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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화:그때 그런 일이 있었네 - 사람, 그리고 사랑 : 2
2017.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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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화:그때 그런 일이 있었네 - 사람, 그리고 사랑 : 2

Ⅱ. 일화 : 그때 그런 일이 있었네



서로에게 꽃인 것을

정영애 | 강서구립우장산숲속도서관_서울

 

 

서로에게 꽃인 것을
딸이 민화 ‘모란도’를 두 점 그려서 선물했다. 흰 창호지에 정성스레 싼
그림을 풀어보니 은은한 한지에 활짝 핀 밝고 큰 꽃들이 환히 웃는다. 예로
부터 부귀를 상징한 모란꽃을 소재로 한 민간에 흔한 그림이란다.
“두 그림 중에 어떤 게 더 마음에 들어요?”
라고 묻는 딸의 말에 언뜻 두 그림을 보니 밝고 큰 꽃이 그려진 그림에 더
눈이 갔다. 이유를 묻는다.
“언뜻 보니 이쪽 꽃 그림은 화면 가운데 붉고 화사한 큰 꽃이 있고 그 곁
에 꽃봉오리도 자연스럽게 있어서 생동감이 넘치고 강조의 미가 있네, 그
래서 더 내 마음을 끄나 봐, 반면에 저쪽은 조금 더 작은 흰 꽃과 연분홍 꽃
의 파스텔 톤으로 은은한 꽃들이 규칙적 정돈 되어 있네”
라고 대답했다.
거실 중앙에 두 그림을 놓고 바라보노라면 내 마음이 한없이 평안해져서
한참을 들여다보게 된다. 유화와 달리 한지에 그려진 이 꽃들은 언제 봐도
은은한 모습 그대로다. 꽃 색 하나하나가 그렇게 고울 수가 없다. 홑 양귀
비 꽃잎 같다. 딸아이에게 물으니 한 번 칠하고 다 마른 다음에 다시 칠하
기를 여러 번 반복해서 그렇게 고운 꽃잎이 되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딸아이가 손목이 아픈데도 정성껏 그림을 그려서 완성시킨 꽃송이를 보는
내 마음이 아려온다.
처음에 눈길을 끈 화려한 색깔의 꽃그림은 밝고 외향적인 친구를 연상시
킨다. 자유분방하고 즉흥적이며 사교적이어서 먼저 상냥하게 다가온 그녀
는 언 몸을 확 풀어주는 장작불 같은 존재였다. 내가 기죽어 있을 때 단번
에 멋진 곳으로 데려가 기분을 풀어주었다.
자꾸 들여다보니 밝고 눈을 끌던 그림보다 파스텔 톤의 연분홍색, 흰색
과 청색의 정연한 그림에 더 마음이 갔다. 차분한 사람은 먼저 손을 내밀진
않지만 만나다 보면 겸손하고 속이 깊어 따뜻함을 더 느끼게 해주었다. 마
음이 양털코트처럼 따스하고 보드라운 사람, 내 얘기를 묵묵히 들어주고
담담하고 진중한 자태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내 안에서 해답을 찾게 해 주
는 어느 스승님이 떠오른다.
딸아이는 차분하고 은은한 향을 풍긴다는 소리를 듣는 편이다. 그런 예
쁜 딸아이가 나에게로 와서 내 생애 내내 가장 경이로운 선물이 되어주었
다. 딸이 내게 오던 날은 파아란 하늘에 커다란 나무에 활짝 핀 벚꽃들이 나
를 내려다 봐서 눈이 부시던 태몽을 꾸었다. 나는 매일 거실에 앉아 딸이 그
려준 그림을 쳐다보면서 딸아이를 생각하며 뿌듯하게 차오르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또 나에게 꽃이 되어준 지인들과 또 나로 인해 꽃 같은 시간을 함
께 나눈 이들을 떠올려본다. 우리 모두 마주하는 순간 서로에게 꽃인 것을.

외손자와 보낸 벅찬 날들
안방 창문 밖으로 잎을 다 떨군 나무에 매달린 진홍빛감이 꽃처럼 곱다.
마구 흔들고 가는 매운바람에도 보석처럼 빛난다. 그 자리에 서서
“저게 감이란다.”
내가 가리키는 창밖의 작은 열매를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던 아기 외손자
아파트 뜰에 피어난 진달래꽃을 신기해하고 여름엔 분수에서 품어져 나오
는 물줄기에 고사리 손을 내밀면서 팔짝거리며 좋아하던 모습도 눈에 선
하다. 가을이면 낙엽더미를 그 작은 발로 밟으며 까르르 웃어대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하얗게 쌓인 흰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드느라 집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 고운 기억들을 갖게 해준 아이가 태어나기 까지 딸은 참 힘들어했었
다. 임신에 대한 대비가 없었던 딸이 “엄마 나 소화가 안 돼”하는 전화를 하
더니 몇 달이 지난 후에는 조산기가 있어서 이대목동병원 산모응급실에 입
원과 퇴원을 반복 했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고난 앞에 딸은 기진맥진했고
엄마인 나는 놀랜 채 그런 딸을 달래느라 내 모든 시간을 쏟아야만 했다.
딸은 결혼한 지 2년째인 2007년 10월 24일, 코가 꼭 제 아버지를 닮은
갸름한 얼굴을 한 2.8 kg의 아기를 임신 9개월 만에 낳았다. 신혼 초 상암
동 아파트에 살던 딸이 힘든지 엄마가 살고 있는 이 낡은 목동아파트로 이
사를 와버렸다.
첫손자를 보아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된 시어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커다란 장난감을 들고 벙실대며 아기를 보러 분당에서 목동아파트 4단지
로 달려오시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손자 집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장난감
상자를 가슴에 안고는 뒤따라 내리던 할머니가 미처 한 발을 빼지 못한 것
을 모른 채 급히 자동차문을 닫아버렸다. 할머니는 그 날 이후 꼼짝없이 다
리에 기브스를 한 채 여섯 달을 실내에서 지내야만 했다.
그런 할아버지의 사랑을 아기는 낯가림으로 애를 태우게 했다. 할아버지
집에 가면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이 준비한 장난감을 아무리 눈앞에서 흔
들어대도 아기는 울기를 그치질 않는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시집식
구의 사진을 확대해서 실제 얼굴인양 벽에다 붙여놓고 ‘여긴 할아버지 이
쪽은 할머니’ 하며 틈만 나면 가르쳤건만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아기가 기기 시작할 무렵, 유난히 쫑긋 귀를 세우고 현관에서 무슨 소리
가 나는듯하면 재빠르게 한달음에 그쪽으로 기어가서는 한 팔로 마루를 치
면서 흔들며 환영 인사를 해댔다. 대학원 공부하느라 하루종일 집을 비운
제 엄마가 돌아온 줄은 용케도 알았다.
오크 중탕기가 끊는 소리에 아기가 기어가서는 어느새 그 연한 팔이 데
이기도 하고 잠시 눈을 옆으로 돌린 사이에 유모차에서 떨어지는 순간에
는 내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 했다. 조금 더 자라서 간신히 소파에 기어오르
게 되고부터는 스위치마다 건드려서 환히 전등불을 밝히는 것을 그리도 좋
아했다. 퇴근한 사위는 그 어린 것 뒤쫓아 불 끄기 바쁘고 그것을 멈추게
해서 잠을 재우는 것은 커다란 행사였다.
해질녘 고사리 손을 잡고 걸을 때면 비죽이 얼굴을 내민 달을 쳐다보면
서 방금 읽어준 동화를 기억 했는지 “달님 안녕!”하고 종알거렸다. 그 어린
아이의 시간에 맞춰서 우리 어른들의 시간도 흘러갔다.
단답형인 외할아버지는 외손자가 좋아하는 외국 만화영화를 틀어 놓고
설명을 해주었다. 산을 좋아하는 우리부부는 틈만 나면 아기를 데리고 봉
제산에 가서 소나무 숲에 머무르곤 했다.
분당에 사는 할아버지는 손자와 매일 전화 통화를 하며 할아버지 된 기
쁨을 만끽했다. 해외 무역을 하느라 바삐 외국각지를 다니며 젊은 날을 보
낸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무궁무진한 듯 했다 “오늘은 외
할아버지랑 봉제산에 가서 솔방울도 보고 외할머니랑 시장에 가서 게를 봤
어요”라는 손자의 상기된 전화목소리에 할아버지는 솔방울에 대한 것을
한 시간 이상 이야기를 해주기도 하고 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일일이 설
명해 주었다. 외손자가 7살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를 더 가까이 만날 수 있
어 좋다면서 강남 대치동으로 떠났다.
이 자그마한 아이의 출현은 우리의 시선을 그 아이의 시선에 멈추게 하
고 그 아이의 맑은 경탄의 환호성은 우리 어른들의 영혼을 맑게해준다. 아
기를 씻겨서 그 자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예술품은
없는 듯하다. 조그만 선홍색의 입술이며 어떤 동화의 나라로 오가는 꿈을
꾸는 지 새근대는 저 숨소리, 아이는 그 존재 만으로도 어른의 만병통치,
그야말로 시름을 잊게 하는 명약이다. 우리들 삶의 흘러가는 소리를 듣게
해 주는 아이 그 아이의 천진함, 그것이 우리의 교사가 되어주고 삶의 원동
력이 되곤 한다. 영혼의 낙원으로 우리를 회귀하게 하는 보물이다.
창밖을 내다보면 아이가 나와 함께한 잔영들이 수시로 나를 부른다. 


▶ 이 글은 정영애 님의 자서전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며,
전문은 홈페이지(www.libraryonroad.kr)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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