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문화관도서관] 500년 역사, 조선 왕조 실록 2강 - 실록의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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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들춰보며 실록에 나온 다양한 기록의 이모저모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가운데에서 풍성한 이야기로 가득한 조선 전기의 실록들은 그냥 읽어도 재미가 쏠쏠한데 반해,
조선 중기 16세기 이후부터는 성리학 영향으로 실록이 다소 형식적이고 예를 갖추고 무미건조해져 확실히 재미가 없어집니다.
조선 시대에는 왕권을 견제하는 언론 기구인 <삼사(三司)>를 두었는데 이는 조선왕조를 500년 가까이 존립하게 해준 제도였습니다.
9대 성종은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이라는 언관을 육성하였습니다.
삼사의 관원들은 학문의 깊이와 올곧은 판단력을 갖추고 강직한 인품을 지녔으며 삼사는 선비들이 선망하던 명예로운 직책이었습니다.
"전하~ 아니 되옵니다~" 신하가 말했을 때 왕이 안 들어주면 그대로 사직해버리고 말 정도로 센 신하들이 있던 바,
조선 시대에 왕의 정책을 감시, 비판하고 권력의 독점과 부정을 방지하는 기능을 하였던 삼사는 사실상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육판서 보다도 그 힘이 막강했던 듯 싶습니다.
또한 조선 시대가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사후에 왕의 평가가 이뤄지는 때에 현재의 왕이 절대 선대 왕에 대한
실록편찬 시 그 내용을 보며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없게 차단되어 있는 시스템 덕분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하니 왕이 평소 사관의 기록에 신경을 쓸 법도 합니다.
하지만 왕의 권력이 막강했던 10대 연산군 때는 사초의 내용을 본 왕이 이를 문제 삼아 사화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1498년(연산군 4) 7월 12일..
김일손의 사초내용 중에 자신에 대한 내용이 실려 궁지에 몰린 이극돈이 이를 빌미로 유자광과 함께 사초 내용 중 세조에 대한
불온 기록을 연산군에게 일러 바치고 이를 알게 된 연산군이 김일손의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 세조가 조카 단종을 죽인
것을 중국 한나라 때 항우가 의제를 살해한 것에 빗대어 기록)을 문제 삼아 <무오사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사관의 독립성이 유지되었던 조선에서 사초를 문제 삼아 사화까지 일으키게 되었으매, 이후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에 대한 일까지 알게 되면서 사정없이 잘못된 길로 가게 됩니다. 재위 10년 동안 온갖 패륜과 악한 행위를 일삼다가 결국 중종반정으로 쫓겨납니다.
패주 연산군에 관한 기록은 왕의 실록이 되지 못한 채 <연산군일기>라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고 이후 극심한 당파간 알력 속에서
인목대비를 유폐시키고 영창대군을 죽게 한 15대 광해군 역시 인조반정에 의해 쫓겨나면서 <광해군일기>라는 이름으로 남게 됩니다.
한편 세조에 의해 쫓겨나서 죽임을 당한 단종에 관한 기록은 한동안 폐위된 왕이라 하여 <노산군일기>라는 이름으로 돼 있다가
숙종 때 복권이 되면서 <단종대왕실록>이라고 표지를 바꾸게 되는데 <단종실록> 내용은 사실상 노산군 일기로 되어 있습니다.
4. 실록의 수정본
이밖에 조선 역사상 실록의 수정이 세 번 있었습니다.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 현종실록(현종개수실록), 경종실록(경종수정실록), 숙종실록 보궐정오
실록의 수정은 왕권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쟁의 소산으로 득세한 쪽의 신권의 입김 탓입니다.
①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북인과 서인)
14대 선조는 적장자가 아닌 방계 출신 왕이었습니다.
13대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12대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의 아들 덕흥군의 세 아들 중 셋째 하성군이 왕 위를 물려받습니다.
명종 때까지도 득세하던 기존 훈구파는 선조 이후 모두 사라지고 사림파들이 대거 등용되면서 물갈이로 참신한 세력이 등장합니다.
선조 시절에는 조선 시대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인재들이 배출되는데 안타깝게도 재야 때 힘을 합하던 이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각자 당파가 갈라져 1575년(선조 8) 이조정랑직을 둘러싸고 김효원(동인)과 심의겸(서인)으로 나뉘어 으르렁대기 시작합니다.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고 북인은 훗날 광해군 때 대북과 소북으로 파가 갈립니다.
선조 때 당파 싸움이 극도에 달하는데 당시 남인의 영수는 류성룡, 서인의 영수는 윤두수였습니다.
당시 류성룡을 중심으로 한 남인 정권이었기에 이순신 추천이 가능했고 임진왜란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선조 후반은 광해군이 정권을 잡고 북인 시대가 되는데 선조 사후 <선조실록>은 이들 북인이 주도하여 작성됩니다.
당시 대학자로 추앙받았던 율곡 '이이'는 동인과 서인을 화합하려 했던 무당파였음에도 이이의 제자와 후배들이 서인쪽이었기 때문에
율곡이 세상을 뜨자 북인이 주도한 <선조실록> 이이의 졸기에 '1584년 이이 졸'이라는 한 줄 글 밖에 실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북인이 주도한 <선조실록>
반면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난 후 효종 때 다시 수정된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비롯하여
이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실리는데 이처럼 역사는 정치적으로 승리한 자의 기록이기 마련인가 봅니다.
서인이 주도한 <선조수정실록>
②현종실록과 선조수정실록.. (남인과 서인)
숙종 때 <현종실록>은 초반 남인이 중심이었을 때 편찬되었는데 이후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다시 개수작업에 들어가 서인 시각으로 정리한 <현종개수실록>이 편찬됩니다.
③숙종실록 보궐정오.. (노론과 소론)
<숙종실록 보궐정오>는 영조 초반에 노론이 편찬한 <숙종실록>을 수정 보완하기 1728년(영조 4)에 이광좌·윤순 등 소론이
편찬한 것으로 <숙종실록>의 권말에 교정하듯 정오표를 붙여 부록으로 합본되었습니다.
④경종실록과 경종수정실록.. (소론과 노론)
영조 초반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였을 때 <경종실록>이 편찬되었으나 노론이 집권하면서 <경종실록>을 수정하게 됩니다.
1721년(경종 1), 1722년(경종 2)에 일어난 신임옥사에 대해 대부분 노론에게 나쁘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훗날 1778년(정조 2) 노론측에서 수정 편찬을 시작하여 1781년(정조 5) 7월에 완성 간행 됩니다.
조선 시대 붕당정치를 반영하고 있지만, 실록이 수정 편찬되었을 때 반대 정파에 의해 작성된 구 실록은 없애지 않고 그대로 두고
새로 수정된 실록을 만들었기에 후세 사람들은 조상들의 양쪽의 입장을 다 들여다볼 수 있어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5. 실록의 이모저모..
①세종대의 공법 여론조사
세종은 토지에 대한 세금 제도를 다룬 <공법(貢法)>을 제정할 때 도별 찬반 국민투표에 붙여 국민들의 의견을 묻습니다.
(찬성 98,657명, 반대 74,149명) 도별 찬반 현황 기록도 실록에 실려 있습니다.
②천재지변에 관한 기록
-홍수, 가뭄 피해, 전염병
1800여건의 지진에 관한 기록과 월성 원자력발전소(경주지진)
16세기 초에 조광조의 문집에도 당시 일어났던 지진에 대한 정황 설명이 실감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주지진 일어났을 때 실록에서 데이터를 뽑아냈는데 지진 안전지대라고 믿고 있는 우리 한반도에 조선시대만 해도 무려 1,800여 건의 지진이 있음이 밝혀집니다. 실록은 사초 이외에 날씨와 천문 기록을 다룬 관상감 등 시정기의 내용도 함께 실려 있기 때문에
과거의 과학현상에 대해서 이러한 인문학적 데이터를 활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1518년(중종 13) 5월 15일 지진 기록..
③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왕의 건강 (실제 실록을 찾아보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do
(1)영조 재위 52년, 83세 최장 건강왕의 비결
영조는 건강관리가 철저하였으며 내의원에서 한달에 11번 건강검진을 받았다는 기록도 나오며
66세 때 15세 정순왕후를 신부로 맞이하면서 영조는 머리가 다시 검어졌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또한 본인이 술을 싫어하여 금주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실제 초상화로 보건대 21살 연잉군시절 초상화와 영조 어진 비교해보면 호리한 체격의 날렵한 모습에 거의 변화가 없습니다.
영조실록 1750년(영조 26) 2월 10일의 기록-영조의 장수비결
"내가 일생토록 얇은 옷과 거친 음식을 먹기 때문에 자전께서는 늘 염려를 하셨고,
영빈(寧嬪)도 매양 경계하기를,
‘자봉(自奉)이 너무 박하니 늙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이라’고 하였지만,
나는 지금도 병이 없으니 옷과 먹는 것이 후하지 않았던 보람이다.
모든 사람의 근력은 순전히 잘 입고 잘 먹는 데서 소모되는 것이다.
듣자니, 사대부 집에서는 초피(貂皮)의 이불과 이름도 모를 반찬이 많다고 한다.
사치가 어찌 이토록 심하게 되었는가?"
(2)세종실록에 기록된 세종의 건강
세종이 1422년 태종 승하 후 졸곡을 지낸 후 계속 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되니 건강을 염려하여 올라온 글을 보면
세종은 평소 기름진 궁중음식에 고기 없으면 밥을 못 먹을 정도로 육식을 좋아하던 왕이셨던 것 같습니다.
-세종실록 1422년 (세종 4) 9월 21일의 기록
"졸곡(卒哭) 뒤에도 오히려 소선(素膳)을 하시어, 성체(聖體)가 파리하고 검게 되어,
여러 신하들이 바라보고 놀랍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또 전하께서 평일에 육식이 아니면 수라를 드시지 못하시는 터인데,
이제 소선(素膳)한 지도 이미 오래되어, 병환이 나실까 염려되나이다.
늘 앉아서 업무에 매진하시느라 운동 부족으로 당뇨와 부종을 앓고 눈도 잘 보이지 않으셨던 세종실록 기록을 보니 가슴 아픕니다.
-세종실록 1439년(세종 21) 6월 21일의 기록
내가 젊어서부터 한쪽 다리가 치우치게 아파서 10여 년에 이르러 조금 나았는데,
또 등에 부종(浮腫)으로 아픈 적이 오래다.
아플 때를 당하면 마음대로 돌아눕지도 못하여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없다. ..
또 소갈증(消渴症)이 있어 열 서너 해가 되었다...
④실록 자료의 문화콘텐츠 활용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 들어가면, 모두 완역되어 있는데, 먼저 1대 태조부터 25대 철종실록까지 궁금한 왕의 자료열람을 할 수 있고
다음은 26대 고종과 27대 순종대의 실록 기록을 세세하게 얼마든지 열람할 수 있습니다.
(1)태종실록의 코끼리 기록 -선린 외교 상징
태종실록 1411년(태종 11) 2월 22일
일본 국왕이 우리 나라에 없는 코끼리를 바치니 사복시에서 기르게 하다
태종실록 1413년(태종 13) 11월 5일
코끼리를 전라도 해도에 두도록 명하다
태종실록 1414년(태종 14) 5월 3일
순천부 장도에 방목 중인 길들인 코끼리를 육지로 내보내게 하다
조선왕조실록이 완역되어 누구나 볼 수 있게 되면서 <이산> <동이> <장희빈> <옥중화> <대장금> <별에서 온 그대><정도전><징비록>
<구르미 그린 달빛> 같은 Tv 드라마들과 <왕의 남자> <역린> <명량> <사도> 같은 다양한 영화들처럼, 실록에서 나오는 실제 역사기록을
바탕으로 작가가 맘껏 상상을 가미하여 가슴을 흔드는 퓨전 사극을 만들어 인기몰이를 하기도 합니다.
(2)중종실록의 '대장금' 기록
중종실록에는 장금이에 대한 기록이 13번이나 나오는데, 기록상으로는 실제 대장금은 드라마 <대장금>에 나오는 것 같은 궁중요리와는 무관한 의술이 뛰어난 의녀였습니다.
중종실록 1522년(중종 17) 9월 5일
대비전의 증세가 나아지자, 상이 약방(藥房)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의녀 신비(信非)와 장금(長今)에게는 각각 쌀·콩 각 10석씩을 주고.."
중종실록 1524년(중종 19) 12월 15일
다만 의녀 대장금(大長今)의 의술이 그 무리 중에서 조금 나으므로 바야흐로 대내(大內)에 출입하며 간병(看病)하니,
이 전체아를 대장금에게 주라.
(2)연산군일기의 '공길' 기록
영화 <왕의 남자>로 유명하였던 공길이는 연산군 시절 왕의 최측근 광대로서 연산군이 무척 총애하였던 배우였던 모양입니다.
연산군일기에 당찬 배우 공길이가 연산군에게 쓴소리 하고 유배당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연산군일기 1505년(연산군 11) 12월 29일
이보다 앞서 배우 공길(孔吉)이 늙은 선비 장난을 하며, 아뢰기를,
"전하는 요(堯)·순(舜) 같은 임금이요, 나는 고요(皐陶) 같은 신하입니다.
요·순은 어느 때나 있는 것이 아니나 고요는 항상 있는 것입니다."
하고, 또 《논어(論語)》를 외어 말하기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면 아무리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으랴."
하니, 왕은 그 말이 불경한 데 가깝다 하여 곤장을 쳐서 먼 곳으로 유배(流配)하였다.
박시백의 대하 역사만화 <조선왕조실록> 20권 역시 조선왕조실록을 모두 독파한 덕분에 이런 역작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6. 실록의 편찬과 점검
실록은 궤짝에 12~14권 보관하고 왕명 받은 사관만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실록의 궤짝 내용과 포쇄 과정은 앞서 1강에서 자세히 소개하였습니다.
<실록청의궤>..
실록 편찬의 전 과정을 완벽하게 정리한 것이 <실록청의궤>입니다.
이곳에는 실록 제작에 사용된 종이며 장황 등을 기록해두었기에 <실록청의궤> 덕분에 실록 복원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답니다.
<실록형지안>..
실록의 열람이나 이동사항에 대한 목적, 의식, 절차, 규정, 인원 등을 여러가지 사례별로 자세히 기록한 장서점검 증빙 기록부입니다.
이런한 <실록형지안><외규장각형지안>으로 1866년에 일어난 병인양요 때 불타고 약탈당한 의궤를 파악할 수 있었답니다.
7.실록의 의미..
조선 시대판 타임캡슐인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생활사의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철저한 기록문화의 정수인 조선왕조실록은 후대에까지 길이 보존하겠다는 일념으로 무척 소중히 여기고
기나긴 세월을 목숨처럼 지켜온 바, 덕분에 우리는 실록을 통해 각 시대의 정신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치에서의 공개성과 투명성..
사관이 왕의 행적을 얼마나 정확히 기록했는지 잘 보여주는 실록 한 구절..
태종실록 1404년(태종 4) 2월 8일..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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