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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화:그때 그런 일이 있었네 - 사람, 그리고 사랑 : 4
2017.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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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화:그때 그런 일이 있었네 - 사람, 그리고 사랑 : 4

Ⅱ. 일화 : 그때 그런 일이 있었네



나비의 꿈

오안교 | 구로주민전용도서관_서울

 

 

육아전쟁
상돈이가 태어날 당시 남편은 41세였고 나는 38세였다. 평소 단정하고
얌전한 편인 남편은 좋아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친가와 처가에 전화
하기 바빴다.
더구나 병원에선 7개월쯤 되었을 때 딸이라고 얘기해줘서 다소 실망해
있던 중이라 그 기쁨이 더 컸던 것 같다. 남편은 곧 잘 아는 한학자를 찾아
가 이름을 지어왔다. 다음 날 출생신고를 하니 담당직원이 일어나 인사하
며 축하를 해주었다고 주민등록표를 내보이며 감격스러워 했다.
육아는 고교 때의 친구 엄마가 해주기로 해서 우리 동네에 방을 얻어 드
렸다. 아들과 둘이 어렵게 살던 그 분은 아기가 왔다 갔다 하면 안 좋다고
데리고 자겠다고 하셨다.
평일엔 퇴근 후 나만 가서 잠깐 들여다보고 주말에 데려와 같이 지냈다.
그 점이 지금까지도 무척 후회스럽다. 아이는 사랑을 먹고 자란다는 육아
의 기본을 처음부터 도외시하고 어른들의 편의 위주로 키운 것 같아 미안
한 마음 그지없다. 설상가상으로 그 모자는 아기를 옆에 뉘어 놓고 담배를
피워 방안에 연기 가득했다. 이 같은 상황을 몇 번 목격한 우리는 좌 불안
이었다.
말은 못했지만 나쁜 환경 탓인지 상돈이의 표정은 사랑 충만한 밝은 표
정이 아니었다.
고심 끝에 10개월 된 아들의 육아를 같은 동네의 젊은 아주머니에게 맡
기기로 했다. 그 집에도 어린 아이들이 2명 있어 같이 잘 놀 수 있을것 같
았다. 그러나 아침에 데려다 주면 떨어지지 않으려고 고개를 이리 저리 돌
리는 아이를 억지로 떼어 놓고 돌아서는 나의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겁기
만 했다.
하루는 퇴근 후 데리러 가니 아이 얼굴이 깨지고 붓고 멍들고 엉망이었
다. 아주머니는 집 앞 골목에서 동네 아이들이 데리고 노는 상돈이를 잊은
채 다른 아주머니들과의 수다에 열중하고 있었다고 한다. 상돈이의 자지
러지는 울음에 돌아보니 아이들이 상돈이를 높은 곳에 올려놓고 놀다가 순
간 없어졌고 이때 상돈이는 그만 보도블럭 위로 떨어져 얼굴을 심하게 다
친 것이다. 상황은 이미 끝났고 아주머니는 미안해서 쩔쩔매는데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 얼굴을 하고 잠이 든 아들이 너무 불쌍했다. 당장 직장
을 그만두고 싶었으나 그럴 형편이 안 되니 안타깝기만 할 뿐이었다. 어떻
게 그 날 밤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그 즈음 우리 집 앞에 놀이방이 생겼다.
무책임한 아주머니 보다는 전적으로 아이 돌보는 것을 업으로 하는 놀이
방이 차라리 나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옮겼다.
딸은 너무 어렸기에 시골 큰 동서에게 막무가내로 육아를 부탁했었다.
그러다가 1992년 3살이 되었을 때 데려 와 둘을 같이 동네 교회에서 운영
하는 놀이방에 보내게 되었다. 나의 출근 준비도 바쁜데 아이들을 깨워서
씻겨 데리고 가는 일은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상돈이 혼자일 때는 잠이 덜
깼으면 업어다 주면 되었으나 두 명이다 보니 억지로 걸려서 가는 일은 피
차간 너무 힘들어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다.
월요일 힘들게 출근하여 내 자리에 앉으면 일주일의 1/6을 해냈구나! 하
고 휴~ 한 숨을 내쉬었다. 화요일은 1/3, 수요일은 1/2, 토요일이면 이렇
게 4번만 더 하면 한 달이구나, 한 달이 지나면 이렇게 4번만 더 하면 방학
이지? 이러면서 방학만 손꼽아 기다렸다.
보통은 지난 추억은 아름답게 기억되는데 이 시절의 기억만큼은 다시금
생각해도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려 진다. 육아가 아니라 사육된 것 같아 너
무나 가슴 아프다.


아들의 효심
아들 상돈이는 아기 때부터 잘 울지도 않고 순해서 이 정도면 한꺼번에
다섯 명도 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5,6세 무렵의 상돈이는
말도 귀엽게 잘하면서 인정이 많았다.
한번은 수학여행 인솔 후 귀가하여 깜빡 잠이 들었는데 어렴풋이 눈을
떠보니 어린이 집에서 돌아온 5살의 상돈이가 머리맡에 앉아서 내려다보
고 있다가 반색을 한다. 그리곤 나를 일으켜 앉혀놓고 넙죽 큰절을 하던 그
자그마한 등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어느 날은 우리의 결혼사진을 같이 보다가 무심코 ‘너는 이때 어디서 무
엇을 하고 있었냐’고 물으니 우주 속의 먼지로 있었는데 엄마가 자기를 끌
어왔다고 대답해서 우리를 한바탕 웃게 만들기도 했다.
재미있어서 크면서까지 가끔 이 문답을 하곤 했는데 대답에 살이 좀더
붙었다. 자기는 이건희 할아버지네 집으로 가고 있었는데 엄마가 억지로
끌어다 엄마 배에 집어넣었다고 익살스런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그럼 난 또 알아듣건 말건 설명을 해주었다. 부모가 자식을 끌어온 게 아
니고 자식이 먼지로 우주를 떠돌다가 자신과 인연이 닿는 부모를 스스로
선택해서 온 것이니 이다음에 왜 날 낳으셨냐고 원망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동생과 놀다가도 내가 실수로 물건을 떨어뜨리면 반사적으로 즉각 뛰어
와 괜찮은지 확인하고 다시 돌아가 놀곤 했다.
그러나 딸은 미동도 않고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으니 이 간극을 어떻게
좁혀야 하나 은근 걱정도 되었다. 아마도 아기 때 큰 집에서 자랐기에 애착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탓 같았으나 지금은 나의 둘도 없는 좋은 친구다. 때
론 둘이 밤새 이야기 하다가 아침이 거의 되어 잠깐 눈을 붙일 때도 있으니
엄마에겐 딸이 꼭 필요한 모양이다.
아이들이 2학년인 1997년 4월 초였다. 신학기의 바쁜 탓 때문이었는지
몸살 기운으로 퇴근 후 꼼짝 못 하고 누워 있었다. 아들이 걱정스런 얼굴로
머리도 만져보며 어떻게 아픈지 물어 보았다. 귀찮은 듯 대충 대답하고 그
대로 누워 있었는데 얼마 후 약 한 봉지와 물을 가져와 먹으라고 일으켜 앉
혔다. 웬 약이냐고 물어 보았더니 저금통에 천원 밖에 없어 그걸 가지고 약
국에 가서 엄마 나이와 아픈 증상을 얘기하고 천원 어치를 달라고 해서 한
봉지를 지어 왔다고 한다. 가슴이 뭉클했다. 약을 먹었더니 이제 수건을 가
져다 식은땀을 닦아주기까지 한다. 잠시 후 재건축 회의가 있어 힘겹게 일
어서려는데 재빨리 옷을 가져다 입혀주고 회의 장소까지 부축해서 같이 가
주었다.
이 날의 감격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 같다. 아들의 효도는 평생 이것으
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곤 앞으로 아들에 대해 어떠한 기대도, 욕심도
다 내려놓겠다고 스스로를 채근했다.
그리고 2002년 4월 아들이 중1 때였나 보다. 6촌 오빠의 아들 결혼식이
있어서 대전에 내려가 아버지와 함께 결혼식에 참석하였다. 피로연에서 음
식을 담으려고 줄 서있는 나를 흐뭇한 표정으로 유심히 바라보시는 아버
지가 의식되었다. 친정집에 돌아와 아들과 셋이 있게 되었는데 아버지께
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한마디 하셨다.
‘넌 어떻게 된 일인지 50이 넘으니까 오히려 피부도 뽀얀 게 한 인물 나
는 것 같구나. 결혼할 때도 솔직히 나이 들어 보이고 못생겼었는데 말이다.
지금 네 나이에 너 정도의 인물도 드물 것이다.’ 평생 처음 들어보는 아버
지의 고슴도치 사랑 같은 말씀이었지만 부끄러우면서도 기분은 좋았다. 아
마도 나의 일생 중 심신이 가장 편한 시기였으니 여유로운 표정이었을 것
이고 수입에 맞춰 비싼 부띠끄 옷을 입은 탓일 게다.
아들이 생글거리며 말을 받았다.
‘외할아버지! 그건 우리 아빠가 엄마 속 썩이지 않고 잘 해줘서 그래요.
얼굴은 나이 먹으면서 자기가 만들어 가는 거라고 선생님이 얘기해 주셨
어요.’
아버지도 아들도 이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이제 아들의 나이 28세! 이만큼 키웠으니 어서 좋은 여자가 나타나 잘 데
려가 주기만 바랄 뿐이다.
그리고 아들아! 너의 그 효심만은 죽을 때까지 잊지 않고 잘 간직하마!

늙은 엄마의 비애
상돈이는 말을 겨우 하기 시작한 3살 경 재우려고 이불을 덮어줄라치면
예쁘게 덮어달라고 주문하여 가장자리를 반듯하게 해줘야 만족해했다. 아
침에 어린이 집에 갈 때는 자신이 맘에 드는 옷을 직접 골라 입고, 셔츠는
단추를 풀어 헤치는 일 없이 다 채워 입었다. 조금 더 크니 내가 옷이나 구
두를 새로 사면 ‘참 예쁘다‘를 연발하며 퇴근하고 오면 ‘친구 선생님들도 예
쁘다고 했느냐‘고 꼭 물어보곤 했다. 그 때마다 그 표정과 말투가 얼마나
귀엽던지 피로가 다 풀리는 듯 했다.
1995년 7세 때 여의도로 이사해서 유치원에 다녔는데 초등학교 주변인
탓인지 이웃에 같은 또래들이 많았다. 엄마들끼리 인사하고 있으면 아들
이 끼어든다. ‘우리 엄마는 44살 늙은 엄마예요’라고 하면서 말이다. 늙은
것도 서러운데 그 점을 꼭 강조하니 미안도 하고 약도 올라 난 어정쩡한 미
소만 지을 뿐이었다.
1학년 입학 후 1달이 되던 3월 말일 담임선생님의 호출을 받았다. 미술
시간에 선생님 그리기를 했는데 선생님께서 예쁘게 그려달라고 했나 보다.
그러자 아들이 ‘늙어서 미운데 어떻게 예쁘게 그려요?’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속이 상한 선생님이 ‘너희 엄마는 젊어서 예쁜가 보구나.’라고 했다
면서 속상해 했다. 난 곧 학교로 달려가 늙은 나의 모습을 보여주며 머리를
조아리고 선생님을 안심시켜야 했다.
집에 와서 아들에게 ‘엄마도 늙었는데 왜 그렇게 말을 해서 선생님을 속
상하게 했느냐’고 물으니 대답이 걸작이다. ‘얼굴은 화장으로 가릴 수 있지
만 목과 손은 못 가려서 쭈글쭈글 하니까 미운데 어떻게 가짜로 그리겠냐?’
고 말이다.
2학년에 진급한 후에는 출근길에 담임선생님께 인사를 하고자 아이들과
같이 등교했다. 기분 좋게 건물 입구까지 갔는데 엄마와 헤어질 것으로 생
각했는지 인사를 하면서 ‘엄마 늦지 않게 빨리 가라’고 걱정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걸 무시하고 교실에 같이 들어가 담임을 만나니 다소 입이 부어
있었다. 이 눈치 없는 엄마는 자상한 아들이 엄마가 출근 시간 늦을까봐 걱
정을 한 것이라고 착각을 했다. 그래서 그 신통한 얘기를 아빠 앞에서 다시
듣고 싶어, 저녁식사를 하며 아들에게 물었다. 그러나 의외의 대답이 나를
절망스럽게 했다. 엄마가 늙어서 창피해서 그랬다나? 남편은 민망한 미소
만 띄었고 난 할 말을 잃었다.
늙은 엄마이다 보니 다른 엄마들은 나를 같은 학부형이기 보다는 선생으
로 대접을 하려해서 커뮤니케이션 형성에 어려움이 많았다. 아이들 기준
으로 하면 엄마들과의 나이 차가 10살 이상 나고, 우리 친구들 기준으로 하
면 아이들이 초등생과 고등학생 정도로 차이가 나니 이래 저래 교육에 관
한한 말이 통하지 않았다. 고교 시절 친한 친구는 사위를 보았는데 난 아이
들 받아쓰기 공부나 시키고 있었으니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그러나 늙은 엄마의 좋은 점을 억지로 만들어내 합리화하며 살고 있다.
친구들이 할머니 소리들을 때 난 어린 아들, 딸과 젊게 살 수 있어좋고, 며
느리는 시어머니와 접할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을 것이니 아들의 결혼조건
도 좋아지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이다.
<아이들의 진로> 연년생인 아들과 딸을 직장생활을 겸하며 혼자 키우기
가 무척 힘들 것 같아 딸의 출생신고를 앞당겨 초등학교를 같이 입학시키
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딸의 출생신고를 5개월 앞당겼다. 학급도 같은 반 배정을 요구하
여 숙제 및 준비물도 같이 해결할 수 있었다.
딸 윤주는 어려서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다. 어린이집에서 매일 하원
할 때마다 선생님께 그림 그린 것을 편지라고 주고 왔으며, 집에 와서는 자
기 방 책상에 앉아 인형을 마주 놓고 대화하고 있었다. 인형은 선생님이었
고 그날그날 선생님과 얘기했던 것을 일인극하듯 했다.
학교에 입학해서도 틈틈이 그림을 그려 너무 지나치다는 선생님의 지적
을 받기도 했다.
한글 공부가 충분히 되지 않아 항상 일기장 검사를 하며 맞춤법을 교정
해 주었는데 2학년 때의 어느 날은 인사 안 받는 선생님들의 행동을 신랄
하게 비판하는 2페이지의 글을 빼곡히 써 놓아 나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지금도 자신의 주관이 뚜렷한 똑똑한 딸이다. 우려와 달리 사회성도
좋아 교우관계가 원만했으며 중고등시절에는 학급의 정부반장에 늘 선출
되기도 하였다.
아들 상돈이는 어려서 부터 끈기와 집중력이 부족해 레고놀이를 해도 처
음 시작만 했지 완성을 하지 못하고 다른 장난감으로 관심을 돌려 버리곤
했다. 6살에 <계몽편>을 교재삼아 아빠가 한문교육을 시도했다. 1년여 동
안 책이 닳도록 몇 번을 반복했지만 남는 게 없는 것 같다. 어린이 영화 및
박물관, 미술관 등에 데려가 봐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편안한 환경에서 양육되지 못해
정서불안정 및 애정결핍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음악치료 선
생님을 수소문해서 주 1회, 회당 30만원씩 주고 음악치료를 1년 이상 받도
록 하기도 했다.
중학교도 같은 학교에 진학하고 보니 우리 아이들의 관계를 아름아름아
는 학생들이 많았나 보다. 당시 학생회장이 딸을 좋아했는데 우리 아들이
지나가면 다른 아이들이 그 회장한테 ‘너의 처남 간다’고 놀리기도하고, 딸
한테는 짓궂은 아들 친구들이 ‘너의 오빠 친구이니 우리에게도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다고 속상해 하기도 했다.
시험을 보면 성적이 둘 다 비슷하게 나왔다. 성적 차이도 없으니 피차 공
부에 욕심내지 않았다. 개인과외 및 3, 4명의 소그룹 학원 수업 등 거액의
비용을 들여 공부시켜 보았건만 결과는 시원치 않았다.
공부에 관심도 욕심도 없는 것을 인지하니 앞으로의 진로가 은근히 걱정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을 닦달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은 각자
의 재주를 가지고 태어나기에 자기의 장점을 살려 자기 몫의 인생을 살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야구방망이로 이를 쑤실 수 없고, 천체망원경으로 곰팡이를 들여다볼 수
도 없으며, 천리마가 쥐를 잡을 수도 없다. 저마다 사는 법이 있다고 생각
한다. 위험에 직면했을 때 새는 날아서 피하고, 생쥐는 구멍 파고 들어간
다. 불행은 생쥐가 날고 싶어 하고, 새가 땅속에 숨고 싶어 할때 생기는 것
이 아닐까?
지금은 아들은 희망대로 무역학을, 딸은 서양화를 전공하여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 


▶ 이 글은 오안교 님의 자서전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며,
전문은 홈페이지(www.libraryonroad.kr)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홈페이지 공지 및 보도-홍보에서 원본파일을 다운하실 수 있습니다.(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