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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덕산방도서관 신탐라순력도 제주읍성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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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배진성
댓글 0건 조회 1,949회 작성일 16-11-29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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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덕산방도서관 신탐라순력도 제주읍성 탐방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죽은 사람들과 함께 살다가 오랜만에 제주시에 간다. 탐라순력도를 보다가 제주읍성 길을 직접 걸어보려고 간다. 300년 전의 길을 걸어보려고 관덕정으로 간다. 관덕정 앞에서 받은 문화유산지도를 본다. 3·1기념집회현장과 3·1시위발포현장이란 글씨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복원된 제주목관아와 제주읍성을 따라 걸어간다. 아무래도 300년 전의 목소리가 아니다. 300년 전의 발자국소리가 아니다. 1947년 3월 1일 그날의 소리가 분명하다. 시위하는 소리와 말발굽소리와 총소리가 들린다. 햇살까지도 시위를 하고 말을 달리고 총을 쏘아댄다. 우리들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외치던 삼일정신이 총을 맞고 쓰러져 지금까지도 피를 흘리고 있다. 도대체 그날 이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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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는 이형상 제주목사가 재임할 당시 제주도를 동-남-서-북으로 약 한 달 간 순력(巡歷)하고 돌아와서 그간의 여러 가지 상황들을 28폭의 그림에 담아낸 총 41면으로 된 도첩(圖帖)으로, 채색화이자 기록화이다.
기록화는 특정한 사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그 내용을 시각적으로 전달한 그림을 말한다. 중앙에서는 도화서 화원(畵員)들이 의궤도를 비롯한 기록화를 담당하였다. 『탐라순력도』는 지방에서 그려졌음에도 불구하고 화공의 이름이 남아 있고 그 화필의 수준이 중앙 화원들이 그린 의궤도를 능가하고 있어 독보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순력(巡歷)은 본래 관찰사가 도내의 각 고을을 순회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제주의 경우 전라도관찰사가 매년 2차례 제주에 내려와 삼읍을 순력하는 일은 불가능하였다. 전라도관찰사는 자신의 임무 중 일부를 제주목사에게 위임하였는데, 순력의 임무 역시 그 중의 하나였다.
제주목사는 전라도관찰사를 대행하여 매년 봄, 가을 두 차례 제주 삼읍인 제주목·대정현·정의현을 순력하여야 했다. 이 예에 따라 제주목사 이형상은 1702년(숙종 28) 가을 순력을, 음력 10월 29일 출발하여 11월 19일까지 21일 동안 실시하였다. 이형상은 제주도 관내를 순회하면서 자연, 역사, 산물, 풍속 등을 화공 김남길(金南吉)로 하여금 40폭의 채색화로 그리게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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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는 순력의 내용을 담은 각 행사 장면 28도(圖), 평상시의 행사 모습을 담은 11도, 제주도와 주변 도서의 지도인 「한라장촉(漢拏壯囑)」 1도, 「호연금서(浩然琴書)」1도 등 총 41도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서문 2면을 넣고 화첩(畵帖)은 오노필(吳老筆)에게 청하여 비단으로 장식하여 만들었다.
이형상 자신은 매 그림의 상단에 네 자로 제목을 달고 하단에 설명을 첨가하였다. 『탐라순력도』의 완성 시기는 서문의 말미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1703년 5월 13일로 생각된다. 이형상 제주목사는 사실 1703년 3월에 파직당하였으나, 그 해 5월 초까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탐라순력도』는 가로 35㎝ × 세로 55㎝ 크기의 장지(壯紙) 위에 가로 29.5㎝ × 30.5㎝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상단에는 가로 29.5㎝ × 세로 3.7㎝의 난을 만들어 네 글자로 제목을 달았다. 그림의 하단에는 가로 29.5㎝ × 세로 12.8㎝ 크기의 난을 좌우로 이등분하여 우측 칸에 그림과 관련된 내용을 기록하였다.
이형상의 종손으로 경상북도 영천시에 거주하는 이수창(李秀昌)이 소장해 오다가 1998년 12월에 제주시청에서 3억 원에 매입, 소장하고 있다. 현재 보물 제65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형상의 『남환박물』과 함께 조선 제주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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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대 이형상 제주목사는 1702년(숙종 28) 6월부터 1703년(숙종 29) 6월까지 재임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사실은 1703년 3월에 파직당한 듯하다. 선정을 베푼 목사이며 역대 목사들 중 ‘탐라순력도’로 더욱 유명한 목사이다. 숭유억불정책을 썼으며, 120여 곳의 신당을 불태워 철폐하고 무당들을 모두 농사짓고 세금 내도록 조치하여 일부 사람들의 불만도 있었다. 포작인들과 노비, 백성들의 무거운 역을 감해주었다. 제주도에 유배 온 남인 오시복을 보살폈다는 혐의로 파직된 비운의 목사이기도 했다.
그런데 제주목사 이형상은 왜 『제주순력도』가 아니라 『탐라순력도』라고 명명했을까? 이미 없어져 버린 '탐라'라는 명칭을 붙인 기록화를 남겼다는 것은, 변방 제주에서 그는 탐라를 느꼈고 제주인이 탐라의 후손임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제주목사로서 재임기간은 10개월 남짓이었으나 그 사이 행해진 행보는 탐라의 색을 퇴색시키는 한편 탐라의 전통을 존중하기 위한 양면정책을 썼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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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86명의 제주목사 중 58명(30%)은 선정을 베풀었다.
이에 반해 14명(5%)은 탐관오리로 백성들의 삶이 팍팍해졌다. 정치를 잘못한 목사도 15명으로 꼽혔다. 반면, 기건, 이약동, 이수동 목사는 청백리로 이름을 날렸다.
기건 목사(재임 1443~1445)는 겨울에도 알몸으로 물질하는 해녀를 안쓰럽게 여겨 평생 전복과 미역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는 또 나병(한센병) 환자를 위해 해변에 격리치료시설을 설치하고 바닷물과 약으로 치료해줬다.
이약동 목사(1470~1473)는 겨울 백록담에서 한라산신제를 지내면서 동상에 걸려 죽고 다치는 백성이 나오자 신단을 아라동 산천단으로 옮겨 제를 봉행하도록 했다. 이임 시 관물과 관복 모두를 두고 떠나는 도중 말채찍을 손에 쥐고 있자 이마저도 관덕정 기둥에 걸어 놓고 퇴임했다. 그는 말년에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청렴하게 살았다.
이수동 목사(1526~1528)는 민가에서 귤을 징발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별방·수산·서귀·명월 등 방호소가 있는 곳에 과원을 조성해 군인들이 관리하고, 진상에 충당하도록 했다.
허명 목사(1814~1815)는 해녀들이 미역을 캐고 내는 수세(水稅·조합비)를 폐지했다. 채무로 백성들의 반목이 심해지자 법적 보장이 없는 차용문서를 임시방편으로 만들어줬다. 나아가 이 문서를 태우고 무효를 선언해 민초들을 구원했다. 이 때 부터 효력이 없는 문서를 ‘허명(허맹)의 문서’라 불리게 됐다.

가렴주구와 폭정을 일삼은 목사도 있었다. 1619년 부임한 양호는 탐학이 극도로 심해 여러 차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으나 광해군의 비호로 무마됐다. 백성들은 그를 호랑이를 대하는 것처럼 두려워했다. 벼슬에 쫓겨나도 제주에 남아 행패를 부리던 그는 1623년 반정이 일어나 인조가 즉위하자 체포돼 사형 당했다.
역사 속 인물들도 목사로 부임했다. 인조반정 이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어 ‘이괄의 난’을 일으킨 이괄은 1616년부터 3년간 목사로 재직한 바 있다.
16세기 중반 황해도에서 일어난 ‘임꺽정의 난’을 제압한 남치근은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1552년 목사로 부임, 천미포로 다시 침입한 왜구를 무찔렀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영웅인 양헌수 목사는 1864년부터 2년간 목사로 재임한 바 있다.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자 춘향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홍종우는 1905년부터 1년간 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혁명의 아이콘이었던 김옥균을 1894년 상하이에서 암살한 인물이다.
애민정신으로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은 반면, 학정으로 원성을 불러오기도 했던 제주목사는 1906년 일제의 통감부 설치 따른 목사제도 폐지와 1910년 일제강점으로 역사에서 사라진 관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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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3월 1일 오전 11시 ‘제28주년 3‧1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린다. 제주북국민학교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대략 2만 5천~3만 명으로 추산된다. 아, 2만 5천~3만 명. 우연인 것일까. 우연만을 아닐 것이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혹시 희생자의 숫자를 미리 예고한 것은 아닐까?
다른 10개의 면에서도 별도의 기념식이 열린다. 각 지방마다 수천 명씩 모여들고 있다. 경찰은 원래의 제주경찰 330명과 응원경찰 100명 등 430명으로 보강하고, 이 가운데 150명을 제주 읍내에 배치한다. 시골에서 제주 읍으로 올라오는 군중들을 막아보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행사장 주변에는 제주읍 뿐만 아니라 애월면‧조천면 등 주변 주민들이 모여들고 학생들도 대거 참여한다. 학생들은 이미 오전 9시께 오현중학교에 집결하여 한 차례 행사를 치르고 다시 이곳으로 참여한다.
기념식 대회장인 안세훈은 “3‧1 혁명 정신을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자”는 요지의 발언을 한다. 이어 각계의 대표들이 나와 연설을 하는데, 주로 3‧1 정신을 계승 자주독립을 전취하자는 내용이다. 또 삼상회의 절대지지와 미‧소 공동위원회 속개를 촉구하는 구호도 나온다.
경찰병력을 읍내 요로에 배치하여 군중들에게 귀가할 것을 명하지만 이에 불응하고, 수만 군중이 집결하는 사태에 이르자 경찰은 유혈진압을 피하고 주도자는 사후에 검거하기로 군정관과 협의하여, 북국민학교에서의 3‧1절 기념행사 거행을 묵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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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께 기념행사가 끝난 후 가두시위가 시작된다. 제주북국민학교를 나온 시위행렬은 두 갈래로 나뉘어 한 대열은 미군정청과 경찰서가 있는 관덕정 광장을 거쳐 서문통으로, 다른 한 대열은 감찰청이 있는 북신작로를 거쳐 동문통으로 이어져 간다. 제주 읍내를 중심으로 서쪽 지역 주민은 서쪽 대열에, 동쪽 지역 주민들은 동쪽 대열에 합류하여 마을로 돌아가면서 시가행진을 하며 위세를 부린 것이다.
오후 2시 45분께 관덕정 앞 광장에서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채어 소란이 일어난 무렵에는, 시위행렬이 이미 관덕정 광장을 벗어난 시점이다. 관덕정 광장에는 ‘S’자 형태의 행진으로 위세를 부리던 시위군중이 지나간 다음이어서 건물 옆쪽에 듬성듬성 100~200명의 관람군중들만 있다. 한 기마경관이 관덕정 옆에 자리 잡은 제1구(제주)경찰서로 가기 위해 커브를 도는 순간, 갑자기 튀어나온 6세 가량의 어린이가 말굽에 채이면서 시작된다. 기마경관이 어린이가 채인 사실을 몰랐던지 그대로 가려고 하자 주변에 있던 관람군중들이 야유를 하며 몰려들기 시작한다. 일부 군중들은 “저 놈 잡아라!”고 소리치며 돌멩이를 던지며 쫓아간다. 당황한 기마경관은 군중들에 쫓기며 동료들이 있는 경찰서 쪽으로 말을 몰아가고, 그 순간 탕탕탕 총성이 울린다.
관덕정 앞에는 육지에서 내려온 응원경찰이 무장을 한 채 경계를 서고 있다. 기마경관을 쫓아 군중들이 몰려오자 경찰서를 습격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일제히 발포를 한다. 이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는다. 희생자 가운데는 국민학생과 젖먹이를 안고 있던 20대 여인 등도 포함되어 있다. 사망자의 신원은 허두용(許斗鎔‧15세‧제주북교 5년), 박재옥(朴才玉‧21세‧여), 오문수(吳文壽‧34세), 김태진(金泰珍‧38세), 양무봉(梁戊鳳‧49세), 송덕수(宋德洙‧49세)로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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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의 발포는 위협 수준을 벗어난 것이었다. 희생자 가운데 광장 복판에 쓰러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희생자는 경찰서와 상당히 떨어진 식산은행 앞 노상이나, 도립병원으로 가는 골목 모퉁이에 쓰러져 있었다. 도립병원의 검안 결과 희생자 중 1명을 빼놓고 나머지 모두 등 뒤에 총탄이 맞은 것으로 판명됐다. 여러 정황을 볼 때, 공포만 쏘아도 군중들이 흩어질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1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됨에 따라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먼저 과잉반응을 보인 응원경찰의 심리문제에 초점이 모아졌다.
이날 도립병원 앞에서 두 번째 발포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응원경찰의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극명하게 표출한 사건이었다. 당시 도립병원에는 그 전날 교통사고를 당한 한 응원경찰관이 입원해 있었는데 동료 2명이 경호 차 병원에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관덕정 쪽에서 총성이 나고, 피투성이 된 부상자들이 업혀 들어오자 그들 중 한명인 이문규(李文奎‧충남 공주경찰서 소속) 순경이 공포감을 느껴 소총을 난사, 장제우(張濟雨) 등 행인 2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미군 정보보고서도 도립병원 앞의 발포를 ‘비이성적(irreconcilable with rational thinking)’ 행위로 규정하면서 2건의 발포자들에 대한 심리분석을 다음과 같이 했다. 즉 “그들은 대전에서 훈련을 받았고, 1946년 가을 좌익 폭도들에 의해 동료 경찰이 잔혹하게 당했던 사실을 오랫동안 잊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대구 10월 사건’을 경험했던 자들로 과잉반응을 보일 수 있는 심리여건을 갖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날 발포사건 직후 제주감찰청 앞에서는 무장경관대와 시위대가 대치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시위대는 주로 학생들과 부녀동맹 소속의 부녀자들이었다. 이를 막아선 경찰은 기관총을 장착한 스리쿼터를 앞세운 50명 가량의 무장경찰로 집총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무장경찰은 경찰 고문관 패트릿지 대위가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한 시간 가량 대치하던 시위대는 제주신보 기자들의 설득으로 자진 해산했다. 이로 인한 쌍방의 인명피해는 없었다.
한편 3‧1기념행사와 시위를 둘러싼 충돌은 비단 제주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서울‧부산‧정읍‧순천‧영암 등 전국 각지에서 시위대끼리 충돌하거나 경찰의 발포로 사망 16명, 부상 22명 등 모두 38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런데 제주경찰사에서 밝히고 있듯이, “제주의 3‧1사건은 경찰이 가해를 하고 민중이 피해자가 되었기 때문에 민심수습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 경찰당국은 민심 수습보다는 발포의 정당성 강조에 주력했다. 도립병원 앞의 발포에 대해서는 ‘무사려한 행위’로 잘못을 시인하면서도, 핵심적인 사건인 관덕정 앞의 발포에 대해서는 치안유지의 대국(大局)에 입각한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다. 특히 중앙의 경무부 측에서는 3만여 시위군중이 경찰서를 포위 습격하려고 했기에 불가피하게 발포했다는 해명에 나섰고, 일부 언론에서 이런 내용을 보도했다.
또 강인수 제주감찰청장도 이와 유사한 성명서를 발표했다가 지방언론으로부터 통렬한 비난을 받았다. 즉 제주신보는 사설을 통해 “감찰청장의 성명에 의하면 발포 당시에 S자형으로 행진하던 시위대가 현장에 있던 것처럼 되어 있으나 이 점은 본사 기자가 직접 목격하였기에 청장의 통찰이 정확하지 못한 게 있음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며 증인이 필요하다면 몇 십 명이라도 증언케 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3‧1 발포사건 직후에 사표를 제출한 박경훈 도지사도 “관직에 있는 나로서 무어라고 비판을 가할 수는 없으나 발포사건이 일어난 것은 시위행렬이 경찰서 앞을 지난 다음이었던 것과 총탄의 피해자는 시위군중이 아니고 관람군중이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미군 정보보고서도 발포사건의 동기에 대해서 처음에는 ‘경찰서의 습격’에 비중을 두었다가 3월 20일에 이르러 정보기록을 수정했다. 즉 미 24군단 주간정보요약서에는 “제1구경찰서로 보고하기 위해 가던 한 기마경관이 우연히 그의 말에 달려든 한 어린이에게 경상을 입혔다. 그러자 이를 야유하던 200명 미만으로 추정되는 군중이 경찰서 쪽으로 그를 뒤따라갔다. 경비를 서고 있던 경찰은 군중이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사격을 가하였다. 이 사건에 앞서 시위대들은 광장 주변에서 S자 모양으로 열을 지어 행진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제주도 군정 책임자인 스타우트 소령도 “관덕정 앞 사건은 어린애를 친 기마순사에게 군중이 돌을 던지고 여세로 경찰서를 습격할 기세를 보임으로 발포하게 된 것이나 나중에 알아본 결과 군중들은 대로 만든 플래카드를 가지고 있었을 뿐 곤봉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경찰당국은 시종일관 이 문제를 ‘경찰서 습격사건’으로 규정하여 민심 수습보다는 강공책에 비중을 두었다.
경찰은 사건이 발생된 3월 1일 초저녁부터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통금시간은 저녁 7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까지였다. 이미 충청도 응원경찰 100명이 들어와 있었으나 비상경계령을 펴다보니 경찰력이 모자라 가까운 전남 경찰에 응원경찰 지원을 요청했다. 1일 저녁에 목포 경찰 100명이 제주를 향해 출발했다. 제주 경찰은 2일부터 3‧1 행사 위원회 간부와 중등학생들을 검속했다. 2일 하루 동안 학생 25명이 경찰에 연행되었고, 곧이어 무조건 구타와 고문을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여기에다 경찰 책임자의 발포 정당성에 대한 담화가 나오자 민심이 들끓었다.
본토에서 온 응원경찰에 의해 발포되었다는 점, 그리고 희생자들이 시위대가 아니라 단순한 관람군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좌파만이 아니라 우파진영 인사들도 우려의 빛을 나타냈다. 좌파세력은 이런 민심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조직적인 반경(反警) 활동을 전개했다. 처음에는 삐라 붙이는 일과 사상자 구호금 모금운동을 벌였다. 제주 민전은 각계가 참여하는 3‧1사건 진상조사단을 구성하자고 제안했으나 경찰 측에서는 이를 거부했다. 다만 3월 3일 관(官) 중심으로 조사단이 구성됐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이런 좌파세력의 움직임을 배후에서 주도해 갔다. 그리고 3월 7일 각 읍‧면 위원회에 ‘3‧1사건 대책 투쟁에 대하여’란 장문의 지령서를 내려보냈다. 이 지령서의 주요 내용을 추려내면 다음과 같다.
- 지난 3월 1일 제주읍에서 일어난 발포살해사건에 대하여 제주도위원회 상무위원회는 제주읍위원회 상무위원회를 소집하여 그 연석회의에서 대정면의 건의문을 토대로 하여 다음과 같은 투쟁방침을 결정하는 동시에 ‘당 투위’를 구성하고 이 투위가 전체적 3‧1사건 대책 투쟁을 지도하기로 되었음.
- 투쟁방침으로는 ①3‧1 투쟁방침의 연장으로서 당의 영웅적 대중투쟁을 위한 합법 전취 ②미제 및 반동 진영의 약체화에 대한 결정적 최후적 투쟁 ③제2혁명단계의 대중적 투쟁에 대한 완전한 정치적 사상적 무력적 준비.
- 조직 활동은 도‧면위에서는 당내 투쟁조직으로서 ‘3‧1사건 투쟁위원회’를, 당외 투쟁조직으로서 ‘3‧1사건 대책위원회’를 합법적으로 읍‧면‧리‧구에 구성할 것.
- 파업단에서는 다음의 요구조건과 성명서 1통은 미 지방장관에게, 1통은 중앙장관에게, 1통은 각 대책위원회에 제출하는 동시에 3월 10일 정오를 기하여 총파업에 들어갈 것.
- 요구조건은 ①발포책임자 강동효 및 발포한 경관을 살인죄로써 즉시 처형하라 ②경찰관계의 수뇌부는 즉시 책임 해임하라 ③피살당한 동포의 유가족의 생활을 전적으로 보장하며 피상자에게 충분한 치료비와 위로금을 즉시 지불하라 ④3‧1사건에 관련되어 피검된 인사를 즉시 무조건 석방하라 ⑤경관의 무장을 즉시 해제하라 ⑥경찰에서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즉시 축출하라.
이런 방침에 따라 3월 5일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간부 수십 명이 제주읍 삼도리 김행백(金行伯) 집에 모여 ‘제주도 3‧1사건 대책 남로당 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위원장에 김용관(金龍寬), 부위원장에 이시형(李蓍珩)을 선출했다. 또 3월 9일에는 제주읍 일도리 김두훈(金斗壎) 집에서 사회인사 수십 명이 모여 ‘제주 3‧1사건 대책위원회’를 조직했는데, 위원장에 홍순용, 부위원장에 안세훈을 선출했다. 당시 안세훈은 남로당 제주도위원장이었고, 홍순용은 대표적인 우익인사로, 한독당 제주도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그러면 남로당 제주도당 지령서에 나오는 ‘대정면당의 건의’는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에 당시 남로당 대정면 책임자였던 이운방은 이렇게 밝혔다.
의외의 불상사건에 접한 도당본부는 그 첫 번째 대책으로서 유가족 원호의 모금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대정면당 역원회에서도 그 대책 강구를 위한 회의를 가졌었다.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보아 잠시라도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손톱에서 발톱에 이르기까지 완전무장을 하고 있는 데 반하여 우리들은 백수공권이어서 그들 총검부대와의 직접적인 정면충돌은 도저히 생각조차 못 해볼 일이었다. 그러므로 평화적인 항의의 의사표시의 수단으로써 ‘전도 총파업’을 전원일치 가결하고, 조직부 이승진을 연락원으로 도당본부에 파견하고 이것을 건의하도록 하였다.
여기에 언급된 이승진(李承晋)은 4‧3 무장투쟁 때 유격대 총사령관을 맡게 되는 김달삼(金達三)의 본명이다. 이승진은 이때 22세(1925년 생)의 청년으로서, 대정중학원 교사이면서 남로당 대정면당 조직부장을 맡고 있었다. 대정면당은 군정당국에 항의의 표시로 평화적이면서도 그 강도가 가장 높은 전도 총파업을 도당에 건의하기로 하고 이승진을 파견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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