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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문화관도서관.. 조선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2강- 즉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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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희숙
댓글 0건 조회 1,057회 작성일 16-07-11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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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문화관도서관.. 조선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2강- 즉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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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3월 10일 25세의 나이에 경희궁 숭정문에서 왕위에 오른 정조가 신하들에게 내린 윤음의 첫마디.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

조선 왕조 임금들 중 사극영화와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다뤄지고 있는 조선 후기 개혁 군주 정조..

어린시절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수많은 정적들 틈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마침내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된

정조의 즉위 장면은 늘 가슴 뭉클하고 왠지 모를 통쾌함을 느끼게 한다.

 

조선시대 왕들에 대한 기록은 우리 역사의 기록이며 이 땅에 살았었던 우리 조상들의 삶을 부분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기에

무척 흥미롭고 그 자세한 내용이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조선 왕실에 대한 학문적 연구로 역사책에 갇혀 있는 왕들의 삶을 일반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있는 김문식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다.

강의 내용을 배포된 자료를 바탕으로 이해한 대로 영화와 사극 드라마의 자료사진을 보태어 얼추 정리를 해보려 한다.​

 

 

2강- 조선 국왕의 탄생, 즉위식 

1강 조선 왕실 의궤에 이어서 2강에서는 조선시대 스물 일곱 분의 임금들이 탄생하는 순간, 조선 국왕의 즉위식에 대해 알아보았다.


즉위식은 임금 자리에 오르는 것을 백성과 조상에게 알리기 위하여 치르는 의식이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시대를 매길 때, 이를 테면 정조가 국왕에 오른 ​1776년을 '즉위년'이라 하고, 정식으로 통치에 들어간 이듬해인

1777년부터 '정조 1년' 이런 식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생각 같아서는, 조선시대 즉위식은 임금에 오르는 의식이니 만큼 무척 화려하고 떠들썩한 가무가 곁들여져 즐거운 축제일 것 같은데

실제의 즉위식은 무척 차분하고 엄숙하고 숙연하게 이뤄졌으며 그 종류도 다양하게 구분되었다.

 

1. 즉위식 종류와 특징.. (참고) <즉위식, 국왕의 탄생/돌베개,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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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왕의 즉위식 형태는 선위(禪位), 사위(嗣位), 반정(反正), 등극(登極)으로 나뉜다.

 

선위(禪位).. 선왕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다음 국왕에게 왕위를 직접 물려주는 경우(정종, 태종, 세종, 세조, 예종, 순종)

 

정종이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은 두차례의 왕자의 난을 겪으며 2년 후 정권을 장악한 아우인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이고.

세조는 조카인 단종으로부터 억압을 가해 선위를 받은 것이며, 고종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순종에게 선위한 것도 비정상적이었다.

정상적인 선위는 태종이 세종에게, 세조가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경우인데 세조는 예종에게 선위하고 다음날 바로 승하하였기에

조선시대를 통틀어 진정한 정상적인 선위의 경우는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경우뿐이다.

 

(1)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과정..

드라마 <대왕 세종>을 통해 즉위절차를 재구성해본다.

 

1418년(태종18) 8월 8일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선언하고 국왕이 사용하는 대보(국새)와 홍양산을 왕세자에게 주고  

태종부부는 자신이 세자시절 지냈던 세자전으로 나가버렸다.

당황한 세종과 신하들이 반대를 하였지만 태종의 결심을 꺾을 수 없었다. 

8월 10일 태종이 국왕의 가마와 의장(儀仗), 시위군(侍衛軍)을 보내 왕세자를 맞아 오게 했으나

왕세자가 오장(烏杖)과 청양산을 쓰고 오자 만나주지 않으매, 할수 없이 왕세자가 붉은 주장(朱杖)과 홍양산을 앞세우고 오자

태종이 왕세자를 맞이하여 익선관을 직접 씌워주고 왕위를 물려준다는 전위교서를 반포한다.

(전위교서는 질병이 심해져 정사를 감당할 수 없어 왕위를 물려주지만, 군대와 국가의 중요한 사무는 태종이 계속 맡겠다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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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살이 된 충녕대군은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2개월 만에 왕이 되었다. 

1418년 8월 10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세자는 강사포와 원유관을 갖춰 입고 조복을 입은 신하들이 품계에 맞춰 도열한 가운데 

즉위식이 거행되었고 세종이 4대 왕 위에 올랐다

상왕 정종은 태상왕, 태종은 상왕, 모후는 대비가 되고 부인 경빈 심씨는 소헌왕후에 봉해졌다.

태종실록은 세종이 즉위한 다음날까지 기록되어 있고 <세종실록>은 8월 11일 왕위를 계승하는 즉위 교서를 반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태조와 태종이 이루어 놓은 법도를 따라 정치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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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근정전에서 진행된 세종의 즉위식 장면..

 


https://youtu.be/iJvKcRjmDMA


(2)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과정..

고종이 순종에게 고종이 선위한다는 명확한 의사 없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순종이 대한제국 황제에 올랐다.

1907년 7월 18일(양력) 고종은 일제의 강압으로 순종에게 군대와 국가의 중요한 사무를 대리하라는 대리청정을 명하고

7월 19일 환구단, 종묘, 사직 등에서 황태자의 대리청정을 알리는 고유제를 지낸다.

고종의 대리청정 조서 반포후 경운궁 중화전에서 황태자의 대리청정을 축하하는 진하의식이 거행되는데 고종황제는 참여하지 않았다.

 

12장복을 착용한 순종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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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주도해서 작성한 <순종실록>에는 양력 7월 19일 대리청정을 했고 그대로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았다고 모호하게 기록했다.

7월 22일 순종은 대신들의 건의에 따라 공문서에서 '대리' 대신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8월 2일 연호를 '광무'에서 '융희'로 바꿨다.

 

1907년 8월 4일자 이탈리아 잡지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La Tribuna Ilustrata)>1면에 실린 '조선의 새 황제 이척의 즉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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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7일 아우 영왕을 황태자에 올리고 8월 27일 (음력 7.19) 경운궁 돈덕전에서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8월 27일은 즉위예식일이 되었던 바, 즉위식 후 순종은 즉위 조서를 반포하고 사면령을 내렸으며, 사망한 어머니 순명비 민씨를

명성황후로 책봉하고 죽은 첫번째 황태자비 민씨는 순명효황후로 책봉하고, 둘째 순종비는 순정효황후로 책봉하였다.

 

일제가 만든 황위 계승식 기념사진 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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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4월 헤이그밀사 사건 이후 일제의 강압에 의해 7월 18일(양력) 고종이 순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한 것이 비정상적인  

강제 선위가 되어버린 채, 고종은 ​그대로 대한제국 황제로서의 모든 권한이 정지되어버렸다. 

 

사위(嗣位).. 선왕이 사망한 후 왕세자, 왕세손, 왕세제, 왕족 같은 후계자가 왕위를 물려받는 것 

(문종, 단종, 성종, 연산군, 인종, 명종, 선조, 광해군, 효종~고종)

 

조선조 대부분 왕들은 사위에 의해 이뤄졌는데 선왕의 국상 중에 새 국왕이 즉위하므로 화려하거나 성대할 수 없이 애도하는 분위기로 

간략하고 장중하게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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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복(上位復)! 상위복! 상위복!"

​왕이 승하하면 왕을 모셨던 내시가 왕이 평상시에 입었던 웃옷을 왼쪽으로 메고, 동쪽 지붕 처마로 올라가서 지붕 한가운데

마룻대 위를 밟고 서서 , 왼손으로 옷깃을 잡고 오른손으로 옷 허리를 잡고서 북쪽을 향하여 흔들며 "상위복"을 세 번 외친다.

 

상위복은 "주상전하, 돌아오시옵소서"라는 뜻이 담긴 의례로 임금이 죽음의 길로 가지 말고 다시 돌아오라는 애절함을 담고 있어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 검은 실루엣 영상의 모습을 볼 때 가슴 저 밑바닥부터 왠지 모를 슬픔이 치밀어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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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마치면 옷을 앞으로 던지는데 내시가 함으로 이를 받아 들어와서  뒷 서쪽 지붕 처마로 내려와서 승하한 왕의 시신 위에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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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에 의한 즉위식은 기쁨보다는 슬픔이 큰 자리였다.

다음 왕의 즉위식은 선왕이 사망하고 4~6일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새 국왕이 상복을 입는 성복례 이후에 시신이 안치된 빈전 밖에서

거행되는데, 국왕 즉위식에 참석한 관리들은 최복이라는 상복을 입고 국왕도 즉위식 거행할 동안에만 면목으로 갈아입었다고 한다.

 

즉위식장 동쪽에는 선왕의 유언이 놓이고 서쪽에는 대보(국새)가 놓인다.

면복을 입은 새 국왕이 향을 피우고 영의정이 선왕의 유언을 읽고 좌의정은 대보를 새 국왕에게 올린다.

진행자인 찬의가 '산호(山呼)'라고 하면 모든 참석자가 "천세"를 외치고 찬의가 '재산호(再山呼)'라고 하면 모두들 "천천세"를 외치며 행사가 끝나는데, 국왕은 즉위식을 마치자마자 다시 상복으로 갈아입고 국장을 계속 진행하며 즉위 교서를 반포하고 사면령을 내린다.

정조는 1776년 3월 5일 영조가 승하하고 닷새 지나고 나서 3월 10일 국상이 진행되는 도중에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는데

정조는 시종 눈물을 흘리며 의식을 진행하였고 즉위식장은 왕과 신하가 함께 우는 자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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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反正), .. 왕위가 국왕의 후계자가 정상적으로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군사력을 동우너하여 강제로 계승되는 경우

                        (태조, 중종, 인조)

반정이 일어나면 국왕은 왕위에서 밀려나 군의 지위로 격하되는데 새 국왕은 사전 준비없이 갑자기 즉위식이 치러지므로

즉위식이 매우 간략하게 이뤄진다.

(1)태조 이성계 즉위식

드라마 <용의 눈물>을 통해 즉위절차를 재구성해본다.  

 

1392년 7월 12일 고려 공양왕이 이성계를 찾아가 동맹을 맺으려 하였는데 이날 배극렴 등이 왕대비에게 아뢰어

공양왕을 패한다는 교지를 받아내었고 이에 공양왕은 왕위에서 물러나 원주로 갔다.

왕대비가 고려국 국새를 가지고 모든 정사를 처리하면서 7월 13일 이성계를 '감록국사'로 임명하였다.

7월 16일 배극렴, 조준 등이 대비로부터 국새를 받아 이성계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도록 요청하였다.

 

7월 17일 이성계가 수창궁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최고정무의결기관인 도평의사사, 즉 도당의 인주를 받아 정권의 합법성을 획득했다.

이성계는 즉위식을 하였어도 겸양의 표시로 계속 어좌에 앉지 않고 7월 28일에야 정식으로 즉위 교서를 반포하고 어좌에 앉았다.

​8월 7일 부인 강씨를 현비로 정하고 여러 왕자를 군으로 봉하고, 8월 11일에 비로소 처음으로 어좌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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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조반정

드라마 <꽃들의 전쟁> <화정> 등을 통해 즉위절차를 재구성해본다.

 

1623년(광해군 15) 3월 12일 한밤중에 홍제원에서 군대를 집결하고 능양대군(훗날 인조)은 연서역에 주둔했다.

능양대군은 김류, 이귀, 김자점 등과 함께 말을 타고 창의문(북문=자하문)을 부수고 도성으로 진입하여 창덕궁 돈화문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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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군이 안에 진입하여 국왕의 침전에 들어가 광해군을 찾았는데 실수로 횃불이 주렴에 옮겨붙는 바람에 창덕궁의 <인정전>만

남기고 모든 건물이 불에 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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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창덕궁 후원으로 난 담을 넘어가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어들었지만 안국신의 고발로 잡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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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을 성공시킨 후 1623년 3월 13일 아침, 능양대군은 계단 위의 호상에 앉아 신하들의 배례를 받고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의

석어당에 머물고 있는 인목대비를 찾아가 창덕궁이 불탈 때 한 군인이 후원에서 찾아온 어보를 올리게 하고 ,인목대비를 창덕궁으로

모시고 오려 했으나 응하지 않아 결국 능양대군과 광해군이 함께 직접 경운궁으로 갔다.

 

3월 13일 능양 대군은 정식으로 정전에서 즉위식을 통해 어보를 받지 못하고 인목대비로부터 승전색, 김천림 등을 통해 어보를

건네 받게 되었으며, 광해군을 처형하라는 인목대비의 명을 거역하고 경운궁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버티게 된다.

3월 14일 인목대비가 능양군으로 하여금 국왕의 지위를 계승하게 하라는 교지를 내렸고 인조는 백관의 하례를 받고 사면령을 내렸다.

광해주는 폐하여 군으로 삼고 왕세자는 서인으로 강등시켜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안치하였다.

인조는 3월 13일 대비가 거처하는 경운궁 석어당에서 융복을 입은 채 어보를 받는 방식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3월 16일에야 정식으로 국왕의 법복을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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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극(登極).. 1863년 사위로 국왕이 된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건설하면서 황제에 오르는 등극의를 거행했다.(고종이 유일) 

1895년 을미사변으로 왕비가 일본인에 의해 시해를 당한 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는 아관파천이

이뤄진지 1년 후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경운궁으로 돌아오면서 대한제국이 탄생했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통해 자주 독립국가로서의 체면을 세우기로 하였고 10월 3일(양력)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대한제국이 있어야 우리 나라가 제대로 독립국임을 인정받는다. ('대한'은 '삼한'에서 나온 말.. 삼한을 하나로 통일한다는 뜻)

등극의는 10월 9일부터 14일까지 6일 동안 진행되었다.

고종이 환구단에서 고유제와 등극의를 지내고 경운궁 정전인 태극전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의 탄생을 알리는 조칙을 반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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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 안에 하늘과 땅의 모든 신령의 위패(位牌)를 모신 <황궁우>만 남아있고 환구단이 있던 곳은 1913년 철도호텔로 만들어버렸고 이후 그곳이 조선호텔로 되었고 현재 20층 웨스틴 조선호텔은 1970년에 재건축한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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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월 12일 환구단 고유제(告由祭)..

고종이 환구단 1층에 자리한 천신인 '호천상제'와 지신인 '황지기'의 신위에 술잔을 올리고 황제에 등극함을 알리는 행사.

고종은 면복을 갖춰입고 환구단에서 향을 피우고 폐백을 올리고 두 신위에 술잔을 3번씩 올리고 음복을 하고 축문을 태웠다.

(2)등극의(登極儀)..

환구당에 황제의 금의자를 놓고황제를 상징하는 면복으로 갈아입는데 열두가지 문양이 장식된 십이장복 곤룡포였다.

(이전까지 왕이 입은 곤룡포는 구장복이었다)

의정이 황제를 상징하는 대보를 올리자 고종이 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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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들이 무릎을 꿇고 세번 뛰는 삼무도(三舞蹈)와 세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고두(三叩頭)를 하며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만세 만세 만만세"를 외쳤다. (국왕 등극 때는 천세를 외쳤다)

10월 13일 고종은 즉위 조서를 반포하고 국로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연호를 '광무'라 하였으며, 사직을 태사와 태직으로 바꾸고

황후와 황태자를 책봉하였고 신하와 백성들과 함께 대한제국 탄생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14개조로 된 사면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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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정리  

즉위식의 종류는 선위, 사위, 반정, 등극 등 다양하지만 모두 공통적으로 새 국왕은 꼭 거쳐야 하는 절차는요..

 

V반드시 대보를 가져야만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것.
V새 국왕이 어좌에 앉아야 국왕으로서 자격을 갖춘다는 것.

V신하들이 충성을 서약하는 하례를 올리는 절차가 있어야 한다는 것.
V즉위 교서를 반포하여 신하와 백성에게 권위를 과시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
V새 국왕이 즉위하는 기쁨을 백성들과 함께 하는 사면령을 내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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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왕이 된다는 것은 아무나 해낼 수 없는 끝없는 인내의 삶인 듯 싶다.

왕은 무소불위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리라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참으로 가엾고 고달픈 인생이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기자기하게 누리고 사는 소소한 행복을 누릴 수 없고 대의를 위하여

임금 자신의 뜻을 무작정 밀고나갈 수도 없고 모든 것을 절제하고 끊임없이 공부를 한다.

걸핏하면 생각이 달라 찌그락빠그락하는 신하들의 당파싸움을 잘 교통정리해야 하는 한편,

국란을 대비해야 하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헤아려 주는 어버이같은 자애로움도 지녀야 한다.

자신의 건강과 기본적인 생리현상까지 매사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점검 받아야 하니 개인으로서의 자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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