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사례집
공지
[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화:그때 그런 일이 있었네 - 내 삶의 즐거움, 나의 비타민 : 3
2017.03.02
1,311

본문

[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화:그때 그런 일이 있었네 - 내 삶의 즐거움, 나의 비타민 : 3

Ⅱ. 일화 : 그때 그런 일이 있었네 



꿈을 향한 새로운 길 

신준식 | 전주시립완산도서관_전북

 

 

꿈을 향한 새로운 길
초등학교 사, 오학년 때의 일이다. 평소에는 동네 앞 돌 다리를 건너서
학교에 가야한다. 비가 많이 오면 냇물이 많아져 도저히 돌다리로는 건너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아주 좁고 어설픈 산길로 돌아가야 했다. 1.5킬로미
터 정도 하류 쪽으로 걸어가면 신작로에 견고한 시멘트 다리가 있었다. 그
다리로 해서 저편으로 건너가야 했다. 아마 복숭아가 익어가는 7월 중순
쯤 되었을 것이다. 전날 비가 많이 와서 학교를 갈 때, 그리로 돌아서 가야
했다. 당연히 하교 길에도 그렇게 돌아와야 했다. 냇가 옆에 잇는 길을 가
다 보면 산과 논밭도 있었다. 그 중에 복숭아밭이 있었다. 걷다보면 정말
배가 고팠다. 복숭아밭을 지날 때 탐스런 복숭아가 눈에 띄었다. 손이 저절
로 복숭아한테 갔다. 막 복숭아를 따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호통 치는 소리
가 들렸다. 주인이 재빠르게 달려오는 게 아닌가. 몹시 꾸중을 들은 것 같

은데 그 다음 상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수줍고 순박했었다. 아
마도 좀 겁에 질려 울먹이면서 용서를 빌었을 것이다. 그 사건은 나에게 말
할 수 없는 수치심을 가지게 했다. 그 후부터는 그 밭을 지날 때마다 그 놀
랍고 당황했던 기억이 떠올라 아예 복숭아를 바라보지도 않고 피해 다녔
다. 나는 형편없이 쪼그라드는 듯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있을 수 있는 일
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걸어 다니다 보면 배가 출출했고, 분홍빛 복숭아는
너무나 탐스러웠다. 하지만 따먹지도 못하고 손만 뻗었던 그때, 한 번도 누
군가에게 호되게 당한 일이 없던 나에게는 너무나 큰 자극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때 일 덕분에 그 뒤, 나는 평생을 정직하고 성실하며 진실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우리 집 가훈을 성실하고, 남을
도와주면서 살아가는 큰 뜻을 품자는 의미로 ‘성실(誠實)·대지(大志)’로
한 것도 초등학교 사학년 때 그 일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지금 가족 그
룹 카카오 톡 대문에도 이 말을 키워드로 올려놓았다.
또 하나, 더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초등학교 오학년 때의 일일 것이다.
한동네 사는 친한 친구 세 명이 있었는데 그때 두 명이서 한 명을 얼음 속
에 묻었다. 얼음 구덩이 속에 발을 넣고는 계속 눈을 끼얹었다. 그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하게 있었다. 우리 둘이는 그런 꼴이 재미있
어서 그 아이의 발이 시릴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 즐겼다. 생각해보면 잔
인했다. 아마도 그 친구는 우리보다 생활 살이가 좀 못해서 눈치를 본 듯도
했다. 우리는 뭔가 먹을 것이 생기면 그 친구한테 주곤 했던 것이다. 같이
장난을 치던 친구 어머니는 포목상을 운영해서 그 집도 먹고 살만 했다.
세월이 아주 많이 지난 후 초등학교 동창생 모임에 가서 우리는 그 친구
에게 우리가 했던 짓을 기억하며 정말 그때 몹쓸 짓을 했다고 소근 거렸다.
그런데도 진작은 그 친구한테 직접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정말 미
안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문제는 실컷 그렇게 할 때는 몰랐다는 거
였다. 그냥 아무 말 없이 당하고 있는 친구를 곯려주는 것이 재미있었다.
우리는 정말 철이 없었다. 이렇게 글로 용서를 빈다. 미안하다, 친구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야하는데 내가 살던 곳 주위에는 중학
교가 없었다. 담임선생님은 내가 전주에 있는 유명한 중학교에 갈 수 있는
실력이라고 우리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때 우리 선생님은 무척 진취적인
성격으로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화학 실험을 함께 하도록 하셨다. 우리는
사이다를 만드는 방법을 배웠고, 그것을 공개수업 시간에 발표하기로 했
다. 선생님이 나를 지목해서, 나는 앞에 나가서 발표를 도맡아 했다. 발표
는 성공적으로 잘 했다. 이영수 선생님은 내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
셨다. 그때 받은 칭찬으로 나는 살아오면서 자신감과 자존감을 가지게 되
었다고 생각한다.
이영수 선생님이 추천하신대로 나는 그 학교에 원서를 내서 합격을 했
다. 그 학교에는 우리 초등학교에서 단 세 명이 입학을 했는데 한명은 보결
생 자리가 있어서 입학했다. 그 아이 집은 당시 정미소를 했다. 이른바 부
자 집 외아들이었다. 나 말고 다른 한 명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중
학교에 다니다가 도중 하차를 했다.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당당하게
합격해서 끝까지 다녔다는 자부심을 늘 가지고 있었다. 만약 이영수 선생
님이 나를 적극 추천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또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선생님이 북돋아준 희망과 격려는 두고두고 내게 큰 힘이 되곤
했다. 이후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선생님이 작고하실 때까지 몇 번 찾아가
서 뵙곤 하였다.
전주에서 학교를 다녀야 했는데 거처할 곳이 마땅하지 않았다. 그래서
작은 아버지의 집 문 칸 방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 작은 단칸방에서 나와
형님 고모 집 형제 네 명이서 함께 어울려 자취생활을 했다. 작은 아버지는
딸이 많아서인지 유독 남자조카들을 좋아하고 많이 보살펴 주셨다. 나는
그 당시 작은 아버지로부터 사랑과 혜택을 많이 받았다. 말씀 한 마디를 건
네도 따뜻한 눈빛으로 격려를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런데 막상 내가 자
라서는 조카들한테 작은 아버지처럼 인자하게 못하고 있다. 작은 아버지
한테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거처하는 방에는 겨울에도 난방을 할 방법이 없었다. 겨우 유담
프(더운물을 조그마한 용기에 담아서 베로 싸 놓은 것)을 쓰거나 고다쓰
(전구를 켜서 그 열을 이용하는 작은 나무통)를 이불 속에 넣고 발밑만 따
스하게 유지하는 게 다였다. 겨울 아침에 일어나면 책상 위의 잉크병의 잉
크가 얼어 있을 때도 많았다. 밥은 석유곤로로 하고 반찬은 김치에다 시골
에서 갖고 온 된장이 전부였다. 여름에는 낚싯대를 가지고 전주 천으로 가
서 피라미를 잡아서 시래기를 넣고 찌개를 끓여 먹었다. 그 당시 우리에게
유일한 고기반찬이었다. 그래서 시래기만 건져먹고는 다시 고기는 그대로
두고 또 몇 번이고 시래기를 또 넣어서 끓여 먹곤 했다.
우리가 살던 바로 앞집은 빵공장이었다. 빵을 손질하고 남은 빵의 테두
리 부분을 우리에게 거저 줄 때도 있었다. 그게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가끔은 그걸 돈을 주고 사먹기도 했다. 빵공장에서 나는 향긋하고 구수한
냄새는 입 안에 군침이 돌고, 그 냄새는 지금도 생생하다. 식수로 작두샘물
을 길러 먹었다. 일식가옥으로 된 뜰에 있었다. 먼저 마중물을 넣고 한참
작두질을 하면 그런대로 물이 잘 올라 왔다. 어떤 때는 하얀 새우 같은 것
이 올라오곤 했다. 마치 동굴에 가면 볼 수 있는 수심이 깊은 데서 사는 수
중 생물로 생각된다. 그 물을 그대로 마시기도 하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했다. 끓이지도 않고 한 사발씩 시원하게 마실 때도 있었다. 수질 오염 검
사도 제대로 받지 않은 물이어서 그대로 마신다는 것은 끔찍하다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그 때는 별탈이 없었다. 주어진 여건 하에서 최선을 다하
며 형제들 하고도 오손도손 잘 지냈다. 다들 체력을 열심히 단련했다. 그
당시는 6·25 전쟁을 막 끝낸 때라 힘센 놈이 최고라는 인식이 팽배해질 때
였다. 사회가 불안하니, 체력을 길러야한다는 것이 대세였다. 집집마다 체
력을 기르기 위한 간단한 도구들이 있었다.
6·25 전쟁때를 잠시 더듬어보면 우리 집은 다행히도 큰 피해가 없었다.
반공호를 파서 대피하긴 했지만, 따로 피난을 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서울
쪽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꽤 있었다. 나는 곤봉이며 시멘트와 헌 양동이로
직접 제작한 역기 아령 등으로 부지런히 체력을 단련시켰다. 그렇게 자꾸
하다 보니 제법 근육이 울퉁불퉁 생기기도 했다. 방학 때 고향에 돌아가면
어른들이 누구 팔뚝은 계집애들 허벅지만하다고 수근 대기도 했다. 그럴
때면 어깨가 으쓱으쓱해지곤 했다.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던 시절이었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 최고로 멋지고 자랑스러운 때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좀 엉뚱한 도전을 해보았다.
고등학교 일학년 때의 일이다. 자전거를 타고 진안에서 전주까지 온 것
이다. 그 때만해도 자전거는 흔하지 않았다. 숙부님께서 면 진료소 소장으
로 계실 때였다. 원조구호물품이 진료소에 보급이 되었는데, 그 중에 자전
거가 있었다. 숙부님께 내가 용감하게도 버스도 잘 다니지 않고 하니 자전
거로 전주까지 가겠다고 말씀 드리니, 마지못해 그러라고 하셨다. 주위에
서는 다들 말렸다. 자전거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험한 길이라는 거였다.
그때는 지금처럼 포장된 곳이 별로 없었다. 아예 비포장인 흙길로 가야 했
다. 전주까지 가려면 재를 두개나 넘어야 했지만, 관촌에서 전주까지는 연
속 내리막길이어서 내 깜냥에는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때 자전거는 기어는 요즘처럼 다단기어가 아니었다. 오로지 한 단의
기어만 장착되어 있었다. 그러기에 오르막길일 때는 내려서 힘들게 끌고
올라가야 했다. 첫 번째 재는 그런대로 넘었다. 두 번째 재에 이르러 자전
거를 끌고 올라간 다음, 내리막길로 내려가는 도중에는 너무 빨리 달려서
인지 체인이 바퀴에서 벗겨지고 말았다. 그렇게 한 번 벗겨진 체인은 제자
리에 갖다 놓아도 계속 또 벗겨지고 말았다. 할 수 없이 관촌에 와서 자전
거포에 들렀다. 다시 고처서 전주까지 가는 동안에도 몇 번인가 체인이 벗
겨져 내려서 다시 제자리에 놓곤 하였다.
결국 나는 해낸 것이다. 전주까지 자전거로 간 것이다. 그것은 순전히 오
기였다. 한번 한다면 하고 말겠다는 결의 같은 것이 나를 이끌게 했다. 그
다음에는 고향에서 익산까지 가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까지 들
었다. 한번 그렇게 하고나니 다른 것들이 별로 고생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마음을 단단하게 먹고 하면 세상에 그다지 못할 일이 없어 보였다. 잘 기억
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그 자전거는 못쓰게 되었을 것이다. 멀쩡한 자전거
도 주저앉을 정도니 그 길이 험난한 길이긴 했다. 나에게는 평생 못 잊을
크나큰 모험이고, 멋진 경험이었다.
역시 고등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우리 형제들은 전주에서 학교를 다니
다가 방학 때는 시골에 돌아가서 농사일도 돕고 숙제도 하곤 했다. 그렇게
복작거리며 활발하게 놀던 우리 형제의 행동을 그윽하게 바라보던 어머니
의 흡족해 하시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어머니의 얼굴 가득 흐뭇한 미소가
번져있었다. 시골에 오 일마다 장이 섰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거둔 농산물
을 바리바리 싸서 머리에 이고는 이 킬로미터가 넘는 먼 거리를 걸어가셨
다. 그것을 팔아서 다음 모내기 때를 준비하며 일꾼들 먹거리 반찬을 사오
는 거였다. 그렇게 간갈치나 간고등어를 사가지고 오셨다. 그때에 맞춰 꼭
빼지않고 사오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내가 좋아하는 물오징어를 사
가지고 오시는 거였다. 장에 다녀온 어머니는 물오징어와 무를 넣고 국을
끓이셨다. 너무나 맛있었다. 나는 요사이도 가끔 물오징어와 무를 넣고 국
을 끓여 먹는다. 그때 마다 그 시절의 어머니가 떠오르곤 한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어머니는 혼잣말처럼 쑥스러운 듯 몇 마디
말을 털어 놓으셨다. 그 당시 장에 가면 먹고 싶은 것들이 즐비한데도 참고
가지고 간 물건을 팔려고 내놓고 지키고 있다고 하셨다. 점심때가 되어서
너무나 배가 고프면, 인근 상점에 쫓아 들어가서 물 한 그릇을 얻어먹는 게
다였다고 한다. 그렇게 주린 배를 안고 먼 길을 걸어가서는 또 올 때도 머
리에 잔뜩 뭔가를 이고서 시장을 다녀오셨다는 거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가슴 이 아렸다. 우리 자식들에게는 할 수 있는 한, 부족함 없이 해주려고
하면서 정작 당신은 물 한 바가지로 배를 채우셨던 것이다. 얼마나 배가 고
팠을까, 얼마나 지치고 힘들었을까, 그래도 자식들 먹이려고 하는 마음으
로 기꺼이 그 일을 하셨으리라.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짠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어머니가 나한테 주신 사랑을 절대 따라할 수가
없다. 나는 어머니한테 받은 만큼 자식들한테 주지 못했던 것 같다. 어머니
는 셋째 아들인 나를 제일 좋아하셨다. 그런데 나는 늘 불효자식이었다. 특
히 임종 무렵 나를 찾으셨다는데 나는 그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를 뵙지도
못하였다. 일이 바쁜 것도 있었지만 그렇게 허망하게 가시리라고 도무지
생각하지 못했다. 금년부터 기일이 되면, 원불교 회관에서 기일제를 지내
기로 했다. 어머니는 생전에 원불교를 믿으셨는데, 돌아가실 무렵에 기여
도에 따라서 주어지는 어떤 직위(백타원)를 받으셨다. 그동안 우리가 틈틈
이 준 용돈으로 단 한 번도 풍족하게 쓰지 않으시고, 오로지 자식들 복 받
으라고 기도하면서 법당에 헌금을 하셨던 거였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생전에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말을 이 글에서라도 해 봅니다.” 지금 내가 손자, 손녀까지 둔 나이에
이르러 어머니를 다시 떠올려본다. 지금 나는 자식들이 제 살기 바빠서 자
식들, 자기 가족들만 챙기는 것 같아서 가끔씩 서운한 마음이 생길 때도 있
다. 그런데 나 역시도 그랬다. 결혼한 뒤로 어머니를 잘 돌봐드리거나 연락
하지 않았다. 내가 어머니의 나이가 되니 이제야 어머니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어머니 역시 섭섭한 마음이드셨겠지만, 단 한 번도 우리 형제들에게
그러한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그런 어머니를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렇다. 이제 나는 자식들이 그저 자기들끼리 어울려 건강하게 살면,
그것이 바로 복이라고 여기고 살아야겠다. 사랑하는 자식들이 행복한 모
습이 바로 내 행복인 것이다. 게다가 나는 이제 홀로 꿋꿋하게 잘 지내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그렇게 배우는 재미가 쏠쏠하다.


▶ 이 글은 신준식 님의 자서전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며,
전문은 홈페이지(www.libraryonroad.kr)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홈페이지 공지 및 보도-홍보에서 원본파일을 다운하실 수 있습니다.(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