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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의 기록, 미래를 준비하다 <마음은 항상 함께, 류성룡 류운룡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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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영미
댓글 0건 조회 904회 작성일 17-06-21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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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의 기록, 미래를 준비하다 <마음은 항상 함께, 류성룡 류운룡 형제>

구산동도서관마을에서 진행한 길 위의 인문학 두 번째 강의가 시작되었다. 오전 강의로 진행되어 어제보다 참석 인원은 적었지만, 한춘순 교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참석자들의 모습은 마치 학창시절 교실에 있는 듯 한 느낌이었다.

 

오늘 주제는 전란의 기록, 미래를 준비하다라는 내용으로 첫 강의에서도 언급되었던 서애 유성룡을 깊이 알게 된 시간이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적 자질이 뛰어났던 유성룡을 보고 퇴계 이황은 이 청년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유성룡의 형 유운룡도 학문에 전념하여 깊은 학식을 지녔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유성룡이 과거 급제 후 능력을 인정받고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나라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출세보다는 가문을 지키고 어머니께 효성을 다했다.

 

명종 대에 문정왕후에 의해 불교의 중흥을 꾀하면서 많은 예산이 쓰였고 결국 국고가 바닥 난 상태에서 치룬 임진왜란은 조선의 건국 최대의 위기였다. 당시, 불리해진 전세로 인해 선조가 명나라로 건너갈 생각까지 하게 된 상황에서 유성룡은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면 조선은 우리 땅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하면서 끝까지 조선을 지키기 위한 다양한 시도와 노력을 하였다. 바닥 난 국고로 인해 전쟁을 치르는 내내 조선은 군량미를 고민해야 했는데, 유성룡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강제적인 식량 차출이 아니라 부유한 중인들이 자원해서 군량미를 바치도록 하고 곡식을 낼 때는 수량에 따라 즉각 상을 주어 보상하도록 하는 모속과 실질적인 직책이 없는 관직(공명첩)을 팔아 조달했다. 또한 군제 개혁을 통해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도성 수비를 맡기고, 양인만 부담하던 군복무를 양반과 천민들에도 확대해 속오군을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인재를 보는 안목도 뛰어나서 육군으로 전쟁에 임했던 이순신을 수군으로 발탁하여 많은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하던 날 유승룡도 일본과의 화친을 주도했다는 누명을 씌운 북인 세력의 거센 탄핵으로 영의정에서 파직당하고 이후 조정에서 불러도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징비록>을 완성하였다.

 

'징비'시경(詩經)소비편(小毖篇)"예기징이비역환(豫其懲而毖役患)",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징비록의 첫 장에서 유성룡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비옥한 강토를 피폐하게 만든 참혹했던 전화를 회고하면서, 다시는 같은 전란을 겪지 않도록 지난날 있었던 조정의 여러 실책들을 반성하고 앞날을 대비하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유성룡이 임진왜란의 반성과 앞날에 대한 경계로 <징비록>을 남겼지만, 300 여년 후 조선은 다시 일본에 침략을 받고 국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강의를 마치는 순간, 역사는 오래된 미래다.” 라는 말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더불어 우리 선대에 이렇게 우리에게 경계했건만, 우리가 현재에도 자강(스스로를 지키다) 할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았던 강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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