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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구술:아들 딸이 받아 쓴 우리의 이야기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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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17-03-02 09:39 조회1,046회 2017.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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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구술:아들 딸이 받아 쓴 우리의 이야기 - 2

Ⅲ. 구술 : 아들 딸이 쓴 우리의 이야기 



노을이
그린 그림

이인희 | 인천광역시율목도서관_인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사랑
‘후두둑 후두둑’
아궁이에 군불 지피는 소리에 눈이 떠지면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온기가 따
뜻해서 좋았다.
‘쓔-욱, 쓕-’ 요강을 부시는 소리. ‘사각 사각 사각’ 싸리비로 마당을 쓰는 소
리. 이른 아침마다 들려오던 할머니의 기척이다.
아궁이에서 수돗가를 거쳐 마당을 돌아 방에 들어온 할머니는 경대 앞에 앉
아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성경책을 펼쳐 드셨다. 할머니는 부지런하셨다. 가
만히 계시지 않고 늘 무엇인가를 하고 계셨다.
‘퍽퍽 팍팍’ 우물가에 가 방망이로 빨래를 두들겨 빨기도 하고, ‘따뚝 따뚝’ 마
루에 앉아 다듬이 방망이로 옷감을 두드려 펴기도 하며, 밤에는 골무를 끼고
바느질도 하셨다. 워낙 깔끔하셔서 당신 것은 당신이 해야만 마음을 놓으셨다.
1960년대 겨울은 추웠다. 만두를 빚어 채반에 받쳐 마루에 내놓으면 땡땡 얼
어붙을 정도였다. 그런 날도 할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움직이셨다.
‘부웅- 붕-’ 초등학교 4학년 봄, 할머니의 짐을 실은 차가 떠나자 눈물이 났
다. 공장 일을 맡으신 할아버지를 따라 할머니가 구로동으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이다. 할머니가 없으니 방이 텅 빈 것 같았다.
방학이 되면 할머니 댁에 놀러갔는데 돌아올 때면 항상 눈물이 났다. 구로
동에서 인천으로 오려면 시외버스를 타야 했는데 배웅을 나온 할머니는 버스
가 떠나고 나서도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 계셨다. 손을 흔드는 할머니의 모습
을 보면 왈칵 눈물이 쏟아지곤 했다.
나는 돌이 되기 전부터 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연년생으로 동생이 생기자
할머니가 돌봐주게 된 것이다. 젖을 떼고 연유를 먹이는 데 잘 먹지 않고 울며
보채서 애를 먹고, 울고 보채니까 잘 때까지 업어주며 키웠단다. 그렇게 키워
준 할머니와 정이 들어서인지 헤어질 때마다 아쉬움이 컸다.
명절이면 할머니는 솜씨를 발휘하셨다.
맷돌에 콩을 갈아 간수를 넣어 두부를 만들고,
엿을 녹여 땅콩이나 들깨를 섞어 강정을 만들며,
밥알을 동동 띠운 달콤한 식혜와 생강과 계피 향내가 살짝 나는 수정과도
만들고, 찹쌀을 시루에 쪄서 절구에 넣고 찧은 뒤 콩가루를 발라 인절미도 만
드셨다. 허드렛일은 하지 않으셔도 손맛을 자랑하는 일은 잘 하셨다.
할머니는 내가 낳은 딸 둘도 돌봐주셨다.
결혼하여 출산하자 산후조리를 해 주며 아이에게 젖을 먹이려면 많이 먹어
야 한다고 하루에 미역국을 여섯 번이나 끓여주셨다. 직장을 그만 두려고 했
는데 할머니가 아이를 키워준다고 해서 직장을 그만두지 않고 다닐 수 있었
다. 당신이 배우지 못해 집안일만 하신 것이 한이 되어 내겐 집안일에 얽매여
살지 말고 하던 일을 그대로 하라고 하셨다. 퇴근 후 돌아와 보면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해놓곤 하셨다. 여든이 넘어 힘드셨을 나이에도 나를 어린애 다루
듯이 보살피려고 하셨다.
“내가 얘들 초등학교 입학하는걸 보고 죽어야 할 텐데…….”
첫 아이 낳고 몸조리 할 때 할머니가 했던 말이다. 건강이 걱정되셨던 모양
이다. 다행히 할머니는 아이들이 초등학교 4학년, 2학년 다니는 걸 보고 돌아
가셨다. 내가 삼십 팔세, 할머니가 구십 사세 되던 해였다.
벌써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이십 년도 더 지났다. 내가 할머니가 되어 보니,
할머니의 사랑이 헤아릴 수 없이 컸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말없이 당신의 자리를 지키시다
회갑이 되던 해였다. 딸과 사위들이 플래카드를 만들어 걸고 축하를 해

주었다. 여행을 다녀오라고 용돈도 챙겨 주었는데, 메르스라는 전염병이

돌아 해외로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강원도 쪽으로 다녀오게 되었다.
인천을 벗어나 양평을 지나면서부터 차창밖으로 펼쳐지는 녹색의 물결이

감동을 겨주었다.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며 서 있는 나무들을 바라보니

아버지 생각이 났다.
‘나무들은 죽은 듯이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가도 다시 무성한 자태를 드러내
며 소생하는데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쇠잔해 지다가 가는구나…….’
문득 시간을 되돌릴 수 없음에 허무한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지금 내 나
이에 돌아가신 것이다.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봄이면 새 잎이 돋아나고, 여름이면 무성한 자태를 뽐내며, 가을이면 알록
달록 단풍 든 잎을 자랑하고, 겨울이면 죽은 듯 앙상한 가지를 들어내다 다시
잎이 돋아나고 무성한 자태를 드러내며 단풍든 잎들을 자랑하기를 반복할 수
있는 나무들이 부러웠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아침 일찍 출근해 늦은 시간에 돌아오곤 하셨다. 겨울
이면 종이봉투에 담겨진 군밤이나 호떡을 사가지고 와 할머니 할아버지와 자
고 있는 방으로 살며시 넣어 주곤 했다. 더운 여름날 하얀 런닝과 인견바지를
입으시고 마루에 앉아 책을 펼쳐놓고 열중하시던 모습과 얼마 후 금반지를 상
으로 타서 할머니를 갖다 드린 일이 떠오른다. 대회에 나가 상을 타 오셨던 게
다. 할머니는 금반지를 끼고 동네방네 다니며 자랑하고 돌아가실 때까지 손
에서 반지를 빼지 않으셨다. 닳아 좀 만질만질해졌지만, 반지는 내가 물려받
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황금색 빛을 발할 뿐 언제나 넣어 둔 채로 제 자
리에 있는 반지를 볼 때마다 언제나 말없이 당신의 자리를 지키시던 아버지
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말은 없으셔도 당신의 자리에 성실하게 임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오늘도 나를 응원하네
‘드르 드르륵’
재봉틀에 앉아 옷을 만들던 어머니는 늘 분주하셨다. 겨울이면 저녁상을 물
리고 털실 바구니를 꺼내놓고 뜨개질을 하셨다. 남편과 일곱 딸들의 스웨터
도 뜨고 조끼도 떠 입히셨다. 아홉 식구들 뒤치다꺼리가 여간 많은 게 아니었
다. 먹을 것과 입을 것 챙기는 일이며 머리 손질 등 그 시절 웬만한 일은 다 집
에서 손수 해결했다. 세탁기나 청소기도 없던 시절 집안일을 손수 혼자 다 하
면서도 힘든 내색을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부엌에 가려면 신발을 신고 나가야 했다. 방에서 나
와 마루를 거쳐 댓돌 위의 신발을 신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의 부뚜막엔
가마솥을 걸고 장작을 지펴 밥이나 탕을 끌이던 아궁이와 연탄을 넣어 방을
덥게 하던 아궁이가 있었다. 날이 선선해지면 연탄아궁이 위에 건 솥에 물을
채워 놓고, 덥혀지면 그걸 퍼서 쓰곤 했다. 어머니는 데워진 물을 떠 주며 딸
일곱을 차례대로 씻게 했다. 씻은 물은 버리지 않고 넓적한 다라에 모았다가
입었던 옷들을 담가 빨래를 하곤 하셨다. 그런데 일 년에 두 번 설날과 추석이
돌아오면 동네 목욕탕에 가 몸을 불리고 때를 밀어 주셨다. 때를 밀기 위해 탕
안에 들어갔다 나오면 손과 발이 쪼글쪼글하게 변했던 기억이 난다. 때를 밀
어야 한다고 한참을 담그고 있어서…….
내가 대학교 2학년 때였다.
학교에서 돌아와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는데 이모와 외숙모가 마루에
앉아 계셨다. 두 분의 표정이 어두웠다. 병원에서 2개월을 넘기기가 어렵다고
했다며 이모가 탄식하듯 말했다. 아침에도 어머니가 밥상을 차려 줘서 먹고
나갔다 돌아온 터라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며칠 전 하혈을 해 병원엘 다녀
왔는데 검사 결과가 자궁암으로 나왔다고 했다. 오진이길 바라고 찾은 종합
병원에서도 역시 같은 진단이 나왔는데 수술도 할 수 없을 만큼 진행이 많이
되었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학교만 다녔지 집안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던 내가 집안일을 하게 되었는데 겨우 밥이랑 국만 끓일 수
가 있었다. 반찬은 외가에서 해다 줬다.
어머니는 서울 원자력병원으로 일주일에 한 번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다니
고 때로 수혈도 했는데, 의사가 진단을 내린 2개월을 지나 방사선 치료의 한
계인 6개월까지 무사히 넘기셨다.
‘암 환자는 고통이 심하다던데…….’
가족들은 날마다 어머니의 동태를 살폈으나, 어머니는 병원을 다녀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으셨다. 그 후로 내가 직장생활을 하자 다시
집안일을 하면서 8년을 더 사시고, 내가 결혼식을 치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암 환자는 고통스러워한다는데 어머니는 방사선치료를 받으러
다닐 때 좀 피곤해 한 것 외에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살다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삼십 년도 더 지났건만 말없이 먹거리 준비와 빨래, 입
을 것 장만으로 쉴 틈 없이 일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어머니는 가족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늘 알아서 챙겨 주곤 했다. 모든 걸 털
어 놓을 수 있어 든든했던 분. 때로 지치고 힘이 없어질 때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 생전의 모습 그대로 떠오른다. 그렇게 어머니는 오늘도 내 가슴에 남아
나를 응원하고 있는 것이다.

 


▶ 이 글은 이인희 님의 자서전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며,
전문은 홈페이지(www.libraryonroad.kr)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홈페이지 공지 및 보도-홍보에서 원본파일을 다운하실 수 있습니다.(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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