생명이 원하는 건 오직 순환과 운동뿐이다. 동의보감식으로 말하면 ‘수승화강’이 생명의 기초대사다. - “신장에 있는 수(水)기는 올라가고 심장에 있는 화(火)기는 내려가야 한다.” 만약 이 흐름이 단절되면 수기는 아래로 정체되고 화기는 허열로 뜬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차차 살펴보기로 하자.

세상만사 그렇듯이, 결국 공짜는 없다. 자본주의가 피와 살육으로 얼룩진 “원시적 축적”을 통해 탄생했듯이 디지털 혁명 또한 몸의 소외와 생명력의 박탈이라는 가혹한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 물론 이제와서 거꾸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 ‘반생명적’ 흐름을 넋놓고 따라간다는 건 실로 ‘스투피드한’ 짓이다. 적어도 끊임없이 “혁신”을 외쳐대는 스마트폰의 진군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 “바보야, 문제는 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