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 한강변 누정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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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한강변누정탐방>공부, 후기
나는 한강 하류변 동네에 산다. 서울 서쪽 끝자락에 자리한 강서구에서 29년째 살고 있다. 한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강기슭의 빼어난 풍광들과 종종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면 지금의 규격화된 아파트촌 일색 너머로 옛 마을이 있던 자리들을 어림짐작으로 짚어볼 때가 있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했던 한강 하류 기슭엔 원래 물길이 어떻게 나 있었고 배가 어떻게 드나들었으며 마을 길은 어디로 이어졌을까? 때때로 이 고장의 옛 지형과 변천사에 대한 궁금증이 일곤 하였는데, 이번에 우리동네 구립도서관(꿈꾸는어린이도서관)에서 주최하는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에서 그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이름하여 “강서한강변누정탐방”이란 제목하에 12강좌가 진행되었다. 온라인플랫폼 ZOOM 강의로 시작하여 마지막 2강좌는 현장 탐방을 위해 함께 모여 걸었으니, 대면 수업도 이뤄진 셈이다. 제1회차 강의에선 “강서 한강변 누정의 어제와 오늘”에 대한 연구와 목적 그리고 연구의 기본방향 및 개념정의에 대한 설명을 들었고, 공부방향을 감잡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문헌이나 지도 그림으로 남겨진 자료들을 찾아 공부하는 과정(공부가 진행되는 기간)에서 새로운 자료들이 많이 발굴되기도 했다. 이 고장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토박이 가문의 어른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또 역사적 건축물이나 기물이 있던 장소를 발품을 들여 찾아가 확인하고 그 내용을 채록하는 작업을 열성으로 하여 이끄신 김종명 박사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양천 고을에 오랜 세거지를 두었던 엄씨와 심씨 이씨들의 개인 문집에서 집안 내력과 역사에 얽힌 얘기들도 쏟아져 나왔다. 특히 ‘막여정’이란 누정을 짓고 행세를 해온 엄씨 일가의 엄경수(1672-1718)의 『부재일기』와 『연강정사기』란 책자에서 경기 한양의 옛 지명과 지형에 대한 디테일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누정문화(樓亭文化)’는 조선 선비나 관료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문화였고, 조선 땅 어디서나 풍광 빼어난 곳이 있으면 정자가 들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경수의 『연강정사기』를 참고해 보면, 한양 도성을 끼고 근처 한강변에 자리한 정자 수(75개)만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하니, 조선 선비들이야말로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예인(藝人)풍의 남자들이었다. 그중에 우리동네 강서구에 무려 14개의 누정이 빽빽하게 존재하였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공부에서 그 위치를 거의 다 찾아냈고 탐방으로 장소를 밟아보기도 했다. ‘누정’을 중심으로 공부하는 중에 나는 의문점이 일기 시작했다. 이 고장엔 과연 선비들만의 문화 공간만 남아있고 민초들의 삶과 그들이 즐기던 문화 흔적은 자취도 없이 깡그리 사라졌단 말인가? 산책길에 나설 때마다 의문이 꼬리를 물고 나를 따라다녔다. 그러던 중 자연스럽게 의문이 꽂히는 산이 있었는데, 그게 용왕산과 증미산이었다. 풍경이나 기세로 보아 어떤 산보다도 우뚝하고 빼어난데 아무리 흔적을 찾아보아도 누정 사료가 나타나지 않는 점이 이상했다. 한데 알고 보니, 용왕산은 무속신앙의 신내림 장소가 있던 곳이고 증미산엔 마을 사람들이 함께 산신제나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서낭당과 치성단이 있던 장소였다는 것을 밝혀냈다. 아직도 절기에 맞춰 민속 행위가 이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유교를 따르던 선비와 민초의 ‘문화공간’이 따로 존재했음을 자연스럽게 짐작할 만했다. 앞으로 이 공부가 더 진행된다면, 민초의 문화공간과 흔적을 찾아내는 것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이 섰다. 아무튼 이번 “강서한강변누정탐방”공부에선 수강생들이 직접 대담자로 참여하는 적극성과 함께 새로운 자료와 구전으로 전해오던 귀한 서사가 채록되고 보태지기도 하는 성과를 올린 공부였다.
옛 양천 고을이었던 우리동네는 내가 좋아하는 조선의 진경산수화가 겸재(謙齋) 선생께서 5년 동안 현령을 지낸 곳이라, 여러 명소가 그림으로 남겨져 있다. 산책길에서 그 장소들과 마주할 때마다 큰 행복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동네다. 유경숙/씀.
나는 한강 하류변 동네에 산다. 서울 서쪽 끝자락에 자리한 강서구에서 29년째 살고 있다. 한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강기슭의 빼어난 풍광들과 종종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면 지금의 규격화된 아파트촌 일색 너머로 옛 마을이 있던 자리들을 어림짐작으로 짚어볼 때가 있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했던 한강 하류 기슭엔 원래 물길이 어떻게 나 있었고 배가 어떻게 드나들었으며 마을 길은 어디로 이어졌을까? 때때로 이 고장의 옛 지형과 변천사에 대한 궁금증이 일곤 하였는데, 이번에 우리동네 구립도서관(꿈꾸는어린이도서관)에서 주최하는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에서 그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이름하여 “강서한강변누정탐방”이란 제목하에 12강좌가 진행되었다. 온라인플랫폼 ZOOM 강의로 시작하여 마지막 2강좌는 현장 탐방을 위해 함께 모여 걸었으니, 대면 수업도 이뤄진 셈이다. 제1회차 강의에선 “강서 한강변 누정의 어제와 오늘”에 대한 연구와 목적 그리고 연구의 기본방향 및 개념정의에 대한 설명을 들었고, 공부방향을 감잡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문헌이나 지도 그림으로 남겨진 자료들을 찾아 공부하는 과정(공부가 진행되는 기간)에서 새로운 자료들이 많이 발굴되기도 했다. 이 고장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토박이 가문의 어른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또 역사적 건축물이나 기물이 있던 장소를 발품을 들여 찾아가 확인하고 그 내용을 채록하는 작업을 열성으로 하여 이끄신 김종명 박사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양천 고을에 오랜 세거지를 두었던 엄씨와 심씨 이씨들의 개인 문집에서 집안 내력과 역사에 얽힌 얘기들도 쏟아져 나왔다. 특히 ‘막여정’이란 누정을 짓고 행세를 해온 엄씨 일가의 엄경수(1672-1718)의 『부재일기』와 『연강정사기』란 책자에서 경기 한양의 옛 지명과 지형에 대한 디테일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누정문화(樓亭文化)’는 조선 선비나 관료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문화였고, 조선 땅 어디서나 풍광 빼어난 곳이 있으면 정자가 들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경수의 『연강정사기』를 참고해 보면, 한양 도성을 끼고 근처 한강변에 자리한 정자 수(75개)만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하니, 조선 선비들이야말로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예인(藝人)풍의 남자들이었다. 그중에 우리동네 강서구에 무려 14개의 누정이 빽빽하게 존재하였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공부에서 그 위치를 거의 다 찾아냈고 탐방으로 장소를 밟아보기도 했다. ‘누정’을 중심으로 공부하는 중에 나는 의문점이 일기 시작했다. 이 고장엔 과연 선비들만의 문화 공간만 남아있고 민초들의 삶과 그들이 즐기던 문화 흔적은 자취도 없이 깡그리 사라졌단 말인가? 산책길에 나설 때마다 의문이 꼬리를 물고 나를 따라다녔다. 그러던 중 자연스럽게 의문이 꽂히는 산이 있었는데, 그게 용왕산과 증미산이었다. 풍경이나 기세로 보아 어떤 산보다도 우뚝하고 빼어난데 아무리 흔적을 찾아보아도 누정 사료가 나타나지 않는 점이 이상했다. 한데 알고 보니, 용왕산은 무속신앙의 신내림 장소가 있던 곳이고 증미산엔 마을 사람들이 함께 산신제나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서낭당과 치성단이 있던 장소였다는 것을 밝혀냈다. 아직도 절기에 맞춰 민속 행위가 이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유교를 따르던 선비와 민초의 ‘문화공간’이 따로 존재했음을 자연스럽게 짐작할 만했다. 앞으로 이 공부가 더 진행된다면, 민초의 문화공간과 흔적을 찾아내는 것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이 섰다. 아무튼 이번 “강서한강변누정탐방”공부에선 수강생들이 직접 대담자로 참여하는 적극성과 함께 새로운 자료와 구전으로 전해오던 귀한 서사가 채록되고 보태지기도 하는 성과를 올린 공부였다.
옛 양천 고을이었던 우리동네는 내가 좋아하는 조선의 진경산수화가 겸재(謙齋) 선생께서 5년 동안 현령을 지낸 곳이라, 여러 명소가 그림으로 남겨져 있다. 산책길에서 그 장소들과 마주할 때마다 큰 행복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동네다. 유경숙/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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