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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구술:아들 딸이 받아 쓴 우리의 이야기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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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17-03-02 10:33 조회1,018회 2017.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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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구술:아들 딸이 받아 쓴 우리의 이야기 - 8

Ⅲ. 구술 : 아들 딸이 쓴 우리의 이야기



최고가 되기보다
최선을

최재준 | 목포공공도서관_전남

 

 

일촉즉발의 서부전선을 가다
1976년 11월 나는 친구들보다 뒤늦게 군대를 가게 됐다. 논산훈련소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입영자들 기를 꺾어 놓겠다는 심산인지 ‘앉아’, ‘일어서’
‘뒤로 취침’, ‘오리걸음’ 등 반말과 욕설이 난무했다. 비로소 육군 훈련병이
된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손, 발 마디마디
가 얼어붙는 속에서도 구보, 봉체조, 각계 전투 등 수없이 반복되는 고된
교육을 받았으며 내가 훈련병이었던 70년대 후반은 무척이나 배가 고팠던
시절이었다.
PX(군대매점)에서 파는 빵을 사 화장실에서 몰래 먹으며 배고픔을 달래
기도 하였다. 6주간 기본교육을 마치고 군수병과를 부여 받았다. 보급품이
담긴 군용 가방을 어깨에 메고 군용 열차를 타고 대전 병참학교에서 6주간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마친 후, 한국전쟁 시 평양으로 가장 먼저 입성하였
다 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전진 부대란 명칭을 내렸던 1사단에서 머무르면
서 자대 배치를 기다렸다. 기다리던 중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도는 최전
방 서부전선 판문점 철책선 중화기 중대 배치를 받게 되어 매서운 강추위
가 휘몰아치는 속에서 GOP(전방철책초소) 철책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하루일과는 경계근무, 작업, 취침으로 8시간 단위로 이루어지며 여름에
는 제초 작업, 장마기간에는 초소 물골 작업, 겨울에는 제설 작업 등을 하
며 하루 일과를 보냈다. 여름에는 모기와 사투를 벌이며, 겨울에는 영하
10-20도 돼 난방을 위해 지뢰가 매설된 지역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벌목
을 하기도 하며, 벌목 중 지뢰를 밟아 발목이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 되 후
송되는 전우를 보기도 했다. 근무는 2인 1조로 근무를 하며 철책선을 따라
1.5km에서 2km 책임구역 끝까지 순찰을 했다. 참으로 지겨웠던 초소 근
무가 이젠 아련한 추억으로 되돌아온다.
GOP근무는 1년 근무를 하고 후방부대와 교체되며 자기 책임 근무만 서
다보니 선임들의 괴롭힘을 거의 받지 않았으며, 훈련은 없었으나 상급부
대에서 자주 순찰을 하기 때문에 초소, 막사 등을 지겹도록 청소한 기억이
난다. 동절기 어려웠던 것은 눈이 많이 오면 보급로가 막히기 때문에 라면
으로 끼니를 때우는 경우가 많을뿐더러 온종일 치우는 제설작업이 가장 힘
들었던 것 같다.
33개월의 병역의무를 마치고 79년 8월 만기 제대를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그때의 젊음을 아끼지 않은 우리 같은 군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튼튼한 국방태세 아래 모두가 편안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
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해상 주권수호의 선봉에 서다
바다는 세계를 이어주는 끈이다. 세계 각국이 우호를 다지는 교량 역할
을 하지만 나라 경계 및 분쟁을 둘러싼 소리 없는 전쟁터다. 서해바다에서
조금만 멀리 나가면 배타적 경제수역 분위기는 초긴장 상태다. 바로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 때문이다. 그들은 잠정조치수역(한중공동관리수역)에
머물다 경비 함정의 눈을 피해 어느 순간 우리 어장에 불법으로 침범해 물
고기들을 싹쓸이 해간다. 불법 어선들은 단속을 피하기 위해 철갑선을 타
고 오거나 단속하는 경찰관들에게 흉기 등을 휘두르며 강하게 저항하기 때
문에 흉기에 맞아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 사고도 있다. 최근 10여 년
동안 중국 어선 단속과정에서 2명이 숨지고 80여 명의 경찰관이 다쳤다.
우리는 이런 불법 어선을 소탕하기 위해 8박 9일간 단 한 번의 정박도 없
이 9일 내내 바다에서 생활하며 해양주권을 수호하고 있다.
2013년 10월 7일 이른 새벽 신안군 가거도 서방해역은 한치 앞도 보이
지 않은 칠흑이었다. 바다에는 3~4미터 높이의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1500톤급인 대형 경비함정 조차 쉴 새 없이 요동쳤다. 뭐라도 붙잡지 않으
면 제 자리에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거친 파도 사이로 중국 어선들이 우리
해역을 침범하여 조업하고 있었다. 중국 어선들은 기상이 나쁘면 단속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더 활개쳤다. 겨울철 단속은 그야말로 ‘악전고투’였다.
해경 단속반원은 거친 파도와도 싸우며 쇠파이프, 쇠꼬챙이, 가스통으로
무장한 중국 어선에 대응해야 했다. 서해 바다에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고무보트로 중국어선에 접근하자 쇠파이프 등 흉기를 휘두르
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어선 현측에는 단속반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30센
티 간격으로 쇠꼬챙이가 촘촘히 꽂혀있다. 빠르게 달리는 고무보트위에서
중국 선원의 저항을 뚫고 중국어선에 뛰어 오르는 것은 어지간한 강심장
이 아니고는 불가능했다. 해상주권을 수호하고자 하는 국가관이 없다면 힘
들었을 것이다. 1시간여 사투 끝에 붙잡은 중국 어선 어창에는 어획물이
가득했다. 1척이 나포되자 그제야 어선들은 뱃머리를 돌리며 도주했다. 동
녘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해, 우리는 불법조업 외국어선 40척을 나포함으로써 전국 최다 함정
으로 선정되는 명예를 안았다.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
3회 명예로운 제복상 시상식에서 해상특수기동대에서 중국어 통역요원으
로 근무하는 최유란 경장이 불법 침범한 중국 어선 나포 유공으로 1계급
특진하였고 상금 2천만원은 불법조업 중국 어선 단속하다 희생된 박경조
경위와 이창호 경사 유가족에게 전달한 바 있다. 제복은 책임감의 징표다.
제복은 국민을 위해 땀범벅일 때 가장 향기롭고, 구겨졌더라도 가장 명예
로울 것이다.


국경을 초월한 인명구조
2013년 1월 14일 신안군 가거도 서방 해상에는 풍랑주의보가 발효 중이
었다. 중국 어선 영해침범대비 영해 해상순찰을 하던 중 150톤급 중국어
선에 바닷물이 유입돼 침수중이라는 긴급 구조요청을 상활실로 받고 사고
해역으로 전속 항진하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어둠과 험한 파도 속에서 현
장에 도착하였을 때 기관실 일부에 해수가 유입돼 침수된 상태였다.
희미한 랜턴 불빛에 의지하여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기관실에
들어가 침수부위를 찾아야 한다. 1분 1초를 다투는 절박감에 자신의 안위
는 고려할 겨를이 없다. 파이프 파공으로 인해 기관실에 해수가 유입된 것
을 확인하고 해수 유입차단을 위해 쐐기 작업등을 실시해 추가적인 해수
유입을 막고 3시간여 동안 배수펌프 등을 이용 배수 작업을 벌여 선원 14
명 전원을 구조할 수가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신속히 구조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반복된 훈련을 통해 다져
진 강인한 체력과 민첩성, 그리고, 일사불란한 팀워크가 만들어낸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바다는 우리에게 풍요로움을 주지만 무서움을 주기도 한다.
다음날, 중국 정부로부터 국경을 초월한 인도주의적 조치에 대한 감사서
한문을 받았고 국제해사기구에 ‘바다의 의인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하였
다. 바다의 의인상은 국제 해사기구가 위험을 무릅쓰고 인명구조를 위해
노력한 개인이나 단체에 주는 상이다.


제 2막 인생을 위하여
2015년 12월, 36년의 공직 생활을 마쳤다. 36년간 가족을 위해 쉬지 않
고 열심히 일했다며 가족들이 준비한 퇴직 파티는 15박 17일의 유렵여행
이었다.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스위스, 프랑스, 독일로 마무리하는 여행은 순조로
웠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시내 전체가 유물과 유
적지인 로마, 아름다운 풍경을 지닌 스위스, 예술과 낭만의 도시 프랑스를
보면서 멀리만 느껴졌던 유렵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여행을 통하여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느꼈고, 오랜 세월동안 업무
가 바쁘다는 이유로 늘 빈자리를 남겨 두어야 했던 부족한 나에게 혼자 속
앓이하며 모든 것을 이해하고 힘이 되어준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지
금까지 못해 주었던 일들 이제 든든한 남편으로 보답해주고 싶다.
퇴직 전 기술행정사와 일반행정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공직 중에서의
경험과 내가 가진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어업인들에게 멘토 역할도 하며 어
려운 일이 있을 때 무료봉사 해주는 것이 나의 조그만 소망이다. 낯설지만
새로운 도전, 그 도전을 위해 지금보다 한 걸음 더 내 딛는 것, 거기서부터
제 2막의 인생이 시작될 것이다.

 

「이 글을 쓴 최재준은…………
저는 산과 바다 그리고 작지만 큰 산을 품고 있는 예향의 도시 목포에서 태어났
습니다. 엄마가 저를 임신했을 때에는 마흔 살이었습니다. 당시 엄마는 출산시
기 보다 무려 3주나 지나 저를 출산했다고 합니다. 3주나 늦게 태어났는지, 몸
집이 커서 제왕절개를 했다고 합니다. 엄마의 상태도 위독하고 저도 위독했지
만 엄마의 꾸준한 기도를 통해 둘 다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제가 아들이라 무척
이나 기뻤다고 합니다.
저는 첫째 누나, 둘째 누나와 각각 17살, 15살 차이가 납니다. 제 둘째 누나는 부
모님께서 남자인줄 알고 낳았지만 태어나서 보니 건강한 여자였다고 합니다. 그
때 만약 여자인걸 알았더라면 아이를 없앴을 거라고 합니다. 누나는 두 명 다 결
혼을 했으며 매형 둘 다 저에게 누나만큼이나 든든합니다.
처음으로 유치원에 갔을 때 저는 아이들과 비교해서 키가 무려 십 센티에서 많
으면 이십 센티나 컸습니다. 그래서 당시 아이들과 서툴고 말을 걸기가 어려웠
지만 먼저 다가와준 친구들 덕분에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몇 주 동안 토와 설사를 하여 심한 복통을 호소했습니다. 심
한 복통으로 광주기독병원에서 검사를 한 결과 혈당 수치가 비교적 높았습니
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주사를 맞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주사를 맞는 게 두렵기도 하며 부끄러웠습니다. 그때는 주사를 맞는 두려움 땜
에 소심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병을 안좋게만 보지 않고 제 인생의 반환점이
라고 생각하며 중학교에 올라와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좀 더 활기차고 말을 많
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내 건강을 위해 탁구를 배우게 되었고 제가 즐겨하는
운동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처음으로 본 중간고사 때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였습
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라는 말이 있듯이 다음 기말고사를 노려보았습니다.
하지만 수학과 영어에 치달린 나머지 다른 과목에서 점수를 많이 얻지 못하였
습니다. 그래서 1학기에 약 2.3등급을 끝으로 1학기를 마쳤습니다. 방학 중에 부
족했던 국어와 수학을 보완을 하면서 2학기에는 꼭 2등급 내로 들어와서 고등
학교 3학년 때 1.5등급으로 제 목표인 교대에 가고 싶습니다.
부족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제 아버지의 모습을 본받으며 제 꿈을 실현하고 싶

습니다.




▶ 이 글은 최재준 님의 자서전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며,
전문은 홈페이지(www.libraryonroad.kr)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홈페이지 공지 및 보도-홍보에서 원본파일을 다운하실 수 있습니다.(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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