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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화:그때 그런 일이 있었네 - 일과 나의 삶 : 3
2017.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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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화:그때 그런 일이 있었네 - 일과 나의 삶 : 3

Ⅱ. 일화 : 그때 그런 일이 있었네



카푸치노와 녹차라떼

박경화 | 강서구립우장산숲속도서관_서울

 

 

칼바람
학교는 카리스마있고 혁신적인 여교장으로 인해 쑥대밭이 되가고 있었
다. 원어민교사도 쓰고 새로운 컴퓨터를 들여오고 NIE수업도 시도하며 다
양한 것을 추구하는 발전적인 면이 있었다. 하지만 급진적으로 학교를 개
혁하려고 했기 때문에 곳곳에서 무리가 왔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교사
의 수급문제였다. 일단 나이많은 여교사들을 대상으로 “앞으로 과목이 줄
면서 교사가 남으니 좀 있다 그만둬라”는 식으로 개별적으로 불러 말했다.
학생들의 평가가 나쁘다는 이유를 댔다. 그러면 선생님들은 연금 탈 수 있
는 20년만 채우고 나가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면 편의를 봐주는 것처럼 유
예기간을 1년이나 2년쯤 주었다. 이런일이 암묵적으로 몇 건 일어나자 선
생님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누가 불려가서 사표를 썼다는
등 확인되지 않는 소문들이 나돌았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주산과 타자 같은 실기과목 교사들을 치기 시작했
다. 2년제를 나온 실기교사들을 대상으로 실기 과목이 없어지니 그만두라
는 식이었다. 그 선생님들이 4년제 공부를 하겠다고 기회를 달라고 해도
가차가 없었다. 5명 중 3명만 남기겠다는 식이었다. 그 2명도 잠시 후면 쫓
겨나는 그 교사들과 같은 신세가 될지라도 일단은 살아남고 또 어떻게 변
화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교사들은 뭉치지 못했다. 단합해서 따지고 권리
를 주장하고 노조처럼 대항하지 않고 ‘나는 혹시나’하는 생각으로 쫓겨나
는 동료들을 그냥 모르는 척 했다.
모든 교사가 마찬가지였다. 칼바람의 서막이 불었는데 ‘나만은 아닐 수
도 있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강넘어 불보듯이 쫓겨나가는 사람을 마음 아
프지만 외면했다.
주산교사 여자 2명이 맥을 못추고 나갔다. 타자교사 여자 4명과 남자 한
명 중 여자 세 명이 나가게 되었다.
수시로 직원회의가 열렸다. 교장은 시대에 뒤떨어진 과목들은 없애야하
고 자격이 없는 교사들은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누구의 인격이라든가
배려라든가 그런거는 없었다. 타자교사들을 해임시켜버렸다. 쫓겨나가는
여교사들 중에 직원회의에서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중의 한
여교사는 출근을 했다. 직원회의 시간에 여교장은 “우리학교 교사가 아닌
사람은 나가라”고 했다. 그리고 몇몇 교사들을 시켜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 여교사를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교사들의 분위기는 암울하고 답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누구 하
나 억울한 교사들을 두둔하거나 뭉치지 않았다.
어느 날 나도 교장실로 불려갔다. 교장실에 들어가니 여자 상업교사 한
명과 남자 영어교사 한 명이 불려와 있었다. 이사장 딸인 교장은 “학생들
반응이 안 좋습니다”라고 했다. 각 학급에서 학생들을 몇 명씩 뽑아서 교
사평가 설문조사를 했다는 거다. 지금이야 교사평가제가 있지만 그때는 거
의 없었는데 앞서가는 거였다. 그런데 격려차원이 아니라 교사를 내보내
는 수단이었다. 나는 “아. 이런 거구나”하며 그동안 짐작하던 교장실 안에
서의 분위기를 실감했다. 주눅이 확 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장은 옆에 있는 남자 영어교사에게는 “선생님처럼 하다가는 회
사같으면 벌써 잘렸어요!”라며 심하게 몰아붙였다. 그 교사는 한 가정의
가장일텐데 끽소리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한 사람들
은 발버둥쳤고 생존경쟁이 심했다.


강제사표
주산과 타자같은 실기교사에서 끝나는게 아니었다. 단지 그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여교장은 인문계교등학교를 세워서 한 운동장에 두 학교가 있
게 되었다.
여교장은 이사장 할머니가 총애하는 여자교감을 쳤다. 하루 아침에 책상
을 뺀 것이다. 그 여자교감은 출근 투쟁을 했다. 책상이 없어졌는데 교무실
에 출근해서 다른 사람의 의자에 함께 앉아있었다. 누군가 등받이도 없는
동그란 의자를 갖다 주었다. 교감선생님이라고 대우를 받다가 하루아침에
책상도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혼자이기에 투쟁을 하거나 재판을 하기 힘
들었다. 그렇게 조금 몸부림 치다가 며칠 후 그냥 원한을 품은 채 사라졌다.
학교는 예전에 학급이 많을 때 20학급이 15학급으로, 12학급이 10학급
으로, 다시 6학급이 되가고 있었다. 앞으로 학생수가 줄 것에 대비해서 학
급을 줄여야 한다는 거였지만 그보다는 인문계 학교를 만들며 상업학교 교
사를 줄이는 것이고 상업과목 교사들이 점점 감축의 대상이 되가고 있었
다. 120명이던 교사들도 차츰 줄어가고 있었다. 인문계과목 교사들은 공
립으로 보내기도 했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부딪힘이 일어났다. 인문계 고
등학교 학생들은 대우를 하고 상업학교 학생들은 무시를 하는 분위기가 된
것이다. 인문계 고등학교 학생들은 미술시간에 이젤을 사용하지만 상업학
교 학생들은 못썼다. 상업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지원된 좋은 컴퓨터로 꾸
며진 컴퓨터실을 인문계 학생들이 사용했다.
그리고 교장은 양쪽 학교의 교장을 하면서 인문계 학생들은 대우를 하고
상업계 학생들에게는 ‘새대가리, 신세계 뒷골목 여자’라는 말을 쓰면서 폭
력을 쓰기도 했다. 학생들 사이에도 불만이 일어나며 학교 분위기가 뒤숭
해졌다.
1997년 2월 11일 대청소시간이었다. 교실에서 학생들과 대청소를하
고 있는데 누가 교장이 부른다고 했다. 그때 교장은 교장실도 없애고 선
생님들과 함께 한다며 교무실 한편에 칸막이를 하고 교장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교장에게 가니 여자 상업교사 두 명과 남자 상업교사 한 명이 있었다. 교
장은 A4용지를 한장씩 주더니 “앞으로 1년 후에 그만두겠다는 사표를 쓰
라”고 했다. 상과선생이 과원이니 “사표를 쓰지 않으면 이번에 과목을 배
정 안 하겠다”는 거였다. 교장은 여기 부른 사람들은 학생들 평가가 낮다
며 기선을 제압했다.
선배 여자 상업 교사인 김 선생님은 “평가에 대한 이해도 안 되고 못 쓰
겠다”고 나가버렸다.
교장은 남은 사람들에게 볼펜을 쥐어주면서 빨리 쓰라고 했다. 나가버린
김선생님을 따라서 못 나가고 한참을 시달렸다. 교장은 안 쓰면 과목을 안
주고 해임을 시키겠다고 했다. 남은 사람들은 나중에 쓰겠다며 나왔다.
이제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사표를 쓰고 1년을 다닐
게 아니라 당장 그만두고 싶었다. 이렇게 교직이 끝이 나는 건가 싶었다.
“정우가 어리니 그만두고 살림을 해도 될까?”하며 일말의 믿는 구석도 있
었다.
남편과 엄마에게 전화걸었다. 남편 입에서 “당장 그만둬”라는 말을 기대
했는지도 모른다. 남편은 “그냥 써주고 1년 더 하라”고 했다.
믿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나혼자의 생각이었다. 친정엄마도 “그
냥 그만 두는 것 보다 1년이라도 더 하는게 낫지”라고 했다. 스스로 특별하
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었다.
‘동냥그릇’이라는 명상을 다룬 책에 나오는 내용이 생각났다. 양들의 무
리가 있는데 매일 주인이 한마리씩 양을 데려가 죽이는데 남은 양들은 “나
는 사자니까”하는 최면에 걸려 “나만은 아니겠지” 하다가 어느 순간 차례
가 되어 나간다는 거다.
학교 현실이 그랬다 “나만은…”하며 남의 일보듯하다 내 차례가된 것이
었다. 목사님 설교 중에 “닭장 속의 닭들이 상처가 있는 닭을 보면 모든 닭
들이 달려들어 상처를 쪼고 결국 죽인다”는 말이 있었다. 인간사도 마찬가
지라는 거다. 약점을 감싸주기보다는 약점을 짓밟고 못살게 군다. 학교의
현실도 그랬다. 나이 많은 여자나 약한 남자들을 우선적으로 쫓아내는 대
상으로 삼았다.
함께 사표강요 당한 남자 선생님은 결혼 한지 얼마 안된 상태였다. 교장
은 그 선생님에게 “선생님은 몸도 약하고 애들 반응도 좋지 않으니 적성이
안 맞는 것 같다”며 사표를 강요했다. 시달림을 받는 과정에서 그 분은 얼
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됐고 정신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나는 ‘안 쓰면 된다’는 제3의 방법은 생각을 못했다. 그저 교장이 제시한
‘사표를 쓰고 1년을 다닐 건가, 해임될 건가?’ 두 가지 밖에 없다고 생각하
며 좁은 세계에서 살았다.
1년 후 그만둔다는 사표를 쓰지 않으면 과목을 안주고 해임시킨다는 협
박에 과목이 없이 혼자 해임당한다면 창피하고 대처를 할 수도 없을 것 같
았다.
김 선생님을 빼고 다 1년후 그만두겠다는 사표를 썼다. 학교에서는 김선
생님을 과목을 안 주겠다고 했다. 분열작전이었다. 상업교사중에 사표를
종용받지 않은 젊은 남자교사가 더럽다고 하며 그만두었다. 그래서 김선
생님은 가르칠 과목이 생겼다.
새로 시작한 학년은 괴롭기 한이 없었다. ‘1년 더 하자고 내 자존심을 버
렸다’는 생각에 수업하기도 싫었다. 스스로가 비겁하게 여겨져 피해의식
에 사로잡혔다. 차라리 ‘그만 둬 버릴 걸’하는 후회도 들었지만 그만두면
도와주는 길이니 진퇴양난이었다.
1997년 4월 한보에 부정대출해준 제일은행 상무가 청문회 진술후 자살
을 했다. 유서에 ‘살아도 죽은 목숨’이라는 이라는 문구를 남겼다. 나도 ‘학
교를 다녀도 다니는 것 같지 않은’생각이 들며 그 문구가 이해가 갔다.
‘그만두면 가정경제는 어떻게 되나?’스트레스가 쌓여갔다. 집의 아이들
세 명은 커가고 끊임없이 요구를 하고 있다. 둘이 벌어도 모자랄 지경에 모
든 것이 답답했다. 좁은 집에서 친정엄마의 간섭을 받는 것도 숨막혔다.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거기 묶여 살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훌훌 벗어
던지고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동백꽃, 지리산 산수유, 섬진강 매화를보고
싶었다. 여러군데 다니며 보고 느끼고 싶었다. ‘2000년이 되기전에 영국으
로 부터 반환된다는 홍콩’도 가보고 싶었다.
여행이 궁극의 목적이라기보다 도피적 요소가 큰 것이었는지도 모르겠
다. 아무도 괴롭히지 않는 자연 속에서 혼자서 마냥 조용하게 있으면 편할
것 같았다.
내 성격도 분석해보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 공감가는 글도 쓰
고 싶었다. 모든 것이 허망하고 팝송가사처럼 ‘dust in the wind’라는 생
각이 들었다. 불교 교리 공부도 해보고 싶었다. 책을 읽을 때 ‘언제 다 읽
나?’하며 때로 지루하기도 하고 빨리 읽고싶기도 하다. 대단한 내용이 있
을까 기대하다 책장이 하나 하나 넘겨지며 끝 장을 덮을땐 아쉽다. 인생도
그런건가? 무슨 일이 있을 듯 기대로 가득하고 아쉬워하고 힘겨워 하다가
어느 순간 끝을 맞으면 ‘아무것도 아니다’싶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지막’이라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교장은 직원회의에서 ‘앞으로는 학생수도 줄고 학교가 살아남기 위해서’
라고 계속 주장을 했다. 그리고 “여 선생님들은 애들 과외비 벌려고 학교
나오는 거냐?”라며 여교사들을 타겟으로 삼아 ‘애들 반응이 어떠니’를 무
기 삼아 선생들을 계속 쳤다.
1997년 5월 30일 토요일에 젊은 여교장이 조회시간에 “Y여상이 3년 안
에 없어진다”고 하며 학생들에게 “이사 갈래? 안 갈래?”라고 했다. 새로 설
립한 인문계고등학교가 이사를 갈 예정이었던 것이다.
학생들은 교장에게 ‘걸레 같은 년’이라는 말을 듣는 둥 온갖 수모를 겪으
며 불만이 쌓여있는 상태였다. 인문계고와의 차별대우, 학교가 운영하는
연수원에서 해마다 낸 돈에 비해 질 낮은 대우를 받은 것, 교사들이 사표강
요 받았다는 것도 불만인데 학교까지 없어진다니 폭발직전이었다.
분위기가 뒤숭숭하니 교장은 반장들을 불러놓고 설문조사를 한 후 “Y여
상 없어지지 않는다. 이사가지 않는다”를 선포를 했다. 그리고 학년별로 학
생들을 강당에 모아 놓고 설득을 하려했다.
우선 3학년을 강당으로 불렀다. 교사들도 다 강당으로 갔다 학생들이 교
장에게 여러 질문을 해댔다. 궁지에 몰린 교장이 발뺌하고 내려가려고 하
자 학생들은 교장에게 달려들어 몸으로 막으며 저지했다. 전학년이 다 모
여들어 교장에게 따지고 답변에 단체로 불만을 표시했다.
방송국과 신문사에서 기자들이 왔다. 오전에 시작한 그 모임은 오후까지
계속되었다. 교장은 “학교 안 없앤다. 이전 안한다. 선생들이 너희를 이용
해서 남으려고 선동한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러면 너희 취업에 지
장있다. 매스컴 타면 불리하다”라고 했다.
그날 KBS뉴스에 “영등포여상 학생들이 학급감축에 따른 불만으로 시위
가 있었다. 이에 따라 교장 이모씨는 상업학교 감축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해명했다”라고 방송이 나왔다. 그렇게 학생들 소요가 시작되
었다. 학생들은 그 후에 몇 차례 시위를 했고 ‘학교에 대한 비리와 학교를
없애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시위를 했다. 언론기관에서 취재를 왔다. 시위
를 하는 중에 교장의 남편이 학생을 때렸다. 흥분한 학생들은 교장실로 몰
려갔고 밀고 밀리는 중에 유리창이 깨질정도였다.
1997년 7월 5일자 일간신문에 ‘영상미디어학교가 설립될 예정이다’라는
기사가 났다. 사표를 강요당한 교사중 여자 선생님이 직원회의시간에 그
기사를 교사들에게 돌렸다. 여교장은 교무실에 들어와 “저의가 뭐냐?”며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났다. 여교장은 어머니인 할머니까지 합세를 시켜
난리를 치는 가운데 당하던 교사는 옷 단추까지 풀어졌다. 그 여교사가 뿌
리치며 나오자 교장은 “왜 도망가냐?”며 소리치고 “애들 선동시키지 말라”
고 했고 해임을 시켜버렸다.
교장은 나를 포함해서 사표 강요당한 여자 상업교사 네 명을 ‘학생 시위
선동’으로 형사고발했다. 학교에서 서류를 작성했을 때 다른 교사들의 사
인을 받았다. 다들 처자식 먹여살리기 위해 동료교사들을 불리하게 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서야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때 교장의 하수인으로 앞
장섰던 남교사들이 나중에 암에 걸려 일찍 세상을 뜨기도 했는데 마음고
생이 심했던 것이다. 나를 포함한 네명의 여자 상업교사들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고 그 후에 해임되었다.
1997년 IMF로 사회가 뒤숭숭하고 제일은행도 인원감축으로 그만둔 은
행원들이 떠나며 이야기를 남기는 장면을 찍은 ‘눈물의 비디오’도 나오던
때였다. 학교가 기업은 아니었지만 그 학교는 기업못지 않게 냉혹했다. 그
때 불명예상태로 학교를 쫓겨나니 죽음을 예비로 경험한 듯했다.

해직
1997년 가을부터 나는 학교를 못나가게 됐고 17년간의 교직 생활이 끝
났다. 20년이 넘어야 연금을 받을 수 있는데 해당이 안 됐고 퇴직금은 받
았다.
시위주동으로 해임된 것이니 억울하고 불명예였지만 정우가 2살이니 아
기를 키울 수 있는 점에서는 좋았다. 정연이는 초등학교 1학년, 주연이는
5학년이었다. 아이들이 한참 자랄때여서 엄마가 집에서 살림하며 돌보는
것도 괜찮았다. 내가 자의로 그만둔 것이 아니라 쫓겨났다는 것이 우울하
게 여겨졌고 남편 혼자 직장생활을 하니까 경제적으로 긴축해야 한다는 것
도 긴장이 되었다.
10년간 도와주던 파출부 아줌마도 안 오게 되었다. 나는 집에서 살림을
하며 아이들을 키우게 되어 주부로서의 위치를 찾게 되었다.
주연이와 정연이가 학교가면 나는 정우를 데리고 놀이터로 가서 함께 시
간을 보냈다. 주연이 학원을 마중가기도 했고 가정생활은 안정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학교에서 쫓겨났다는 생각이 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답답하고 무력하게 당했다는 느낌으로 화가 치솟았다.
그만둔 선생님들끼리 모이게 되었다. 사표강요에 굴하지 않았던 김 선생
님을 중심으로 우리들이 당한 것을 교육청에 제소하게 되었다.
다섯명의 여교사들은 학교측으로부터 부당 해임을 당했다고 교육청에
민원을 넣었다. 진행이 더디어 우리는 교육청을 찾아갔다. 교육청 회의실
로 들어가려는데 1층에서 저지를 당했다. 다른 곳으로 들어가려니 우리가
걸어가는 사이에 셔터가 내려졌다. 이제 교사신분도 아니고 쫓겨난 교사
로서 교육청에서 거부당하는 한심한 신세였다.
우리는 시의원의 도움으로 회의장 앞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사연
을 들은 교육위원의 도움으로 회의장에 두명이 대표로 들어가서 입장을 밝
히게 되었다. 급작스러운 상황에서 김선생님은 수많은 교육위원들 앞에서
그동안의 해임된 경위와 억울한 사건을 정확하고 면밀하게 밝혔다. 교장
도 그 자리에서 자기 입장을 주장했다.
교육청에서는 몇 달 후에 “학교는 해임교사들을 복직시키라”고 했으나
사립학교는 이행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복직이 안 되었다. 다시 김선
생님을 중심으로 해서 민사재판을 하게 되었다. 다함께 힘을 합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 여겨졌다. 우리는 전교조의 도움을 받게 되어 인권 변호
사님을 소개 받게 되었다. 예전에 교사출신이었던 그 분은 억울한 처지의
선생님들을 정의롭게 변호해왔었다. 우리도 도움을 청했다. 많은 증거자
료들이 필요했다. 김선생님이 자료 준비에 애를 많이 쓰셨다. 그만둔 선생
님들도 경위서를 써주고 협조를 해주었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학교측은 우리 다섯 명의 교사들이 “학생들을 선동
해 시위를 주동했으므로 해임시켰다”고 했다. 증인으로 함께 근무했던 교
사 두 명이 나왔다. 남자교사는 애매하게 대답했지만 여자교사는 우리가
“학생들 앞에서 선동을 했고 울면서 자극을 했다”고 했다.
직장을 유지하려고 그 자리에 선 것이었지만 한때 동료였던 선생들을 자
기가 살기 위해 무자비하게 밟고 있었다. 이 교장도 재판에 나왔다. 재판정
문 앞에서 교장과 우리가 마주쳤을 때 교장의 얼굴이 벌개졌었다. 이 교장
이 법정에서 우리가 학생들을 선동했다고 주장 할때는 피가 거꾸로 솟으
며 억울했다. 사표를 쓰라며 힘을 휘둘렀고 쫓아냈고 법정에서 누르고 있
었다. 두 번 죽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억울하게 진다면 ‘세상에 정의가 있
나?’ 의심스럽고 갑질에 눌리는 상황이어서 억울해서 못 살 것 같았다.
몇번의 재판이 진행되며 시간이 흘렀다. 몇 달 간격으로 재판이 진행되
었다. 그 사이에 다섯 선생님들과 만나며 힘도 합쳤는데 결과가 불투명해
서 지쳐가기도 했다. 다섯 명 모두의 문제였지만 김선생님이 고군분투하
셨고 나머지 교사들은 따라가는 형국이었다.
친정엄마는 내가 학교를 다닐때와 마찬가지로 언니집과 우리집을 정확
하게 오가고 계셨다. 어머니는 정우가 어리니 언니네보다 우리집이 더 도
움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마음으로 오시는 것 같았다. 그때 어머니 나이 77
세였고 정우를 극진하게 봐주셨다. 목동아파트 7단지 산책로에서 유모차
를 많이 밀고 다니시며 도와주셔서 고마웠다.
하지만 어둡고 좁은 집이 답답해서 어머니에게 어렵게 말을 꺼낸적이있
다. “내가 집에 있으니까 예전처럼 오래계시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엄마
는 “내가 알아서 할께”라며 일주일에 5일을 계시는 것을 줄이지를 않았다.
“너랑 같이 있으면 더 좋지”라고하셨다.
1997년 해임되고 2년여가 흘러가고 있었다. 남편 혼자 벌게 되어 긴축
을 해야했다. 남편도 스트레스를 받는지 가끔 욱하고 소리를 지를 때가 있
었다. 남편도 혼자 가정경제를 부담하는게 힘겨웠던 것 같다. 재판결과가
어떻게 될지 미지수였지만 이겨서 다시 복직을 하면 좋겠다는게 간절해졌
다. 살림을 하며 애들과 지내는 것도 좋았지만 다시 직장생활을 하고 싶었
다. 어느날 슈퍼에 갔을때 어떤 엄마가 유모차를 밀고 있었는데 수학선생
이라는 말을 들었다. 부러웠다. 나도 다시 교직에 서면 좋겠다는 간절함이
들었다. 


▶ 이 글은 박경화 님의 자서전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며,
전문은 홈페이지(www.libraryonroad.kr)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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