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문화관도서관] 강화도 광성보 손돌목을 아시나요?
페이지 정보
본문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큰 섬으로 꼽히는 강화도..
가을날, 인문학 기행을 떠나 역사적인 자취가 곳곳에 묻어나는 강화도를 탐방해보는 일이 참 즐겁습니다.
길 위의 인문학 관악도서관에서 신병주 교수님을 모시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던 정족산사고지를 돌아보고 나서
동쪽 바닷가 쪽으로 향하여 광성보를 찾아갔습니다.
아이들 어렸을 때 사회책에 나오는 역사유적지를 찾아서 다녀간 적이 있지만 워낙 오래 전이라 기억도 가물가물하여
이번 강화도 광성보 탐방은 처음인 양 새롭기만 하였습니다.
광성보(廣城堡)..
사적 제227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광성보는 강화해협을 지키는 주요한 요새입니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천도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입니다.
조선 광해군 때 헐어진 곳을 다시 고쳐 쌓았으며, 조선 1658년(효종 9)에 강화유수 서원이 해안 수비 진지의 하나로 설치하였습니다.
1679년(숙종 5)에 강화도의 국방시설을 확장할 때 완전한 석성으로 축조를 하면서
<화두돈대> <오두돈대> <용두돈대> <광성돈대>를 함께 축조하여 광성보에 딸리게 합니다.
<광성보>는 1871년(고종 8)에 미국 군대와 사투를 벌인 신미양요 격전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1866년(고종 3) 8월 미국의 무역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평양 대동강에서 교역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다가
평양 군민들에 의해 불 타버린 일이 일어났는데, 5년 후인 1871년 5월 미국이 <제너럴 셔먼 사건>의 보복과 통상 관계를 수립하려고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 제독'이 군함 5척에 병력 1천2백여 명, 함포 85문으로 무장하고 강화해협으로 침입하게 됩니다.
미국이 강화도 초지진 점령 후 광성보에서 어재연 장군의 정예부대와 싸우게 된 것입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어재연 장군을 중심으로 용감히 항전하였으나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 포로 되기를 거부하여
몇 명의 중상자를 제외하고 352명 전원이 순국하였습니다. 이때 파괴된 문루와 돈대를 1976년에 복원하였습니다.
이곳 주변에 어재연 장군과 어재수 형제를 기리는 전적비 <쌍충비각>과 352명의 순국 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신미순의총>을 비롯하여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가 있습니다.
안해루(晏海樓)..
광성보의 성문입니다.
1745년(영조 21)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인 <안해루>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우리 옛 건축물에서 흔히 보게 되는 '누(樓)'와 '정(亭)'은 주변을 쉽게 조망할 수 있도록 기둥과 지붕만으로 이루어진 건물을 말하는데
'누'는 '겹 지붕'으로 다소 높게 축조된 건축물로서 군사 목적도 있으면서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움도 갖추고 있습니다.
<안해루>의 상량문에 쓰여 있었다는 글귀..
천지의 빼어난 정기가 모이는 곳에 어찌 누대가 없으리오.…
경기도와 충청도로 길이 연결되고, 변경을 지키는 철옹성이요
연백과 인접하여 서로 지원하니 나라를 지키는 울타리이다
(天地精英之所鍾 斯豈無也…畿湖倚而爲重 固圉金湯 延白接而成援 衛國屛翰)
1830~1831년 무렵 장신(將臣) 이완식이 안해루에서 바라본 풍경을 읊은 한시도 전합니다.
안해루(晏海樓)..
遠臨滄海上(원림창해상) 멀리 푸른 바다 위를 바라보니,
遊子足風流(유자족풍류) 나그네의 풍류로는 제격이라네.
暫罷蓬瀛夢(잠파봉영몽) 오래지 않아 신선의 꿈에서 깨어나니,
夕陽入畵樓(석양입화루) 저녁노을이 그림 같은 누각으로 들어오네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
1871년(고종 8)신미양요 때 광성보에서 미국에 끝까지 항쟁하다 순국한 352명의 순국 무명용사들을 기리는 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광성보에 <쌍충비각>이 세워져 있습니다.
쌍충비(雙忠碑)..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1823-1871) 외 59명의 순절비입니다.
1873년에 두 비석이 나란히 건립되었습니다.
왼쪽은 <어재연과 어재수(1826-1871) 형제의 순절비>이고 오른쪽은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입니다.
고종 때부터 제사를 지내왔으며 1970년부터는 어재연의 후손들이 제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좌측)<어재연, 어재수의 순절비> 높이 177cm,너비 58cm, 두께 26.5cm의 양면비.
(우측)<광성파수순절비> 높이 168cm,너비 62cm, 두께 25cm의 양면비.
신미순의총(辛未 殉義塚)..
<신미순의총>은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 광성보 일대에서 미 해군과 격전을 벌이다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입니다.
전사자들 중 어재연, 어재순 형제는 충북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하였지만, 남은 군졸 51명은 신원을 알 수 없어서
이곳 광성보에 7기의 분묘를 마련하고 합장하여 이곳에 안장하였다고 합니다.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군은 최후의 한 명까지도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며 물러서지 않았으니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 했던 뜨거운 호국정신을 보여줍니다.
"나의 폐는 허공의 열매"
광성보 산책길에 걸려 있는 함민복 시인의 시 '숨꽃'의 시구..
함민복 시인의 시들을 참 좋아하는 느꽃지기인지라 이 길 위에서 함민복 시인의 시와 마주치니 반갑습니다.
함민복 시인은 현재 강화도에 살고 있는데 이번 강화 나들이 길에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덕진진, 초지진.. 광성보.. 손돌목돈대, 용두돈대..
진(鎭)과 보(堡)와 돈대(墩臺)는 무엇인가요?
진과 보는 조선 시대 군대로 군사상 중요한 지역인 해안 변방에 설치하여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던 군사 주둔 지역을 말합니다.
진과 보에 딸린 돈대는 조금 높직한 평지에 초소가 있던 곳을 말한답니다.
손돌목돈대[孫乭項墩臺]..
<손돌목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축조된 돈대로 원래는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가 있었고 포좌 3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돈대 넓이 778m, 성곽길이 108m.
반듯반듯한 돌로 쌓은 둥그런 <손돌목돈대> 바로 앞까지 왔습니다.
손돌목돈대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출입 공간..
손돌목돈대 내부..
신병주 교수님..
포를 설치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손돌목돈대>는 지대가 높아서 강화도 해협의 드넓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바다 건너편 손에 잡힐 듯이 빤히 가깝게 보이는 곳이 김포 땅인 듯합니다.
오른쪽 너머 바다는 흐르고 흘러 저 멀리 한강으로 이어져 서울이 자리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손돌목돈대>는 1871년(고종 8) 6월 11일 신미양요 때 미국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라고 합니다.
사령관인 중군 어재연 장군이 직접 지휘하여 격렬하게 반격을 가하던 요새입니다.
미군 측에서는 매키(Hug Mckee) 해군 중위와 두 명의 수병이 전사하고, 조선 측에서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대부분의 조선군이
장렬히 전사한 곳인데 흰옷차림의 조선군 전사자 시체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는 모습이 처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날의 가슴 아픈 순간의 참혹한 현장이 사진으로 남았다는 것이 더 충격적입니다.
무너진 <손돌목돈대>의 성벽과 파괴된 포자, 힘없이 내려진 깃발, 즐비한 조선군 전사자의 모습.
미군의 무차별 포격에 의해 파괴되고 점령당한 조선군 마지막 보루의 처참한 모습입니다.
2016년 10월 15일의 용두돈대의 원경..
1871년 6월 1일 미군 탐측선을 향해 최초로 포격을 시작한 바다 쪽 천혜의 용두돈대..
6월 11일 <손돌목돈대>의 함락과 더불어 아래쪽 <광성돈대>와 해협으로 길쭉하게 뻗어있는 <용두돈대>도 곧 미군에 함락되었습니다.
함락 직후 미군들은 광성보 전역에 설치되어 있던 군사시설을 모조리 불태우거나 파괴하고, 각종 군기와 대포들을 전리품으로
노획한 다음, 6월 12일 오전 소속 함정을 타고 작약도의 기함 정박지로 철수하였습니다.
미군은 전투에서 승리한 뒤 강화도에 게양돼 있던 어재연 장군기를 내리고 그 자리에 성조기를 꽂았다고 합니다.
에서 어재연 장수의 수자기를 배경으로 신미양요 참전 기념사진을 찍는 미군 장교들..콜로라도호>
이 전투에서 전사한 장수의 수자기를 전리품으로 챙겨갔다니 그날을 떠올리면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어재연 장수와 수자기 (帥字旗)..
<어재연 장군기>는 깃발 한가운데 장수를 뜻하는 '帥(수)'자가 적혀 있어 <수자기>로 불립니다.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 해군이 전리품으로 빼앗아간 어재연 장수의 <수자기>가 2007년 13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미국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돼있던 어재연 장수 수자기가 돌아와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됐답니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문화재청은 수자기의 영구 반환을 추진했으나 관련 법 개정과 미국 의회 통과 없이 반환이 힘들다는
미국 해군사관학교와 협의한 끝에 2년 계약(최장 10년까지 계약 연장 가능)의 장기 대여 방식으로 장군기를 들여왔다고 합니다.
장군기의 크기는 가로 415cm, 세로 435cm로 재질은 삼베.
<손돌목돈대>에서 내려와 이제부터 소나무 숲길을 지나서 강화 해협이 가까이 보이는 <손돌목>과 <용두돈대>를 보러 갑니다.
용두돈대로 가는 길에 바람에 나부끼고 있던 순시(巡視),령(令)깃발을 보니 136년 만에 돌아온 <어재연 장군 수자기>가 생각납니다.
용두돈대(龍頭墩臺)..
<용두돈대>는 강화 53돈대의 하나로 강화 해협을 지키던 천연 요새로서 <손돌목돈대>에 딸린 외곽 초소겸 포대였습니다.
1871년(고종 8) 포대가 설치되면서 정비된 곳으로, 1977년 강화 전적지 정화보수사업을 하면서 '용두돈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병인 신미양요 때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며, 1977년 성벽을 복원하면서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아! 저기 소용돌이 치는 저곳이 손돌목인가 봐요."
손돌목 전설..
강화도는 한강 어귀에 있는 섬으로 육지와의 사이를 흐르는 강화 해협 물길을 <염하(鹽河)>라 하는데 무척이나 빠르고 또한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극심해서 여간 숙련되지 않은 뱃사공은 이 물길을 건너지 못한다고 합니다.
조선 시대에 후금(뒷날 청)이 쳐들어왔을 때 인조 임금이 강화도로 피난길에 오르는데 손돌이 길 안내를 맡았답니다.
급한 물살로 강화도로 가는 뱃길이 험해서 금방이라도 배가 뒤집힐 것 같았는데 손돌이 점점 더 빠른 물살 속으로 노를 저어가자
임금은 뱃사공이 자신을 죽이려 이 험한 물살 속으로 배를 몬다고 생각하여 손돌을 죽이라고 합니다.
손돌은 죽기 전 자신이 띄우는 바가지가 흘러가는 곳으로 배를 몰고 가면 안전하게 강화도까지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임금의 명에 따라 손돌의 목을 쳤고 임금이 탄 배는 손돌이 띄운 바가지가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서 무사히 강화도까지 도착합니다.
강화도에 도착하고 나자 갑자기 엄청나게 바람이 거세게 불고 물길이 더 험해지게 되자 임금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손돌의 시신을 잘 거두어 후하게 장사를 지내라고 합니다.
강화도 광성보에서 마주 보이는 김포 덕포진(대곶면 신안리)에 실제 손돌의 무덤이 있답니다.
빠른 물살 흘러가는 이 물길을 손돌의 목을 벤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 부른답니다.
손돌이 죽은 음력 10월 20일에는 큰바람이 분다고 하는데 이를 '손돌의 한숨', '손돌 추위'라고 한답니다.
거세게 소용돌이치는 빠른 물살을 보니 손돌목 전설이 실감 나게 와 닿습니다.
<용두돈대> 한 가운에는 커다란 기념비석이 놓여있습니다.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
1977년 허물어진 성벽을 보수하면서 세운 비석으로 앞면의 비석 이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
비석 뒷면의 글은 시조 시인 노산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의 글씨로 쓰여 있습니다.
비석 옆에는 실제 전투에 쓰였던 대포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모퉁이를 돌아 <용두돈대>에서 김포 방향으로 서 있는 곳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니 앞서 보았던 물살보다 더 빠르고 물보라를 일으키며
하얗게 부서지는 거센 물살이 보이는데 아무래도 이곳이 진짜 손돌목일 듯싶습니다.
조선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후금이 쳐들어오자 인조는 강화도로 100일간 피신했었다가
강화도 연미정(바다 쪽으로 제비 모양으로 튀어나온 곳이란 뜻)에서 후금과 굴욕적인 형제 관계를 맺었던 역사적 사실이 있었습니다.
잠시 상상을 해봅니다.
1624년(이조 2) <이괄의 난>을 겪은 인조는 명나라를 숭배하고 후금을 배척하는 <향명배금(向明排金)>정책을 표방하는 바람에
3년 후 <정묘호란>이 일어나 후금이 쳐들어오자 인조는 다급하게 김포에서 배를 타고 강화도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한데 인조가 탄 배가 이곳 물길을 지나가는데 이처럼 빠른 물살이 자꾸 배를 뒤로 밀어내 육지로 오지 못 가게 하니 임금이 평정심을
잃고 뱃사공 손돌이 이괄의 사주를 받아 역심을 품어 일부러 물살 센 험한 곳으로 배를 몬다며 급기야 손돌의 목을 치라 명합니다.
손돌은 자신이 죽더라도 자신이 던져둔 바가지를 따라가면 강화도 육지에 다다를 것이라고 말하며 바가지를 바다 위로 던집니다.
출렁출렁 밀려왔다가 좌르르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밀려가는 파도, 하얗게 쳐올라 오는 빠른 물살은 보기만 해도 무섭습니다.
바닷물은 군데군데 빙글빙글 소용돌이를 보이기도 하고 우당탕퉁탕 요란한 물소리를 내며 흘러갑니다.
거센 물결에 배는 심하게 요동을 치고 모두들 겁에 질려 있지만 이 물길을 가장 잘 아는 뱃사공 손돌은 이미 죽고 없습니다.
뱃사공 손돌이 죽기 전에 띄워준 바가지가 흘러가는 방향으로 배를 움직여 가보니 마침내 임금이 탄 배는 이렇게 무사히
지금 우리가 서있는 강화도 육지에 다다르게 된 것입니다.
"아아, 내가 어리석었구나."
아뿔싸! 옹졸한 마음 때문에 아까운 베테랑 뱃사공을 잃고 말았으니 후회막급..
인조는 그로부터 9년 후 1636년(인조 14) 또다시 <병자호란>을 당하고 남한산성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떨다가 청나라에 항복을 하고
삼전도 굴욕 사건까지 겪고 말았으니, 순전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임금께서 아무래도 평소 많은 걱정과 의심으로 남을 쉽게 믿지 못하고
돌아가는 국제 정세와 세상의 흐름을 제대로 읽는 혜안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강화도 광성보 손돌목에서 잠시 상념에 잠기며 길 위의 인문학 <강화도> 역사탐방을 마칩니다.
(2016.10.15..토.견학)
- 이전글[인천주안도서관]참가후기1(유경옥) 16.10.21
- 다음글[의왕 내손도서관] 산사 가는 길, 학의천 새들의 이야기 16.10.2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