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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대기:인생-사계 - 겨울 : 4
2017.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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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대기:인생-사계 - 겨울 : 4

Ⅰ. 일대기 : 인생-사계(四季)



 은혜위에 은혜로다

이경자 | 구로주민전용도서관_서울

 

 

퇴직 후 이야기


미국으로
2000년에 퇴직하고도 계속 공부만 했다. 원어 성경연구원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다른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번만 나오는데 월·화·
목·금 4일 동안 나가서 공부했다. 함께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신학석사공
부를 하고 개혁학술원에서 공부하여 전문인 선교사로 가기 위하여 2003년
11월 12일 수요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23년 다니던 화성교회에서 여자가
목사 안수 받았다고 쫓아냈다. 무식한 목사들에게 한 마디도 대항 않고 우
리 장로님과 함께 조용히 나왔다. 원어성경공부하는 교회는 아빠가 싫어
해서 나만 그 교회를 나가고, 아빠는 내가 목사 안수 받은 것이 더 자유롭
지 못하게 되었다고 나를 불쌍해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세
우자고 해도 그건 더욱 싫다고 한다. 옛날 안동 의성 양반들을 겨냥해서 들
어온 선교사들의 선교를 받아서 교회를 창립하신 시할아버지 때보다 훨씬
조건이 났다고 해도 교회를 세우는 것은 못하게 했다. 나 죽고 난 뒤에 하
라고 했다. 나는 겁이나서 그러면 우리 이혼합시다. 했더니 이혼 소리를 그
렇게 쉽게 하느냐? 고 혼이 났다. 나는 자기가 죽거든 하라고 해서 그랬다
고 했다. 미드웨스트신학대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치는 박영재 목사님 효
성교회로 갔다. 오후에 성경을 가르치고 한번도 단 위에는 세워주지 않았
다. 침례교회라 여기도 여성 안수는 안 되고 장로도 선출하지 않는 교회인
데 우리아빠가 가서 호칭장로를 7명 세웠다.
미국 가기 전에 나의 퇴직금으로 미국있는 아들에게 일본 혼다 회사의
오딧세이 밴을 사주었다. 우리가 둘, 아들네 가족이 네명 도합 여섯 명이니
작은 차에 다 못타니까. 7인승 밴을 샀다. 2005년 3월에 아빠와 나는 미국
에 아들네 집으로 갔다. 아들은 수의학 박사과정, 며느리도 수의학 인턴공
부 중이니까 둘째 손자 지수를 봐 주러 갔다. 2003년 12월 24일에 난 지수
를 지수 외할머니가 봐 주시다가 6개월이 되어서 한국에 오시고 우리가 교
대하러 갔다. 집은 좁고, 현수는 지수와 싸우고 지수는 칭얼대고 울었다.
아빠는 그 아이들을 너무나 잘 봐주신다. 서울에서도 큰 애 현수는 외가 가
까이 있는 봄빛산부인과에서 낳아서 우리 집에 한 번씩 오면 울어서 어찌
할 바를 몰라서 빨리 애기 데리고 가라고만 하였다.


예쁜 딸의 딸
2001년도에 외손녀 유진이가 날 때는 은영의 친구 산부인과에서 잘 치
료 받고 새벽에 6시에 병원에 간다하더니 7시에 아기 낳았다고 연락이 왔
다. 예쁜 딸은 딸도 수월하게 낳아서 효도하는 것 같아 더 예쁘다.
아빠 닮아 예쁜 짓만 한다. 아빠와 내가 매일 출근해서 아이를 길렀다.
말이 그렇지 나는 공부하러 다니고 아빠 혼자 다 길렀다. 그래서 아빠 (할
아버지)가 0순위, 저의 엄마가 1순위 저의 아빠가 2순위 이모가 3순위, 저
의 고모가 4순위였다. 나는 항상 꼴지. 그래도 울지 않으니까 너무 예쁘다.
경주 큰 집에 데리고 가도 울거나 보채지를 않으니까 오히려 우리에게 기
쁨이 되었다. 그러나 요즘은 너무 말을 안 하니까 서운하고 답답하다. 이런
유진이를 보다가 칭얼거리는 지수를 보기가 너무 힘들었다. 아이가 자꾸
우니 모두들 피곤하고 짜증이 났다. 종민 내외도, 저희끼리 곧잘 다툰다.
종민이가 “입 다물어 하니까, 니나 입 다물어” 한다. 어느날은 아빠가 몸이
편찮아서 병원에 갈 때도 있었다. 내가 아빠의 머리를 깎아 준다는 것이 아
주 행기 띠비로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겁나서 숨어 있었다. 종민이가 아빠
모시고 한국 미장원에 가서 예쁘게 깎아왔다. 다시는 가족들 이발 할 일 없
으리라. 종민이가 뭐라고 나한테 짜증내고 불손하게 말하니까 아빠가 아
들을 앉혀놓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무리 아들이지만 그렇게 대하
는 것 나는 못 본다”고 처음으로 아들을 나무래는 아빠를 보고 나는 행복
을 느꼈다. 그러나 이제는 옆에 없고 내 안에만 계시니 싸울 사람도 없어
너무나 외롭고 가슴이 쓰라린다.


보이스피싱
2014년 6월 17일 아침에 집 전화 벨이 울렸다. 받아보니 “전화비가 42만
원 밀렸어요” “그럴 리가 없어요” “나는 매월 국민은행에 자동이체로 넣는
데 말도 안된다” “그러면 0번으로 확인해 보세요”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
는 0번에 전화를 해서 물어보았다. “그러면 경찰에 신고해서 바로잡아 야
되니까, 경찰, 형사를 바꾸어 줄테니 자세히 말하세요” “저는 형사계 누구
입니다” “금융 감독원을 바꾸어 드리겠습니다” “ 저는 금융감독원 아무게
입니다” “통장번호를 말하시오”해서 말했더니 “이 통장에 있는 돈을 안전
하게 잘 보관하도록 이동 조치해야 하니까 우리은행 통장, 도장, 신분증을
가지고 핸드폰을, 끄지 마시고 우리은행에 가서 이 돈을 1,500만원 대출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세요” 해서, 핸드폰을 끄지 않고 그대로 가서 물었
더니 대출이 안 된다고 했다. 그 은행원 앞에서 “대출은 안 된다고 합니다”
했더니, 주택청약부금 통장을 보더니 이 통장으로는 2,800만원까지 된다
라고 했다. 그러면 빨리 밖으로 나와서 다른 우리은행에 가서 2,800만원을
대출받으라고 한다. 나는 속으로 ‘대출도 안된다니 안전하지 않느냐?’고
말하고 싶었으나, 나는 더 많은 액수를 안전하게 하고 싶어서 택시타고 구
로경찰서 앞에 있는 우리은행에 갔다. 가서 대출 신청을 했더니 아무의심
없이 2,800만원을 대출해 주었다. 그 사람이 주는 계좌번호대로 송금하라
고 했다. 우체국에 1,800만원, 국민은행에 1,000만원을 보냈다. 또 택시를
타고 국민은행에 가서 다른 우체국 통장으로 보내라고 해서 그대로 하였
다. 나는 무엇에 홀린 듯 이성을 잃고 순식간에 그 아까운 내 돈을 다 날린
것이었다.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불안했다. 그런데도 다른 수협통장에 있
는 돈을 말할까 말까를 생각했다. 다시 전화가 왔다.
“다른 통장에서 1,500만원을 대출 받아야 되니 집에 가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오후에 만나서 그 돈을 도로 주겠다고 했다. 말 할 수 없는 허전함
이 몰려왔다. 허전하기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나서 “내
돈”하면서 나는 우체국으로 뛰어갔다. 우체국에 가서 이야기를 하니까 여
직원이 조회해 본 결과 돈이 다 빠져 나갔다고 한다. 우체국장이 ‘보이스피
싱이다’ 라고 말했다. 그 때 그 놈 한테서 전화가 왔다. 지금 집에 있느냐고
물었다. 우체국장은 바로 옆에 있는 파출소에 가서 경찰 두명을 데리고 왔
다. 경찰은 A4 용지에 ‘계속 전화’를 하라고 썼다. 나는 계속 말을 이어갔

다. 경찰들은 녹음도 하지않고 속수무책으로 서 있다. 그러다가 끊으라고
하더니 나를 경찰차에 태우고 구로경찰서 지능 수사계에 데려다 놓았다.
아침도 먹지 않고 택시타고 돈 2,800만원 금쪽같은 돈을 날리고 나니 세
상 살 맛이 나지 않고 창피해서 죽고 싶다. 똑똑한게 문제다. 똑똑하기로
말하면 대한민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내가 무엇에 홀린 듯 어처구
니 없는 짓을 당했으니 아이들 보기도 민망하고, 앞으로 몇 십년을 더 살지
모르는데 이런 어리석은 일을 안 저지른다는 보장이 없지 않나? 하는 생각
에 살 소망이 없다, 아니 살 가치가 없다, 라고 생각했다. 대성통곡을 하는
나에게 형사들은 위로한답시고 “할머니 보다 더 똑똑한 판사들도 당하고,
의사들도 당하니까 너무 자책을 마세요” 한다. “그런 사람들이 당했다고
해서 나도 당해도 괜찮다는 거야? 뭐야?” 라고 소리 치고 싶었다. 우리 딸
에게 알려야 한다고 했다. 혹시라도 더 어리석은 짓을 할까 봐. 나는 딸의
번호를 가르쳐주지 않고, “내가 저지른 잘못은 내가 책임지니까 자식들한
테 알려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우리 아빠가 있었으면 이런
짓은 안 당할 텐데… 아들이 수 만리 떨어진 미국에서 와서 강의하고 받은
돈을 세어보지도 않고 봉투째 주면, 딸이 용돈으로 쓰라고 준 돈을, 맛있는
것 한번 안 사 먹고, 다리 아프고 피곤해도 택시 한 번 안 타고, 아껴서 돈
이 모이는 재미로 외로운 인생을 참고 견디며 살았다.


▶ 이 글은 이경자 님의 자서전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며,
전문은 홈페이지(www.libraryonroad.kr)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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