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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화:그때 그런 일이 있었네 - 사람, 그리고 사랑 : 7
2017.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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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화:그때 그런 일이 있었네 - 사람, 그리고 사랑 : 7

Ⅱ. 일화 : 그때 그런 일이 있었네



삶의 향기

봄에 | 전주시립완산도서관_전북

 


삶의 향기
나는 일 년 정도의 연애기간을 끝으로 1990년 1월 2일 눈이 내리는 날,
결혼식을 올렸다. 그 당시 결혼식은 당일 아침에 덕진 공원에서 비디오촬
영을 마치고 결혼식장으로 가는 것이 수순이었다. 눈이 오는 한 겨울바람
은 매서웠다. 눈보라 속을 거닐며 ‘오들오들’ 떨면서 비디오촬영을 무사히
마쳤다. 간단하게 화장을 수정하고 작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웨딩마치에
맞추어 하객들이 있는 결혼식장으로 신부입장을 하였다. 입장을 하고 있
는데 신랑 측 하객들이 소근 소근 거리기 시작했다.
“신랑 인물이 아깝다 아까워.”
여기저기서 인물평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를 두고
하는 소리인 줄 몰랐다. 결혼식은 삼십 분 만에 끝이 났고 우린 부부가 되
었다. 결혼 전에는 둘이 같은 공간에 있기만 해도 최고의 행복인 줄 알고

결혼을 했다. 결혼 후 펼쳐질 아름다운 꽃길만을 상상했다. 결혼이란 꽃길
만을 상상할 수 없고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장 둘이 살 신혼집은 좁디
좁은 보증금 5백만 원짜리 단칸방이었다. 결혼 전 내가 살던 자취집보다도
작았다. 남편은 취업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공무원 월급은 박봉을 면치 못
했다. 저축은 생각도 못했고 둘이 살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어느 날 남편
은 보험회사 연금보험증서를 들고 왔다. 빠듯한 살림에 연금을 넣을 처지
가 안되는데도 일방적으로 월급의 10%를 가입해가지고 왔다.
부족한 생활비에 결혼 후에도 맞벌이를 계속해야했다. 90년대에는 여직
원이 결혼과 동시에 퇴직하는 것이 사회 통념이었다. 결혼을 하게 되면서
여성들은 실직상태가 되어 전업주부가 되었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니던 회사에서는 임신 전까지는 다닐
수있도록 배려를 해 주었다.
남편은 가난한 집의 장남이었다. 시댁은 살고 있는 집과 전답이 모두 남
의 것이었다. 자가 소유는 얼마 되지 않았다. 생활이 이처럼 궁핍한 줄 알
았다면 결혼을 고려해 보았을 텐데 연애결혼이라 잘 몰랐었다. 크게 문제
삼아 보지 않았었다. 시어머니는 결혼하기 전에 보내드린 예물 예단 값까
지 보태서 우리가 살 전셋집을 얻어주었다. 가난을 벗어나고 싶었던 나는
또다시 가난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희망을 안고 출발한 결
혼은 또 다른 절망의 늪으로 가고 있었다.
남편은 결혼하자마자 날마다 만취한 상태로 귀가를 했다. 신혼생활부터
나를 지치게 했다. 매일같이 변명으로 일관하였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인
사불성이 되어 들어왔다. 남편에 대한 기대가 절망적으로 바뀌어갔다. 결
혼하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일 줄 알았는데 그 환상은 일찌감치 깨져가고 있
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고, 남편은 집밖에
서는 마치 독신처럼 행동을 하였다. 부인은 염두에도 없었다. 무책임한 남
편을 볼 때마다 실망만 커졌다. 하루하루가 고통의 나날이었다.
결혼 한지 한 달이 지날 무렵이었다. 남편은 나와는 의논도 없이 고3 시
동생을 데리고 온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해왔다. 희망도 없는 남편을 믿고
살까 말까하는 기로에서 시동생까지 데리고 왔다. 그야말로 진흙탕 속으
로 빠져가는 느낌이었다. 신혼집이 단칸방이라 시동생을 근처 고시원에 묵
게하고 아침밥과 도시락을 챙겨주라고 했다. 시동생은 2학년까지 본가에
서 통학을 했었다. 신혼의 단 꿈을 느끼기도 전에 술꾼이 되어버린 남편과
불편한 시동생과의 동고동락이 시작되었다.
매일 아침 밤잠을 설쳐가면서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시동생 새벽밥과
도시락 2개를 챙겨 등교를 시켰다. 바쁜 아침에 남편 해장국까지 따로 챙
겨야하는 신세였다. 결혼은 환상이 아니라 매정한 현실이었다.
지금처럼 따뜻한 실내주방도 아니었고 수도시설만 되어있는 재래식 부
엌구조였다. 추운 겨울날 두꺼운 잠바를 입고 수도꼭지 앞에 쭈그리고 앉
아서 설거지를 해야만 했다. 한참동안 설거지를 마치고 나면 다리가 저려
와 바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한참을 기다렸다가 일어나곤 했다.
재래식 부엌엔 연탄불이 있었고 연탄불이 피어오르면 밥과 찌개를 끓였
다. 저녁에는 회사 일을 마치고 퇴근한 후에도 편한 복장으로 쉬지도 못하
고 두 남자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남편은 자정이 넘어서도 돌아오지 않았
고, 시동생은 밤 11시가 되면 어김없이 정확한 시간에 왔다. 남편이 없는
자리에서 시동생과 형수는 결코 편한 사이일수는 없었다. 시동생은 간식
을 준비해 주면 모두 비우고서야 자정 무렵에 고시원으로 돌아갔다.
매일 같이 격식을 차려야 되는 시집식구는 친정식구보다는 몇 배가 불편
한 존재였다. 그때까지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2월의 밤공기는 너무도 차가웠다. 찬바람을 맞으며 시동생이 놓고 간
밥풀이 말라붙은 두 개의 양은 도시락을 수세미로 박박 문질러 씻어놓고
방으로 들어왔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 되어서야 하루 일과가 끝이
났다.
이 늦은 시간까지도 남편은 밖에서 하이에나처럼 방황을 하는지 돌아오
지 않았다. 내가 아침밥을 지으려고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날 때면 옆에 자고
있는 남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로 돕고 금슬 좋은 부부를 상상했었으나 남편은 거리가 멀어보였다.
나도 아침이면 출근을 해야 되는데 도와주기는커녕 출근 직전까지 밥상 옆
에서 ‘쿨쿨’ 늦잠만 자고 있었다.
연속되는 수면부족과 스트레스로 과로에 시달리게 되었다. 체력이 버티
질 못해 더 이상 직장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결혼하고 9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시동생이 오면서부터 생활비는 두 배로 늘었으나 시어머니는
쌀과 김치만 보내주시고 생활비는 지원을 해 주지 않으셨다. 남편 혼자 벌
이로는 시동생 도시락 반찬값도 충당하기 힘들었다. 시댁은 신혼부부인 우
리에게 과중한 짐을 지어주었다. 일 년 동안 밤잠을 설치며 뒷바라지한 시
동생은 대학입시에 실패를 하였고 재수를 했다. 내 공은 물거품이 되었다.
올해 딸 쌍둥이가 고3이다. 입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오히려
내 딸들은 밤늦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잠이 들고 만다. 나는 잠자는 일정
시간을 넘기면 불면증에 시달리기 때문에, 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을
잔다. 신혼 초에 시동생한테는 시댁식구라는 이유로 그럴 수가 없었다. 서
로의 배려가 아쉬웠던 신혼시절이었다. 남편은 항상 내 말이라면 무조건
압력행사부터 하려고 했고, 의사소통은 모두가 일방통행이었다.
불통부부로 살아 온지도 벌써 2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마치 올 여름 무
더위를 참아 낸 것처럼 우리부부의 불꽃 튀는 삶도 이제는 잠잠해져 갔다.
다소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과욕을 버리고 상대방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
력하고 다름을 인정하기로 다짐했다. 그동안의 감정싸움도 모두 부질없다
는 생각을 해 본다. 부부란 미운정 고운정이 쌓여 서로가 이해하면서 같이
걸어가는 끝이 없는 길이라고 생각을 해 본다.
‘소중한 인연과 진정한 부부란 무엇일까?’를 되새겨 보았다. 서로의 믿음
을 전제로 믿어주고 이해하고 아껴주고 사랑하는 부부가 진정한 부부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남편을 믿어주고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내 마음에도 웃
음이 찾아왔고, 가정에도 활기가 넘쳐났다. 앞으로는 남편의 장점만을 골
라서 칭찬을 해야겠다. 장점을 찾아보니 단점보다 많았다. 예쁜 두 딸을 갖
게 한 일, 내가 아플 때 위로해 주기, 무거운 짐 들어주기, 김장 도와주기,
반찬투정 하지 않기, 새벽에 밭에 나가 유기농 채소를 공급해주기, 생활용
쓰레기 치워주기, 여행할 때 운전 해주기 등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특
히 세상에서 나를 제일 많이 사랑한다는 말까지 립 서비스를 해 주는 남편
이 오늘 따라 사랑스럽다.
“덕 보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상대방이 나에게 덕을 보게 하는 마음이라
면 손해 볼 것도 없고 갈등도 없게 되니 원활한 가정을 꾸릴 수가 있다. 결
혼에 임할 때는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고 베풀어주려는 마음이라면
평생 후회하지 않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다”는 법륜스님의 말씀을
가슴에 다시 한 번 새겨본다. 그 말씀 덕분에 결혼해서 덕을 보려고 했던
나를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 받으려고만 하지 않고, 오히려 남편한테 무엇
을 해줄 것인가로 마음을 정하면서 행복지수가 높아졌다.
나는 결혼 삼 년차에 부동산사무소를 개업하였다. 개업하자마자 하루 종
일 정신없이 바빴다. 하루일과가 끝나는 저녁이 되면 파김치가 되었다. 일
을 할 때는 불임에 대한 스트레스를 덜 받을 줄 알았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
쁜 나머지 임신은 생각조차 할 수도 없었다. 잠시나마 잊을 수 있어서 마음
은 편했다. 시간은 쏜살같이 ‘훌쩍 훌쩍’지나갔다. 경제적인 형편은 날로
좋아졌다. 통장에 잔고가 늘어가는 만큼 기쁨도 배가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아이가 없는 허전함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다. 처음에
는 조금 늦어질 뿐, 남들처럼 자연임신이 잘 될 줄 알았다. 무슨 일인지 해
가 바뀌어도 임신소식은 없었다. 나보다 십 개월이나 늦게 결혼한 올케언
니는 허니문베이비라는 임신소식이 들렸고, 친구들도 결혼하기 바쁘게 바
로바로 임신소식이 들려왔다.
나도 드디어 삼 년 만에 임신이 되었다. 뛸 듯이 기뻤다. 기쁜 마음도 잠
시 계류유산이라는 아픔이 찾아왔다. 태아가 이미 안에서 죽어있다고 했
다. 그래서 수술을 해야만 했다. 그 후로도 한참동안 임신이 되지 않았다.
서른이 넘어가자 불안하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불임의 원인이 무엇일
까하고 불임클리닉으로 유명한 서울 C병원과 M병원을 찾아가 상담을 했
다. 두 병원 모두 시험관 시술을 권했다. 부부가 딱히 불임의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이왕이면 젊었을 때 해야 성공률이 높다고 해서 C병
원에서 시술하기로 결정을 하고 예약을 하고 왔다.
1995년 6월 29일 예약 날짜가 되어 시험관 시술을 하러가는 날이었다.
병원이 강남구에 소재하고 있어서 고속버스를 이용했다. 부푼 기대를 안
고 고속버스에 올랐다. 텔레비전에서 긴급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삼풍백화점이 붕괴된 날이었다. 백화점 안은 수백
명의 쇼핑객들로 붐볐던 곳이라 중상자와 사망자가 많았다. 전국에서 출
동된 119구조대원과 자원봉사자들이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열과 성의를 다해서 구조를 하고 있었다.
전쟁처럼 참혹한 광경을 더 이상 차마 바라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매
일 매일 무너진 건물 더미에서 생존자를 구출하는 광경이 이어졌다. 백화
점건물이 붕괴되어 500여명이 사망하고 6명이 실종되고 937명이 중경상
을 입은 엄청난 대형 참사였다. 붕괴 17일 만에 건물더미 속에서 마지막 생
존자가 구출되는 기적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생존자는 없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세월호 사건처럼 대형 사고였다. 온 국민이 집단우울증에 걸렸
다. 나라가 한 달 내내 초상집이었다. 이 상태에서 시험관 시술을 하는 것
은 사실상 무리였다. 시도는 했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서울 병원 인근에서 며칠씩 숙박을 해야 했
고, 배란을 유도하여 다시 수정란을 자궁 내에 넣어줄 때까지 서울에 머물
러 있어야 했다. 온갖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 하는 시술이었다. 시술하고
집에 도착해서도 착상할 때까지 부동자세로 조심조심해야 했다. 온갖 정
성을 다들여도 성공의 길은 멀기만 했다. 실패를 거듭할 때마다 자신감은
떨어졌고 미래가 보이질 않았다. 계속되는 시술에 몸과 마음이 지치고 경
비마련도 쉽지 않았다. 일을 하면서 진행하는 것은 무리였다. 임신하고 싶
은 간절함에 상상임신도 했다. 정신적으로 불안해지면서 마지막 실오라기
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남편 모르게 무속신앙에까지 손을 대어보았다.
모든 게 잘 되지 않았다.
이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생각하고 포기할 무렵이었다. 남편은 입양
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다. 애가 타는 우리부부를 보고 주위에서는 말들이
많았다. ‘부부금슬이 너무 좋아서 삼신할미가 아기를 태워주지 않는다는’
말까지 들려왔다. 임신에 대한 심한 스트레스는 더해만 갔다. 임신한 친구
들을 보면 죄인처럼 숨기 바빴고, 백일과 돌잔치에 초대를 받으면 가고 싶
지 않았다. 정말 죽을 맛이었다. 임신에 대한 강박관념은 갈수록 더해만 갔
다. 이대로 가다간 큰일 나겠다며 남편은 입양을 서두르고 시술은 그만 하
라고 단호하게 말렸다.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시술을 반복했다. 입양도 말처럼 쉽진 않았
다. 부모직업과 나이, 재산정도를 꼼꼼히 따져 물었다. 적합성 부적합성을
가리는 질문에 남편은 이미 비위가 상해있었다. 무슨 절차가 이렇게 까다
롭냐면서 불평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절망이라는 단어밖에는 생각이 떠오
르지 않았다. 임신도 입양도 쉽지 않았다.
몸을 추스르기 위해 1년 동안 쉬기로 했다. 쉬면서 그동안 하고 싶은 대
학원 공부를 하면서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나는 서른두 살 남편은
서른여섯 살의 늦깎이로 부동산학과에 나란히 입학을 하게 되었다. 남편
은 공무원인데 부동산에 관심이 많았다. 둘이는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주경야독을 하면서도 힘든 줄 몰랐다. 우리는 밤 깊은 줄 모르고 토론과 과
제를 함께 나누었다. 임신얘기만 빼면 걱정이 없는 부부였다.
즐거웠던 1학년 과정을 마치고, 2학년 2학기가 되면서 공부에만 전념할
수가 없었다. 시댁의 눈치가 보였다. 손자도 못 낳는 며느리가 고울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결혼해서 내 손으로 직접 시부모님 집을 지어드렸으니 밥
값은 충분히 했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밥값은 대를 잇는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철없던 며느리였나 싶다. 애타는 시
부모님 눈치가 보여서 재차 시험관 아기 시술을 시도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 또한 나와 같은 처지
였다. 친구가 소개해줘서 익산에 있는 J산부인과를 찾아갔다. 가까운 거리
여서 일단은 편한 마음으로 다닐 수 있어서 좋았다. 운이 좋게도 두 번째
시술에서 쌍 태아가 임신이 되었다. 다행이었다. 수많은 노력 끝에 결혼한
지 7년 7개월 7일 만에 기적처럼 임신이 된 거였다. 마치 행운이 내게 찾아
온 것처럼 날짜 조합도 ‘칠’이 이어졌던 것이다!
임신을 하자마자 부동산 사무실을 접었다. 좋은 음식과 좋은 음악으로
전적으로 태교에만 전념을 하고 싶었다. 일을 하다가 임신이 되어 무료하
게 지내기에는 하루가 길었다. 임신초기에는 움직이면 안 되어서 극도로
조심했다. 안정이 되어갈 무렵 대학원은 논문기간이었다.
도서관에서 참고문헌을 빌려다가 하루 종일 방에 틀어 박혀서 참고문헌
을 정리했다. 70페이지 분량의 논문을 준비하면서 하루 종일 책과 씨름을
해야 했기에 임신 동안 책 속에 파묻혀 살았다. 임신초기부터 입덧이 심해
서 시댁에서 시어머니 신세를 졌다. 나의 임신소식에 동네사람들은 기뻐
해주었다. 시골아주머니들은 맛있는 음식을 해 왔다. 친정엄마의 손길처
럼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이웃집 할머
니가 해온 수수부꾸미였다. 수수부꾸미는 쫀득쫀득하고 들기름 냄새가 고
소한 것이 어렸을 때 맛보았던 그리운 고향의 맛이었다. 얼마나 꿀맛이었
는지 시부모님 몫도 남겨놓지 않고 부꾸미 3장을 정신없이 먹어버렸다.
태교음악을 잔잔하게 틀어놓고 종일 앉았다 누웠다를 반복하면서 논문
준비를 하였다. 임신 중에 한 일은 오로지 논문 한편을 완성하는 데 그쳤
다. 임신하면 동화와 동시를 읽어주면서 태교에만 집중하고 싶었었는데 생
각대로 되지 않았다. 지금 논문을 완성하지 못하면 기약할 수가 없어서 무
리수를 두어야만 했다. 쌍둥이를 돌보면서 논문을 완성한다는 것은 생각
조차 할 수 없었다. 임신 초에 유산을 방지하려고 미동도 하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논문준비에 도움이 되었다.
임산부와 태아를 염려해 주시던 시어머니는 논문이 완성될 때까지 적극
적인 지원을 해 주셨다. 태아 생각해서 쉬엄쉬엄하라고 감시를 하셨다.
임신 12주에서 20주까지는 무리하지 않고 더욱더 조심을 했다. 그런데
명절 하루 전 날이었다. 갑자기 유산기가 느껴지면서 심한 복통과 하혈이
시작되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불길한 생각이 스쳐갔다. 또 아이를
잃을까 속이 시꺼멓게 탔다. 정신없이 대학병원 응급실로 갔다. 명절연휴
전이라 대학병원 응급실에는 인턴과 레지던트로 보이는 젊은 의사선생님
만 가득했다. 아랫배 통증을 호소하니까 내과의가 다가와 진찰을 했다. 산
부인과 의사는 아닌 듯 했다. 시간이 지체되면 태아와 산모가 위험할 것 같
은 생각에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시술했던 익산 J산부인과 홍원장님께 전화를 걸어 참을 수 없는 통증을
호소했다. 원장님께서는 내 말만 듣고 수술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까 빨리
J산부인과로 오라 했다. 추석하루 전날이라 개인병원은 휴진이었다. 그런
데도 수술을 해주시겠다고 했다. 너무나도 고마웠다. 입원했던 대학병원
에 퇴원을 요청했지만 퇴원 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수 있다며 만류했다.
이후에 벌어질 불미스러운 모든 일을 환자가 감수하겠다는 각서를 쓰고서
겨우 퇴원수속을 밟을 수 있었다,
J산부인과에 도착하여 초음파를 했더니 역시나 과 배란을 유도하면서 호
르몬제 과다투여로 난소하나가 심한 염증을 일으켜 적출수술을 해야만 했
다. 시급을 다투는 수술이었다. 동의서에 무조건 사인을 하고 나는 바로 수
술실로 들어갔다. 임신 중에 하는 수술이어서 마취도 하지 못하고 최소한
의 진통제만을 사용한 채 개복수술을 하였다. 태아와 산모 중 어느 한쪽이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조건 속에서 수술을 강행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개복수술을 하고 난소 적출수술을 마쳤다. 나는 수술 중에도 통증을 참으
면서 오직 태아만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기도의 힘은 쌍태아와
나를 무사히 지켜주었다. 수술을 마치고나서 남편 손을 잡고 펑펑 울었다.
태아를 지켜냈다는 안도감에 그동안 긴장했던 근육들이 풀리면서 힘이
갑자기 쫙 빠져버렸다. 그리고는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수술 후 임산부가 한동안 깨어나지 않자 남편은 또다시 긴장의 끈을 놓
지못했다. 얼마나 애가 탔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나만큼이나 남편도 마음
고생이 많았던 것 같다.
한차례의 폭풍우가 지나가고 별 탈 없이 임신 9개월이 되어 쌍둥이를 출
산하였다. 쌍둥이 만삭 때는 내 몸무게가 21kg이 늘어 76kg이 나갔다. 만
삭일 때 배는 마지막까지 부풀어 오른 팽팽한 풍선 같았다. 결혼한 지 8년
4개월 만에 귀한 딸 쌍둥이를 품에 안아볼 수 있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사랑스런 딸들을 얻기까지 8년 동안의 노력과 상처로 점철된 지난
날들이 스쳐가면서 눈시울이 또다시 앞을 가렸다.
쌍둥이 중 큰 아이는 2.5kg, 작은 아이는 2.7kg으로 건강하게 태어났다.
출생 당시 2.5kg 이하면 미숙아로 분류되어 보육기에 들어가야 했다. 다행
히도 2.5kg으로 건강하게 태어나서 아기들은 출생 다음 날 집으로 왔다.
그 즈음 내 석사학위 논문이 통과 되었다. 마침내 몸으로 낳은 두 딸과 머
리로 낳은 논문집이 같이 탄생되었다. 둘 다 내 인생의 가장 값진 보물과
같은 존재이다. 두 딸은 백일 한복을 입고 우리 부부의 졸업을 기꺼이 축하
해주었다. 그 어떤 축하보다도 값진 축하였고 흐뭇했다. 우리부부가 늦깎
이로 같은 과를 나란히 졸업하게 되었고, 쌍둥이 출산까지의 일들이 당시
일간지에 기사화 되었었다.
쌍둥이를 처음 안아보았을 때 아이들의 새까맣고 많은 머리숱이 나를 또
한 번 행복하게 했다. 엄마의 곱슬 머리카락을 닮지 않아서 정말로 다행이
었다. 나는 제왕 절개 수술을 했기 때문에 사흘 후 퇴원을 했다. 퇴원하자
마자 두 아이를 안아보았다. 드디어 해냈다는 성취감에 세상이 모두 아름
다워 보였다. ‘엄마’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수없이 먼 길을 돌아왔다. 가슴
이 뭉클해지면서 행복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
다. 인생의 최고의 선물이었다. 쌍둥이를 나란히 방바닥에 눕혀 놓고 바라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내가 낳은 아이라는 실감이 나질 않았다. 아이
가 주는 미소하나에도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아이들 커가는 과정을 모두
사진으로 담았다. 두 아이는 언제나 같이 웃고 같이 울었다. 먹는 것도 같
이 먹으려고만 했다. 모든 것이 세트로 움직였다.
10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9개월 만에 태어난 두 딸은 몸이 허약했던지 초
등학교 입학 전까지 병치레를 했다. 나마저 면역력이 약해져서 세 명 모두
가 번갈아 가면서 병원으로 출근을 했다. 특히 예방접종 하러 갈 때는 주위
사람의 도움을 요청해야만 했다. 신혼 때 밥을 해준 막둥이 시동생의 도움
을 많이 받았다.
둘 중 한 명이 갑자기 아파 병원을 가야하는 응급상황에는 위험을 무릅
쓰고 한명은 재워놓거나 그냥 눕혀놓고 아픈 아이만 들쳐 안고 병원을 다
녔다. 아이들이 제 발로 걷기 시작할 때 까지는 엄마 혼자서 쌍둥이를 돌본
다는 것은 사실 무리였다. 그러나 아이들을 바라보면 그런 생각들이 어느
새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곤 했다. 마치 아이들은 우리를 활짝 웃게 하는
예쁜 꽃과 같았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늘 행복했다.
큰 아이는 감기가 들면 편도가 곧잘 부어 고열이 났다. 해열제를 냉장고
에 비치해 놓고 해열제가 보약인 줄 알고 늘 먹였다. 위험한 행동이었다.
훗날, 간호조무사 공부를 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임신 마지막 한 달
동안 늦게 완성되는 부분이 바로 폐 기능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일까
아이들은 유독 감기를 달고 살았다.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병원 가는 횟수
가 조금씩 줄었다. 이제는 건강한 생활을 하고 있다. 올 해 고등학교 삼학
년이다. 그동안 노력하고 수고한 만큼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딸 지현이, 지수야. 너희는 엄마 아빠의 희망이란다.


▶ 이 글은 봄에 님의 자서전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며,
전문은 홈페이지(www.libraryonroad.kr)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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