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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구술:아들 딸이 받아 쓴 우리의 이야기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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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17-03-02 09:33 조회1,074회 2017.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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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구술:아들 딸이 받아 쓴 우리의 이야기 - 1

Ⅲ. 구술 : 아들 딸이 쓴 우리의 이야기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김홍대 | 인천광역시율목도서관_인천

 

 

나의 아버지
지난 달 직장에서 연수가 있어 모처럼 고향인 부산에 갔다.
1주일간의 교육이 끝나는 마지막 날, 서울 가는 기차시간에서 몇 시간 정도
의 여유가 있어,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 오기 전까지 살았던 곳을 가보기로 하
였다. 비라도 뿌릴 듯 한 흐린 날씨에 버스를 갈아타고 내렸는데, 그 다음부터
는 기억이 가물거려 할 수 없이 남은 구간은 택시를 타고 가야만 했다.
드디어 도착한 그곳은 부산의 어느 변두리, 멀리 미군부대가 내려다보이는
동네 뒷동산 높이만큼의 언덕 위에 있는 낡은 아파트였다.
내가 도착했을 때 그 아파트는 퇴색된 회색빛 페인트가 다 벗겨진 채 예전
의 낡은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곧 시행되는 재개발 정비 공사로 사람들은 이
미 다 떠나고, 군데군데 수북이 쌓인 쓰레기와 벽면에는 붉은색 락카 뿜칠의
낙서가 어지럽게 휘갈겨져 있어 무척이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아파트는 철거 직전 흉물스러운 풍경 속에 홀로 서서 마치 오래 전부
터 나를 기다려왔던 것처럼 말없이 나를 반겨주는 듯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군대를 제대하고 서울로 가기 전까지 꽤 오랜 기간을 이
곳에서 보내야만 했다. 처음엔 좁은 방에 5식구가 살았지만, 형들이 직장을
찾아 서울로 간 뒤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 이렇게 3식구가 살았다.
그 곳에서 살 때, 우리 집의 가세는 기울어질 때로 기울어져 바닥을 치고 있었
다. 나는 모든 걸 내려놓고 매일 술을 들며 쇠잔해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가까이에
서 보면서 지내야 했다. 어렸던 나는 그러는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했지만 수용하
기가 어려워 혼자 속앓이를 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유일한 은신처인 아파트 옥상
에 올라가 아버지 몰래 집어온 몇 개비 담배를 피우며 마음을 달래곤 하였다. 결국
아버지는 내가 서울로 올라가 직장에 다닌 지 1년 만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경주 김 씨 문중의 장손이었는데 아래로 동생이 5명이나 있었고,
할아버지는 당시 동래부에서 벼슬을 하는 유지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부산의
전통 있는 명문고인 동래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미술을 전공
으로 공부를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마을 행사의 운
동경기 중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유학을 포기하고 세무서
에 취직하여 집안의 가장으로서 동생들을 돌보아야만 하였다.
아버지는 동생들을 대학까지 다 졸업시키고, 해방 후에 세무서를 나와 사업
을 했다. 돈을 잘 벌어 한동안 무척 부유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태
어날 쯤, 하던 사업이 점점 곤란해지면서 집안 형편이 어렵게 되었다. 아버지
는 그 후로도 몇 번의 사업을 새로 시도하였지만 제대로 되지 않아 마침내 우
리 가족은 그곳 변두리 아파트에까지 밀려오게 된 것이다.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버지는 유교 집안의 장손으로 항상 근엄하시고
예의와 법도를 중시하는 학자 같은 선비셨다. 우리에게 언제나 어른에게 인
사하기, 식사예절을 당부하셨다. 특히 제사예절은 그 무엇보다 양보 없는 규
칙 준수를 강조하였다. 그 때문에 우리는 많은 겨울밤을 대청마루에서 떨며
아버지의 제사 축문 읽는 소리와 곡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집안 형편이 넉
넉지 못한 형님이 지금도 제사만큼은 잘 챙기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때 배운
교육 탓이리라.
그러나 그보다 사업 실패로 드시는 술 때문에 온 집안 식구들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도 이에 못지않았다. 타협을 모르는 곧은 성품과 예술가적인 기질
을 가지신 아버지에게 사업은 애당초 맞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거듭되는 실
패는 친지들에게도 금전적으로 폐를 끼치게 되어 날로 주위의 원성이 높아졌
고, 이것은 바로 우리 가족의 생활 궁핍으로 이어져 아버지 마음의 상처를 더
욱 깊게 만들었을 것이다.
말년에 아버지는 형들이 모두 직장을 찾아 서울로 올라가 나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술을 드시면 영탄조의 시조를 잘 읊으시고 한문 글씨와 그
림에도 능해 서예와 그림을 곧잘 하곤 하셨다. 본인 생을 알았는지 나중에는
문중의 족보를 모두 정리하여 새로 제작한 다음, 책자로 만들어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작년 겨울. 부산에 살고 있는 사촌형님들과 오랜만에 만난 술자리에서 아버
지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야, 너는 어려서 모르겠지만 너희 아버지가 진짜 멋쟁이 신사였다 아이가. 동
래고보 시절에는 악대부에서 트롬본이라는 긴 나팔을 불었는데, 아마 당시에
우리나라에서는 그 악기를 처음 불어본 사람일 끼라. 할아버지가 좀 더 오래 살
았다면, 니네 아버지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 되었을 텐데”라며 아쉬워하셨다.
나는 문득 오래전 옛날 앨범 안에 있던, 누렇게 빛이 바랜 사진 속에서 젊은
학창시절의 아버지 모습을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얼마 전 벽장 속
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에는 아버지가 펜으로 그린 풍경화와 인물들 그림이 틈
틈이 지은 글들과 함께 있었다. 그 시절의 정취와 예술적 감수성이 물씬 느껴
지는 작품들이었다.
그 곳에 서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곧 비가 내릴 듯이 빗방울이 한 두 방울
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길을 따라 내려와 멀리서 아버지와 함께 지내며 추억이 묻어 있던 그
아파트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아파트는 묵묵히 서서 지나온 시간 속에 품
고 있던 많은 사연과 아픔을 따뜻하게 녹이며 엷은 미소로 내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곧 철거되어 없어질 낡은 아파트를 오늘 무엇인가에 끌리듯 와서 이렇
게 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막내인 내가 어느덧 60의 나이에 접어들어 장성한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지금, 이 곳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지나간 추억을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나에게 다시 한 번 우리 집안에서 나의 자리를 깨닫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
는 게 좋을지 삶의 방향을 얘기해 주려는 것 같았다.
조금씩 내리는 빗속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엄마의 말이 생각나 웃음이 나왔다.
“걱정마라! 너는 괜찮을 끼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주역 책을 다 풀이해 보고
막내인 니가 나중에 제일 잘 될 끼다”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나는 힘들 때마다 떠올리던 이 말을 생각하며 속으로 나즈막이 “아버
지……!”라고 불러 보고 서울로 가는 역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강인함을 물려주신 어머니
엄마는 93세, 지금 강릉 누나네 근처의 요양원에 계신다. 십 년도 넘는 오랜
세월 동안 누님 집에 있다가 요양원으로 가셨는데, 그동안 누님은 시어머니
를 모시면서 친정어머니까지 모시느라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
리 집안이 평안하게 잘 지내는 것은 어지신 누님의 이런 희생 때문이라는 생
각이 든다.
요양원에서 엄마는 이런저런 증세로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을 하고는 부랴
부랴 찾아간 우리에게 배고프다며 죽 한 그릇을 다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시곤 하였다. 내가 자라면서 보아온 그 많은 힘든 일들을 굳건히 버티며 살아
오신 탓일까? 엄마는 ‘이정신’ 이란 이름 그대로 강인한 정신력을 지니신 것
같았다.
엄마는 아버지와 결혼해서 처음에는 피아노가 있는 큰 저택의 부자 집 마님
으로 부유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막내인 내가 태어나고 점점 기울어져
가던 가세 때문에 5남매의 생활고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처지가 되자, 엄마는
하루하루를 억척스럽게 살아가야만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성당
에 나가며 어려운 현실을 오로지 기도 생활로 이겨 나갔다.
생각해 보면 엄마는 아무리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항상 웃으며 낙천적으로
살았고, 인정이 많아 주위 분들을 잘 챙겨서인지 어딜 가나 친구 분들이 많이
있었다. 지금 계신 요양원에서도 간식거리라도 있으면 꼭 한분 한분씩 다 나
누어 주곤 해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다른 분들과 사이좋게 지내며
어르신 대우를 받고 계시는 듯 했다.
나는 부산에서 올라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 곳에서, 이권 개입의 구설수가
항상 뒤따르는 기술부서 공무원으로 일하며 때로는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난관에 부딪칠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는 힘
으로 고비를 잘 넘겨 왔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마도 엄마의 강한 정신력과
밝은 성격, 그리고 무엇보다 독실한 신앙생활을 잘 물려받은 덕분인 것 같았다.
나는 내년이면 30년간 일해 온 직장생활에서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 요
즈음 경조사로 상가 집이나 예식장을 찾을 때면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연
로한 엄마가 생각나, 내 퇴직 후에 돌아가시면 ‘집안의 큰일을 어떻게 치러야
하나?’ 하는 현실적인 생각에 마음 한 편이 무거워져 온다.
엄마는 노래를 잘 하였는데, 특히 일본 노래를 잘 부르셨다. 노래방에 가면
젊은 시절부터 불렀던 ‘키미 코이시(연인이여)’란 옛날 노래를 나와 함께 곧
잘 부르곤 하였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중에 나 혼자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엄
마 생각이 많이 날 것 같다. 이번 주말에는 오랫동안 가지 못한 강릉에 꼭 가
보아야겠다. 살아계실 때 엄마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보며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러….

 


▶ 이 글은 김홍대 님의 자서전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며,
전문은 홈페이지(www.libraryonroad.kr)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홈페이지 공지 및 보도-홍보에서 원본파일을 다운하실 수 있습니다.(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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