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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구술:아들 딸이 받아 쓴 우리의 이야기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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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17-03-02 09:56 조회1,028회 2017.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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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구술:아들 딸이 받아 쓴 우리의 이야기 - 3

Ⅲ. 구술 : 아들 딸이 쓴 우리의 이야기 



파란만장
인생기

문대정 | 목포공공도서관_전남

 

 

우리 집안의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목화씨로 유명한 문익점 공의 후손이
다. 문익점 공의 자는 일신이고 호는 삼우당이다. 충신 문익점의 공덕을 기리
는 서원이 강성 서원이다.
나는 1967년 2월 27일에 전남 장흥군 유치면 늑용리 39번지에서 태어났다.
문삼숙씨의 자로 6남매중 5째로 태어났으며, 300년 된 대대로 물려온 전통 한
옥과 집 앞 밭에는 300년 된 호두나무가 있고 좌우에는 대나무 밭과 마당 앞
에는 큰 연못과 좌우에는 버들나무 두 그루가 머리 길게 빗어 물속에 잠겨 있
다. 어릴 적 친구들과 여러 버들잎을 잡고 그네 타던 일이 엊그제 같다. 태어
났을 때 나는 선천성 심장병이라는 병을 가지고 태어났고 초등학교 입학 전
부터 심장수술 받기 전까지 정말 어려운 학교 생활을 했다.


초등학교 시절
초등학교 다닐 때는 비포장 도로를 30~40분 걸어서 등, 하교를 했다. 학교
도착할 때쯤은 이미 1교시 끝날 때쯤이기 일쑤였다. 학교에 도착할 때쯤은 내
얼굴에 핏기도 없고 거친 숨소리를 쉬며 입술이 파래졌다. 나는 허약한 몸 때
문에 선생님이나 전교생이 다 나를 알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 옛 생각 그때 그
시절로 돌아보면 지금은 제2인생을 살고 있다. 그 때 초등시절 1, 2학년 때 막
내 여동생이 나의 손, 발이 되어주었는데 등, 하교 시에는 항상 조금만 키에
별명이 ‘콩례’였다. 우리 동생은 똑 부러지고 영리했고 다른 형제들과의 사이
도 좋았다. 동생은 책가방을 내 것까지 두 개나 메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2학년 때쯤 옆집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나하고 아주 친하게 지내던
할머니였는데 병으로 앓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 당시에는 사람이 죽
는다는 사실에 슬펐던 감정도 미비했던 시기라 그냥 넘어가는 듯 했다. 그런
데 내 동생이, 다른 사람도 아닌 나를 잘 챙겨주던 바로 내 동생이 그날 밤 집
에서 떡을 먹고 급체로 세상을 떠났다. 의료 시설이 부족했던 시기라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 버리고 말았다. 그때 또한 어릴 때라 실감은 안 났지만 옆집 할
머니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맨날 옆에 있던 동생이 없어져버리니 상실
감이 매우 컸다. 생각해보면 그때는 실감이 안 났지만 지금은 정말 해 줄 말도
많고 미안한 것도 많다. 그 무렵에 내 몸이 그렇게 많이 아프지 않았으면 더
잘해 줬을 건데 못 챙겨줘서 마음이 아프다.
몸이 아프고 숨은 차지만 초등학교 다닐 때는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 6년
졸업때까지 개근상을 받을 정도로 학교가 좋았고 친구들이 좋았다. 몸은 아
프지만 보이스카우트 활동, 체육행사만 제외하고 활동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여 여러 상도 받았다. 나의 꿈은 화가였다. 몸이 아파
쉽게 잡을 수 있었던 것이 연필이었다.
비가 올 때나, 눈이 올 때면 우체국 다닌 형님이 자전거로 태워줬고 소풍갈
때는 선생님이 나한테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나는 가고 싶었다. 2시간
이 넘는 거리에도 걸어서 가기도하고 자전거 얻어 타기도하고 선생님께 업혀
가기도 했다. 몸이 힘들었지만 항상 노력하려고 했던 이유에는 ‘나’는 참석하
는 것과 사람들과 지내는 게 좋았고 행복했기에 힘들어도 잘 이겨낼 수 있다
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수술해서 건강하지만 그 당시에 선천
성 심장병 환자는 스무 살을 넘지 못한다고 했다. 시골친구도 같은 선천성 심
장병을 갖고 태어났지만, 수술을 받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 나는 어머니 때문
에 제2인생을 산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70~80년대 심장병 수술 할 수 있는 병원도 많지 않았고, 수술을 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의사도 많지 않았다. 하물며, 어려운 시절이기 때문에 당시 수술비
가 3,000만원이라는 거금 때문에 엄두도 못 냈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만든
새세대 심장센터 재단이 만들어 졌고 80년대 전두환 대통령 영부인 이순자
여사가 운영할 때 어머니가 청와대로 편지를 써서 접수가 되었다. 수술번호
가 지금도 생각난다. 3360번. 또한 수술을 기다리려면 스무 살이 넘어야 했다.
마침 서울 반포에 살던 이모부가 이순자 여사와 학교 동창이어서 바로 청와
대로 전화를 걸어주어서 한 달 후에 서울 한양대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
을 수 있었다.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고 치료를 받고 있는 중에 심장 병명
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치료를 받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빨리 완치된 후 몸이 건강해져서 그 전에
마음 편히 못했던 운동 등 많은 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인생의 고비와 전환점 된 고등학교 3년
나의 인생 전환점은 고교시절이다. 전환점의 시작은 집에서 학교까지 1시
간이상 걸린 등하교길에 있었다. 옛날 비포장도로와 산길이 험해 버스가 많
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께선 학교 근처에 공부 할 수 있는 방과 그림 그릴만
한 방을 구해주셨다. 나는 미술을 좋아했다. 다른 활동들도 하기 힘들었기에
나에게 맞는 활동인 미술이 좋았다. 자취방에서 화실은 가까웠다. 미술부에
들어가서 나의 꿈은 화가가 되어 그림 그리며 일생을 살자는 걸로 구체화되
었다. 전공은 동양화. 한국화를 선택해 열심히 그리자 대학교 선배님들이 많
이 지도해 주셨다. 각 지역 대회도 많이 나가고 입상도 많이 했다. 선, 후배간
갤러리 전시회도 매년 열어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3학년이 되면서 대학진로 선택을 정하고 열심히 했지만, 고배를 마셔야 했
다. 꿈을 포기 할 수 없어 홍익대 앞의 미술학원에 등록해 재수를 준비했다.
하지만, 재수 준비하면서 어려움이 너무 컸다. 어쩌다 내 방에 찾아오신 큰형
님과 어머니가 하루에 라면 한 끼 먹어가면서 쪽방에 사는 내 모습을 보고 한
탄했다.
“그림 그리는 사람치고 부자 되는 사람 없다는디 어짤라고 이러냐”
가정여건 때문에 포기한 미술에 대해 아직도 미련이 남고 아쉽다.
큰형님이 너는 옛날부터 집에 고장 난 물건들을 고치는 것을 보아하니 손재
주가 있으니까 기술 분야로 배워 보는 게 어떨지 조용히 물으셨다. 나는 고민
이 컸다. 나는 결국 그림을 포기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아서 꿈을 포기
하기로 하고 기술 분야로 마음을 돌려 먹었다. 전파사에서 신설동의 TV학원
을 거쳐 삼성서비스센터에 입사해 전문적으로 기술을 습득했다.


도전
나의 첫 직업은 서울 종로구 관찰동 삼성출판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바로
세일즈였다. 세상 물정을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세일즈는 암담한 콘크리트
벽과 같았다. 조직사회 벽. 공동체의 벽. 사람과 사람의 벽이 나에게는 도전이
었다. 선배를 따라 가판(가정판매), 빌판(빌딩판매), 구판매(구역판매)등 모든
것이 나에게는 도전이었고 경험이었다. 출판사 근무하면서 첫 회식자리에서
처음으로 술과 담배를 경험하기도 했다. 입사 후 넉 달 만에 신인상도 받고 금
일봉도 받았다.
하지만 2년 6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사람의 벽이 나에게는 너무 높았을까?
두 번째 직업은 면목동에 있는 전자제품 판매장이었다. 기술과 판매상술을 발
판삼아 미아동에 있는 삼성가전 대리점 (주)삼웅전자 대표 정태웅 사장님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덕분에 오늘에 있기까지 그 분한테 지대한 영향을 받
았다.
사실 입사할 때 내가 원하는 분야는 서비스였다. 대표 정태웅사장님이 나의
근면함을 인정해서 전시장 판매과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렇게 공무원연금매
점과 직원채용 교육 및 서비스 판매까지 총괄 업무를 맡게 되었다. 각 구청,
금강제화, 신라호텔, 안기부 등 판매 인맥을 맺으면서 나의 꿈은 실현되고 있
었다.

 

이 글을 쓴 문대정은…………
나는 행복한 미소를 곁들인 울음과 함께 목포에서 태어났다. 나는 아직까지 생
생하게 기억에 남는 어릴 적 일이 한 가지 있다. 4살 때 우리 집은 2층 주택으로
1층에서는 어머니께서 마트를 운영하고 계셨다. 나는 2층 엄마 방에서 엄마와
함께 자곤 했었다. 어릴 때 나는 가위를 많이 눌렸기에 혼자서는 무서워서 잠을
편히 잘 수 없었다. 어느 날도 어김없이 엄마와 함께 잠에 들었다. 그리고 중간
에 목이 말라 잠에서 깼다. 그런데 엄마가 내 옆에 없는 것이다. 별 걱정 없이 거
실도 둘러보았다. 진짜 안 보이는 것이다. 순간 무섭고 외로운 느낌이 들어 아래
층의 아빠라도 보려고 했다. 불도 켜지지 않아 어두웠던 계단을 조심조심히 내
려가 아빠를 불렀다. 그런데 이게 무슨 상황인가. 우리 집에 나밖에 없는 것이
다. 그 순간, 나는 공포감에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아빠와 엄마를 기다리며
굳게 닫힌 마트 셔터 앞에서 계속 울고 있었다. 우리 엄마와 아빠는 동네 사람들
과 술자리를 잠깐 나갔던 것이었다.
그때 엄마는 나를 한참이나 달래주셨는데도 이토록 뚜렷이 내 기억에 남아있는
걸 보면 그때 나는 아주 무서웠던 것 같다. 그때 기억 때문인지 나는 외로운 것
을 싫어한다. 그래서 현재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게 좋고 같이 있는 게 행복한 내
유대관계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유치원 때도 장난치기를 좋아했던 나였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 친구도 있다. 지금 아쉬운 게 하나 있다면 초등학교 저학년쯤에 함
께 재미있게 놀던 형누나들이 이사를 가게 되면서 연락이 안 된다는 것이다. 기
회가 되어 연락이 된다면 어렸을 때 얘기나 나눠보고 싶다.
또 초등학교 때는 소심한 면이 있던 내 성격에 부모님께서 나를 웅변학원에 보
내주셨다. 웅변학원을 다니게 되면서 대회도 많이 나갔는데 긴장도 되긴 했지
만 상을 받고 칭찬을 받는 기분이 워낙 좋았다. 그렇게 트로피도 부상으로 받아
학교로 전해지다 보니 학교에서는 나에게 시낭송 대회도 권해보았다. 많은 대
회를 경험하고 상을 받아 뿌듯함도 느끼게 되면서 용기를 가지고 많은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친구들과 운동도 하며 학원을 다니며 열심히 공부해 전
교1등도 여러 번 차지했으며 방과 후도 컴퓨터나 한자를 배우는 등 다양하게 활
동하였다.
시간은 흘러 길던 초등학교 6학년이 지나고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나름 공
부로 소문난 명문학교로 가게 되면서 긴장을 했지만 반배치에서는 전교 4등이
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지만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
아했던 나는 같이 게임도 하고 놀러도 다니면서 성적 관리를 철저하게 하지 못
했다. 초등학교 때 조금만 더 편하게 살고 중학교 때는 조금만 더 공부를 해놓을
걸 후회가 된다.
현재 고등학교에서는 꿈과 진로에 관한 책자들과 교육이 많다. 나에게 맞는 길
은 무엇일까 고민이 많이 되는 시기인 것 같다. 그러던 중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관심 있어 했던 컴퓨터를 바탕으로 인터넷에 정보를 검색해보았다. 그 중 화이
트해커와 블랙해커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컴퓨터 관련 직업은 나에게 멋지
기도 하고 앞으로 주목받을만한 직업이라는 점이 내 맘에 들었다. 그런 마음에

직접 책을 구입해 공부하고 있던 도중 엄마가 신문에서 목포대학교에서 모집하
던 정보보호 영재교육원을 운좋게 발견해 나와 함께 의논 후 신청서를 보내 현
재 격주로 수강중이다. 학교공부와 진로공부에 관한 고민이 한창인 요즘이지만
일단 공부를 열심히 해봐서 내가 원하는 대학교에 들어가는 게 현재 내 꿈이자
목표이다.
남들보다 도전 정신이 강하고 다양한 활동을 좋아하는 나이기에 무엇이든지 열
심히 하면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
여 우리 부모님에게 자랑스러운 아들로서 꼭 큰 사람이 돼야겠다.

 


▶ 이 글은 문대정 님의 자서전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며,
전문은 홈페이지(www.libraryonroad.kr)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홈페이지 공지 및 보도-홍보에서 원본파일을 다운하실 수 있습니다.(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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