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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화:그때 그런 일이 있었네 - 사람, 그리고 사랑 : 1
2017.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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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화:그때 그런 일이 있었네 - 사람, 그리고 사랑 : 1

Ⅱ. 일화 : 그때 그런 일이 있었네



할머니는 착해

류금옥 | 강서구립우장산숲속도서관_서울

 

 

세상에 태어나 제일 잘한 일
시어머니께서는 66년 전 정씨 가문의 맏며느리로 시집을 오셨다. 시집
온 이후로 시어른을 모시고 사셨고 고모님과 삼촌을 결혼시키는 일까지 주
도하셔야 했다. 그리고 당신 자녀 6남매를 출가시켰으며 지금껏 제사를 모
시고 사셨는데 내년 추석부터 우리가 모시기로 했다. 떠돌이 생활을 하는
맏이가 미덥지 않아 지금까지 떠안고 계시다가 비로소 그 짐을 내려놓게
되었다.
어머니는 진주시 근교 부근에 있는 대농가의 맏딸로 태어나셨다. 공부를
잘해 일신학교의 입시에 지망하려고 하셨다. 막내 외삼촌이 태어나 외할
머니를 도와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입시를 포기했어야 했다. 그 때부
터 집안일과 농사짓는 법을 익히게 되었는데 어머니의 인생 항로가 바뀌
는 순간이었다.
시아버님은 평범한 농가의 맏이로 태어나셨다.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
의 지극한 사랑 때문에 고집이 세고 통제가 어려운 성격의 소유자로 성장
하게 되었다. 아버님은 초등학교를 나오시고 집에서 한학을 익힌 정도였
다. 농사일은 머슴이 하니까 하는 일없이 지내던 중에 6·25가 났다. 수도
가 부산으로 옮겨지면서 서울대학교도 부산에 와서 자리잡게 되었다. 학
생들이 전쟁에 끌려갔거나 자원입대로 또는 피난으로 흩어지고 없으니까
무작위로 학생을 모집했다. 아버님은 어떤 연유로 정보를 듣고 서울대에
다니게 되었는데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께 배우게 되셨다.
학업을 따라갈 수가 없어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서울대에 다
녔다는 소문만 남았다.
어머니가 스무 살이 되던 해의 어느 날이었다. 신대 부락 옆 동례리에 사
는 분이 어머니의 동네에 자주 드나들며 일을 보시는 분이 중매를 섰다. 술
을 좋아하시던 시외할아버지와 중매를 선 사람이 주점에서 불콰해진 상태
로 그 혼인이 결정되었다. 어머니는 시집을 와서야 비로소 서울대에 들어
가게 된 얘기도 들었고 할아버지의 이중생활도 알게 되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불화가 어머니의 시집살이를 힘들게 했고 아버님의 괴팍한 성격
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아셨다. 한편 할아버지께서 친척에게 빚보증을 해
주셨다가 전답이 날아가기도 했다.
어머니가 시집을 오자마자 아버님은 철도 경찰에 취직이 되셨다. 어머니
께서는 시댁에 남고 아버님만 정읍으로 떠나시게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빨치산이 경찰초소를 습격하여 두 명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아버님은 총
상을 입고 진주 도립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
지만 오른 손 엄지손가락을 잃으셨다. 생명의 위협을 받은 사람이 온전할
리가 있었을까. 아버님의 성격은 어머니의 일상생활을 늘 힘들게 하셨다.
아버님은 책임감이 전혀 없었다. 농번기에 강가에 나가 앉아 낚싯줄이나
던져 놓고 시간을 보내셨다. 그런가 하면 수확기에 접어들면 진주 개천예
술제에 남보다 한 발 앞섰다고 했다. 밥이 질면 질다고 반찬이 입에 안 맞
으면 맛없다고 밥상을 마당으로 내던지기 일쑤였다. 옷이 제대로 손질이
안 되었으면 입다가 벗어서 구정물통(쌀을 씻은 물이나 음식찌꺼기를 모
아 두었다가 소죽을 끓일 때 사용하기 위해 모아 두는 통)에 던져 버리기도
하셨다.
어머니는 ‘6남매를 중학교라도 보낼 수 있을까’하는 걱정으로 우울증에
걸리셨다. 무당이 집으로 와서 굿을 했고 그래도 효험이 없어 예수님을 믿
으면 낫는다고 하여 교회도 가보셨다. 그 때마다 아버님은 쓸 데 없는 짓을
한다고 호통만 쳤지 어머니를 도와주지는 않으셨다. 재안이 아버지는 초
등학교 6학년 때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는데 동례리 앞을 지날
때 길가에 거적때기가 덮인 것을 봤다. 사람 시체라고 주변에서 수군거려
자기 어머니가 아닐까하는 생각에 집으로 뛰어 와서 확인한 적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할머니가 “저 에린 기 얼마나 놀랬을꼬!” 하셨다.
7년 동안 우울증에 시달렸는데 어머니는 자생력이 있었는지 차츰 회복
하면서 더욱 강인해지셨다. 자식들이 점점 자라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가
게 되었는데 학비를 대기가 힘들어졌다. 다행히 자식들은 공부를 잘해 남
의 부러움은 샀지만, 동네 집집마다 돈을 꾸러 다니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
이 아니었다. 현금이 들어올 수 있는 일을 하지않기 때문에 가을 벼 수확을
해야 그 돈을 갚을 수 있는 실정이라 돈을 꿔 주는 사람도 한계가 있었다.
궁리 끝에 대대로 내려오는 전답 일부를 팔았다. 그 돈으로 기름을 짜는
기계를 샀다. 농사만 짓던 분이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결정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자식의 학비를 위해 농사로는 감당이 안 되어서 5일장마
다 참기름과 들기름을 짜는 일을 하여 현금을 만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학
교도 보낼 수 있었고 결혼도 시켰다.
92년 봄에 아버님과 어머니가 대전으로 막 이사 온 우리 집에 다니러 오
셨다. 아버님께서 “이제 우리 걱정하지 말고 니들이나 잘 살거라” 하고 가
신 지 채 한 달도 안 되어 급한 전화가 시누이한테서 왔다. 해질녘에 어머
니가 밭에서 리어카를 끌고 오시다가 과속한 오토바이와 맞부딪혔다. 어
머니는 나뒹굴면서 구렁에 떨어지셨다. 뒷날 급하게 병원으로 가니까 어
머니의 두 다리가 천정에 매달려 있었다. 두 허벅지가 골절이 되셨던 것이
다. 어머니의 연세가 예순인데 골절상이 어느 정도 치료가 될지 불구가 되
시지나 않을까 참담한 광경이었다.
그래도 복합골절이 아니어서 뼈 속에 철심만 박고 재활치료를 하셨다.
출가한 자식들은 멀리 있어서 가끔 간병을 해드릴 수밖에 없었다. 직장이
가까운 창원이었고 미혼이던 진숙이 아가씨의 도움이 컸다. 자주 들락거
리며 어머니의 외로움을 덜어드려서 쾌차가 빠르지 않았나 싶었다. 1년 만
에 휠체어를 타고 퇴원을 하셨다. 그리고 음력 12월 17일에 두 개의 목발
을 짚고 동네 사람을 초대해서 어머니의 회갑잔치를 했다. 집 마당에서 잔
치가 열렸는데 노래를 잘 하는 어머니는 마이크를 잡고 ‘청춘아 내 청춘아’
라며 목청을 돋워 부르는 소리가 동네를 울렸다. 그에 덩달아 아버님은 옆
에 서서 “니가 죽었으면 우찌 됐것노!” 하시며 춤을 덩실덩실 추셨다.
아버님은 어머니가 병원에 계시는 동안 500평의 논과 200평의 밭에 배
나무를 심으셨다. 그 묘목이 자라고 어머니가 의지했던 목발도 하나로 줄
다가 나중에는 목발없이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리의 뼈가 붙으면서 길
이 차이가 생겨 절면서 걷게 되었다. 기름틀은 팔고 두 분이 티격태격 하면
서 배 농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재안이 기숙사비도 대주셨고 당신들의 노
후자금도 마련하셨다. 상품이 안 되는 것을 집집마다 보내주셔서 우리들
은 포식을 했다.
아버님과 어머니는 자식들이 자립한 후라 당신들이 노력하여 얻어진 수
익이 다른 데로 새지 않고 자신의 주머니에 쌓여갔다. 그래서 그런지 보람
을 느끼면서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다니러 가면 안 주던 차비도 주시고 명
절에는 먹을거리를 푸짐하게 준비하시곤 했다. 자식 앞에서 뿌듯해 하시
고 자신감이 있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어머니께서 “좀 일찍부터 부지런히
서둘러서 농사일 말고 다른 데로 눈을 돌렸으면 자식들 고생을 덜 시켰을
텐데”하면서 아버님께 악다구니했다. 듣고 있던 아버님이 하시는 말씀이
“옛날처럼 살면 되는 줄 알았다” 하시면서 당신도 늦게 깨달은 것을 후회
하시는 듯 했다.
아버님과 어머니께서는 15년 남짓 배 농사를 지으시다가 논의 것은 포
기를 하고 밭에 있던 나무만 관리 하셨다. 당신들도 힘이 드는 것이 느껴지
고 자식들의 성화도 있고 해서 그 농사를 줄이셨는데 밭에 몇 그루만 재배
하셨다. 그것마저 못하게 했더니 어머니께서 “니들이 시골 내려오면 먹을
기 있어야 안 되것나” 하시면서 정성을 쏟았다.
그렇게 한지가 이삼 년이 지났을 쯤, 봄에 어머니께서 백내장 수술을 해
서 한 쪽 눈에 안대를 하고 계셨다. 막 배꽃이 피어 병충해를 막기 위해 농
약을 뿌려야 할 시점이 되었다. 어머니께서 눈은 아프지, 농약 뿌릴 시기를
놓칠까봐 걱정이지 안달이 나셨다. 같이 거들어서해야 할 일을 혼자하시
겠다고 나서는 아버님께 “혼자 하것소?” 하시자 “하모 혼자 못할 끼 머있
노”하고 어머니께 할 수 있다며 못을 박아 놓고 밭으로 나가셨다.
잠시 후 일을 마치고 돌아오신 아버님은 마루에 걸터앉으면서 “오다 생
각해보니 농약이 아니고 제초제를 뿌린 것 같다” 하시자 “아이구, 영감 죽
을라고 환장했소” 하면서 어머니는 억장이 무너지듯 소리를 질렀다. 초겨
울에 밑거름을 하고 겨우내 가지치기를 해서 초봄에 꽃이 피면 농사를 반
은 지은 것이나 마찬가진데 공수표가 된 꼴이었다. 제초제는 모든 식물을
말살시켜 버리는 약제다.
결혼해서 창원에 살고 있던 진숙이 시누이가 그 무렵에 친정으로 다니러
왔다. 어머니는 아버님의 실수에 속상했던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가 그
딸에게 털어 놓으셨다. “아부지! 아부지가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잘 한 일
이요”라고 아버님께 칭찬 아닌 칭찬을 했다. 배나무가 다 죽어버렸으니 어
머니가 하실 일도 사라졌다. 진숙이는 어머니가 평생을 고생하셨던 것이
마음 아파왔던 모양이었다. 두 분은 “허허” 웃으셨다.
올봄에도 봄나물이 우리 집으로 배달되었다. 어머니는 초봄부터 집주위
에 나는 나물을 캐서 차례로 보내신다. 맨 먼저 돋아나는 머윗잎이 오백 원
짜리 동전 크기만 하면 캐기 시작해서 잎사귀가 쌈 싸먹기 좋을 만큼 자랄
때까지 몇 차례 보내셨다. 그리고 취나물, 두릅, 엄나무순, 가죽나무순, 죽
순을 차례로 보냈다. 간장, 된장, 멸치젓갈, 매실 엑기스를 손수 담그셔서
주시기도 했다.
어머니는 내가 시장에서 봄나물을 만날 때나 양념이 떨어져 아쉬울 때
어머니가 생각나도록 알뜰하게 챙겨주셨다. 나는 며느리로서 해드린 것을
생각해 보면 어머니의 정성에 따라갈 수가 없다. 그저 부모님에게 걱정 끼
칠 일만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래도 부모님은
앉으나 서나 우리 걱정을 하셨을 텐데, 그리하고 보면 아무 것도 해드린 것
이 없다. 다행히 지금껏 살아 계셔서 자식이 효도할 시간을 있게 해주셔서
감사할 뿐이다. 


▶ 이 글은 류금옥 님의 자서전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며,
전문은 홈페이지(www.libraryonroad.kr)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홈페이지 공지 및 보도-홍보에서 원본파일을 다운하실 수 있습니다.(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