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사례집
공지
[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화:그때 그런 일이 있었네 - 일과 나의 삶 : 5
2017.02.22
1,037

본문

[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화:그때 그런 일이 있었네 - 일과 나의 삶 : 5

Ⅱ. 일화 : 그때 그런 일이 있었네



구름 걷힌 파란 하늘 아래에서

오원정 | 전주시립완산도서관_전북

 

 

2004년 둘째 출산과 동시에 제과점을 폐업한 남편은 청소와 소독업의
직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 업은 가장 더운 8월과 가장 추운 1~2월에
는 일이 없어 월급도 없다. 막상 닥쳐보니 참 막막했다. 남편은 이런 저런
궁리 끝에 제과점하면서 모아 두었던 자금을 불리고자 주식에 손을 댔다.
급기야 나보고 집에서 해 보라는 거다. 나는 주식에 관심도 없고, 돈을 모
으는 방식이 나와 맞지 않는다고 거절했다. 어느 때부터인지 퇴근하고 들
어올 때마다 낯빛이 좋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계속 그랬다. 나는 뭔가 이
상해서 물어 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며칠 후, 겨우 입을 열었다. 주식으
로 하루아침에 이천만원을 까먹었다고 했다. 나는 너무도 놀라 입을 다물
수가없었다. 그 순간 그 돈을 모으기 위해 잘 먹지도, 잘 사지도 않고 아끼
면서지냈던 시간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났
다. 그러는 한편 남편이 너무 안쓰럽고 불쌍했다. 이런 생각지도 못한 일에
남편은 그 후로도 몇 달, 아니 몇 년 동안 의기소침 하였다.
어느 날, 시어머님께서 눈치를 채시고는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셨다.
그때서야 자초지종을 말씀 드렸다. 그 해 가을, 햇곡식이라고 쌀을 보내 주
셨다. 어려운 때 받으니 너무나 감사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시어머님께서는 “겨울에는 양식하고, 김치만 있으면 끄떡없다”고 하셨다.
정말 쌀하고, 김치가 있으니 든든했다. 겨울을 거뜬하게 날 수 있을 것 같
았다. 이처럼 시어머님은 힘들고, 어려운 때 “왜 그랬냐?”고 묻지 않으시
고, 같이 아파해 주시고, 걱정해 주시고, 도와주실 수 있는 힘 안에서 도움
을 주셨다. 그리고 항상 겸허한 분이시다.
시아버님께서는 6·25 사변 당시 청력을 잃으셨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세상과는 단절된 삶을 살아 오셨다. 오직 일만 하셨다. 설, 추석 명절 때는
일을 하지 않는 대신 텔레비전을 많이 보셨다. 잘 들을 수 없으므로 보기만
하는 거였다. 그래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모르셔서 때로는 이치에 맞지
않는 말씀을 하실 때도 있다. 그러면 시어머님은 시아버님한테 핀잔을 준
다. 그렇더라도 명절 음식 중 전이나 잡채가 완성되면 시어머님은 제일 먼
저 접시에 담아 시아버님부터 꼭 챙겨 드린다. 그런 섬기는 시어머님의 모
습에 나는 숙연해진다. 때로 나도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을 때는 남편을 챙
기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다가도 마음을 다시 고쳐먹고 시어머님처
럼 남편의 몫을 꼭 챙겨둔다. 내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시어머님이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명절 아침이면 시댁에서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린다. 그 후 시어머님
은 아랫집에 홀로 사시는 어르신을 모셔 와서 함께 식사를 했다. 나에게도
이와 비슷한 풍경이 기억에 있다. 내가 어릴 적 살던 곳에서는 먹을 것이
있으면 옆집과 나눠먹고, 같이 먹었었다. 지금 아파트 문화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정겨운 모습이다. 시어머님은 늘 근면하고 성실한 모습으로, 이웃
과 나누는 따뜻함을 말없이 실천하셨다.
둘째 출산 직전 남편은 경영하던 빵가게 문을 닫았다. 근 4년 동안 거의
쉬는 날이 없을 정도로 빵가게에서 살다시피 했다. 너무 애써서 넉넉잡아
일 년 정도 쉬었으면 했다. 남편은 석 달 정도를 놀더니 지인의 소개로 청
소 업체에 이사 겸 직원으로 취직을 했다. 그러면서 빵가게를 하며 자신을
위해서 돈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 두었던 자금을 불려보고자 지인에게 빌
려주고, 주식에 투자를 하였다. 그러나 빌려줬던 돈은 회수가 원활하지 않
았고, 주식투자는 실패로 끝났다. 그 여파가 가정에 미쳤다.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시간적인 여유가 점차 생겼다. 그러자 어
느 날부터인가 남편은 퇴근 후, 나와 비슷한 연령의 관리사무소 경리들에
대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나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다섯 살도 채
안된 둘째를 위탁기관에 맡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나에게
있어서 관리사무소 경리라는 직업이 생소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것도 종
종 듣다보니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혼 초까지 다니던 예수병원을
퇴직한지가 육 년 정도 될 때였다. 그 동안 나는 집안일과 육아에 매여 집
에 있다 보니 다람쥐가 쳇바퀴를 도는 듯한 삶이라 돌파구를 찾고 싶은 마
음이 조금은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재취업할 때 필요한 것이 무엇인
지 알아보았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취득했던 자격증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다. 만약 취업을 하려면 자격증부터 다시 취득해야했다. 세상이 이렇
게 달라진 줄 몰랐다.
남편 등에 떠밀려 ‘뭔가를 해야 하나’ 생각하니, 눈에 띄는 것이 재취업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전에는 무심코 흘려버렸던 전단지, 플래카드, 공공게
시판 등이 눈에 확확 들어왔다. 유독 ‘○○직업전문훈련학교’라는 광고문
구가 눈에 꽂혔다. 취업을 원하는 사람에게 자격증별로 훈련시켜 취업 할
수 있도록 돕는 기관이다. 또한 구직등록이 되어 있으면 무료로 훈련을 받
을 수도 있었다. 나는 2008년에 둘째가 다섯 살이 되어 어린이집으로 보내
고, 구직등록을 한 후 ‘○○직업전문훈련학교’에 다녔다. 그곳은 학생시절
보다 더욱 철저히 관리 감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훈련생의 훈련비용과
훈련생에게 지급되는 차비정도의 보조금을 고용노동부에 청구해 받아서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훈련생의 연령층은 20대에서 50대로 다양했다. 훈련기간 동안 조금이라
도 절약하기 위해 다들 각자 도시락을 싸와서 먹었다. 그렇다보니 다시 학
창시절로 돌아간 듯 신나기도 했다. 모두들 하나같이 열심히 배웠다. 나는
타자자격증을 땄던 가락이 있어, 워드1급 실기는 문제도 아니었다. 대학 3
학년 때 엑셀을 한 학기 동안 배웠던 것이 컴퓨터활용능력2급 실기 시험을
위한 준비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워드와 컴퓨터활용능력은 이론시험이
문제였다.
공부할 시간이 부족해 버스를 타고 오가는 시간에도 공부를 했다. 다행
히 이론에 합격했다. 실기시험을 위해서 혼자 시간을 재가며 연습을 하였
다. 사진과 사진, 사진과 문자를 합성해 하나의 광고 포스터나 디자인, 합
성사진 등을 만들어 내는 포토샵은 컴퓨터에서 직접 연습하는 시간만이 실
력을 향상 시킬 수 있었다.
나는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둘째를 받아야 해서 수업이 끝남과 동시에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다보니 꼼꼼한 성격이라 손이 느린
데다 연습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훈련기간이 끝나갈 무렵 자격증 시험을
하나 둘 보기 시작했다. 나는 ITQ 워드1급과 컴퓨터활용능력2급 자격증을
거머쥐게 되었다. 오랜만에 무엇인가에 도전해 끝까지 마무리를 하고 결
과물을 얻은 성취감에 뿌듯했다.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연습 시
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던 포토샵은 떨어졌다. 분명 실력이 되지 않아 떨
어진 것이지만 그래도 서운했다. 훈련기간이 끝났으므로 취업을 해야 했
다. 나는 남편의 권유대로 관리사무소 경리 자리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직업학교에서는 언제 취업하느냐 한 달에 한 번 꼴로 전화
를 해오는 거였다. 처음 두세 차례는 상냥하게 받았으나 그 이상은 빚 독촉
전화를 받는 듯 몹시 불편했고 시달렸다. 불편함은 해야 할 것에 대한 원동
력이 되기도 하는가 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취업포털사이트에 희망하는
관리사무소 경리를 구하는 공고가 올라왔다. 집 근처여서 안성맞춤이었
다. 부랴부랴 이력서와 자격증사본 등 필요한 서류를 갖춰 본사에 제출했
다. 관리사무소 소장님과 일차 면접을 했다. 회계학과를 졸업한 것이 플러
스요인이 되었다.
대학 졸업한 것을 어디에 써 먹나 했더니 이렇게 활용될 줄은 몰랐다. 다
행스러웠다. 최종 면접은 사장님하고 했다. 나는 사장님 낙하산이고, 다른
사람은 본사 팀장 낙하산이었다고 한다. 사장님 낙하산인 내가 당연히 출
근하게 되었고, 나는 직업학교에 취업했다고 당당하게 전화를 걸었다.
직장 다니던 이년 여의 기간 동안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었다. 일단, 경
제적인 여유가 생겨났다. 숨통이 크게 트인 것은 아니었지만 알뜰살뜰하
게 생활하면서 청약저축을 꾸준히 부었다. 이것으로 2011년도에 덕진구
에 분양하는 ○○아파트에 당첨되었다. 여러 가지 여건상 입주를 포기했
고, 분양권을 팔아 남편 사업에 필요한 트럭을 구입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남편의 직장생활에 위기가 닥쳐와 남편은 결국 퇴사를 결정하게 된 거였
다. 그렇게 자금을 마련해서 같은 업종으로 개업을 하게 되었다. 비슷한 시
기에 나도 퇴직했다. 둘째가 초등학교 입학이라 옆에 있어야겠다는 이유
에서다. 그래서 우리의 갈등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각자의 계획대로 움
직였다. 남편의 사업은 외근에 따른 근거로 서류들이 필요했다. 남편 때문
에 억지로 시작한 나의 일들-자격증 취득, 경리이력-이 사업을 할 수 있
는데 엄청나게 도움이 되는 것들이었다.
사실, 그렇게 경리로 일하는 동안 나는 첫째와 둘째를 돌봐줄 시간이 없
었다. 둘째의 성장에 중요한 다섯 살부터 일곱 살까지 아이를 돌보는 것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또 첫째의 손을 빌려야했다. 나는 퇴근하면 아이들
보다 집안일에 미친 듯 목을 맸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로가 쌓이고 스트레
스는 증가하여 짜증과 화를 남편과 아이들에게 풀었다. 갈수록 엉망진창
이되어 가는데 남편은 오히려 무신경하게 반응해서 더욱 속상했다. 내가
직장 다니는 동안 바쁘게 생활하니 아이들도 쫓기듯 자라왔다. 


▶ 이 글은 오원정 님의 자서전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며,
전문은 홈페이지(www.libraryonroad.kr)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홈페이지 공지 및 보도-홍보에서 원본파일을 다운하실 수 있습니다.(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