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인문학 기행] 시로 풀어내는 남도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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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차창 밖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최순덕
9월 19일과 20일 해남군립도서관에서 ‘시로 풀어내는 남도정신’이라는 주제로 길 위의 인문학 수업을 듣고 21일 남도의 문학관 탐방을 함께 하기로 한 날이다. 전날 태풍 타파가 오고 있다는 소식에 예정에 없던 바닷일을 한 관계로 몸은 이미 천근만근, 아래로 가라앉는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일어나 나들이 채비를 하고 있는데 남편이 걱정 어린 시선으로 한마디 한다. 그러나 내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서랍에서 파스를 찾아 여기저기 붙여주고는 잘 다녀오란다. 몸은 정상이 아니지만 오랜만에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하다.
9시까지 만나기로 한 군청민원실 앞, 휴일도 마다하고 인문학기행을 함께하기 위하여 여러분이 이미 와 계셨다. 차에 올라 일정표를 보니 목포문학관, 국립해양유물전시관, 강진 영랑생가, 시문학파기념관, 땅끝순례문학관을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그렇잖아도 해양유물전시관에서 해남청자전시회를 한다기에 가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가게 되니 무척 기뻤다.
태풍의 여파인지 일행을 태운 차가 해남읍을 벗어나고 있을 즈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빗줄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굵어지고 있었다.
가을로 접어든 차창 밖 풍경은 눈이 시리게 아름다웠다. 길가 풀 섶의 익은 초록은 곱게 단장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들녘 벼들은 누렇게 변한 이삭을 떨구고 생의 마지막 안간힘으로 비와 바람에 맞서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영산강 하구를 지나 문학관에 도착하였다.
비가 오는 바람에 전체적인 건물의 외관을 자세히 보지 못하고 부랴부랴 안으로 들어서니 중앙 광장을 중심으로 1~2층 좌우로 나누어 1층엔 박화성, 차범석 2층엔 김현, 김우중 이렇게 네 분의 손때가 묻은 원고며 출판한 책 그리고 생활에 쓰였던 물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박화성은 4살 때 글을 깨우치고 11살 때 화성이라는 필명을 지어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10살 때는 고등과 3학년에 편입하고 월반을 거듭하여 12세 땐 여고를 졸업 그 이듬해엔 서울 숙명여고보를 졸업한 뒤 15살에 보통학교 교사를 할 정도로 천재였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자면 엄친아인 게 분명하다. 열여덟에 영광중학원으로 부임하고 독립운동가면서 시조시인이었던 조운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수업을 하게 되고,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문단 1월호에 ‘추석전야’가 발표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백화’가 동아일보에 연재되면서 여성이 쓴 최초의 장편소설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되었다. 신여성의 로망이던 양장을 입지 않고 80평생을 한복만을 고집하신 그 분의 고결한 뜻을 어찌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을지, 그분이 사용하였다는 생활도구들은 정갈하게 놓여 고스란히 세월의 흔적들을 기억하게 해 주었다. 박화성관을 둘러보면서 내내 마음 한 켠에 불편함을 느꼈는데 그것은 요즘에는 쓰지 않는 여류라는 낱말을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2층으로 오르니 김현의 전시관이다. 김현은 대학을 다닐 때 김승옥, 김치수와 만나고, 4.19에 참여한 것을 큰 자부심으로 느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황순원의 ‘인간접목’을 논한 ‘인간은 탄생하라’는 평론을 발표하면서 평론가로써의 꿈을 키워 나갔으며, 대학시절 ‘자유문학’에 문학평론 ‘나르시스의 시론-시와 악의 문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엄청난 독서량과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작품분석, 인문학 전반을 아우르는 드넓은 지적 관심, 그리고 명료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비평을 창작에 기생하는 장르가 아닌 독자적인 문학 장르로 끌어올린 최초의 비평가로 평가되고 있다.’ 라고 문학관 홍보지에서 김현을 소개하고 있다. 기행에 함께 해 주신 김경윤 선생님도 “김현은 전문가 그룹들만이 읽는 그런 평론을 쓴 게 아니고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한편의 문학작품 같은 평론으로 유명하신 분이다”며 독자층이 두터웠다고 말씀 하셨다. 전시실에서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은 바다 속을 연상시키는 듯한 ‘김현, 바다의 몸’이라는 공간이었다.
김우진관으로 이동하여 그의 사진을 보니 까칠한 귀공자 같은 인상을 풍기며 우리를 맞이한다. 김우진은 목포 최고 갑부의 아들로 살았지만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가정, 사회, 애정문제로 번민하다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과 현해탄에 투신하였다니 말이다.
김우진과 차범석은 같은 극작가 그룹이지만 김우진은 우리나라 연극에 근대극을 최초로 도입함과 동시에 그 당시 표현주의를 직접 작품으로 실험한 점에서 기성문단을 뛰어넘는 유일한 극작가였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차범석은 한국적 개성이 뚜렷한 사실주의 연극을 확립하는데 공헌한 극작가이자 연출가였다고 한다. 대표작은 tv로 방송하여 국민적 드라마로 자리매김한 ‘전원일기’와 소설 ‘산불’이 있다.
다음 장소로 이동 하려면 시간이 촉박하다는 인솔자의 말에 1층 광장으로 바삐 나와 기념사진을 찍고 곧바로 국립해양유물전시관으로 이동한다. 비가 오지 않음 걸어서 잠깐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차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정문으로 들어서니 한가운데 커다랗게 해남 녹청자 전시를 알리는 프랑이 정면으로 걸려있다. 비가오고 있었지만 간간히 관람객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흰 천으로 장막을 쳐놓은 곳으로 들어가니 해남 녹청자 전시관이 나왔다. 군산 십이동파선을 비롯하여 완도선, 태안마도1호선 등을 소개하고, 이 세척의 고려난파선에서 건져 올린 해남청자2,500여점을 선보이는 ‘고려남파선 해남청자를 품다’전이 열리고 있어 해남에 사는 우리들은 자부심 같은 특별한 마음이 들었다. 고려 시대 해남청자 운반선인 <군산 십이동파도선>을 수중 발굴 15년 만에 공개하는 전시로 1부 서남해 바닷길, 해남청자를 품은 고려남파선, 2부 해남청자의 바닷길 유통, 3부 고려의 소박한 그릇 해남청자, 4부 고려 사람들의 삶에 스며든 해남청자 등 4가지 주제로 전시가 이루어져 있었다.
소박한 멋의 녹갈색 그릇은 당시 고려에서 크게 유행하였으며 바닷길을 통해 각지의 소비처로 유통되었을 것이다. 해남 녹청자는 갈색의 투박한 빛과 녹색이 어우러져 볼수록 정감이 갔다. 특히 인상에 남는 것은 자기장구인데 저것이 소리를 낼 수 있을까 하는데 내 마음을 알았는지 해설사님께서 “전시실 행사가 있을 때 청자장구를 치는데 소리가 어찌나 청아하던지 천상의 소리인 듯하였다”는 말을 듣고 나도 언젠간 들어보리라 마음먹었다.
해남 녹청자를 보고 있자니 해남 산이, 황산의 도공들과 운반선의 선원들, 모두의 삶이 녹청자의 모양이나 색만큼 다양하게 어우러져 있음을 느꼈다.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점심을 먹기 위해 이동한다. 든든하게 배를 채운 일행은 다음 목적지 강진의 영랑생가로 향했다. 차를 타고 가는데 점심을 먹은 탓인지 나른히 졸음이 밀려온다. 꾸벅꾸벅 졸다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모란이 피기까지’의 유명세만큼이나 모란을 주제로 영랑생가 주변을 아름답게 꾸며 놓아 봄 모란이 필 때가 되면 적지 않는 탐방객이 찾아오는 명소란다.
차에서 내려 돌담에 감기어 있는 담쟁이 넝쿨이 운치를 자아내는 길을 따라 안마당에 들어서니, 마당 한 켠의 우물과 감나무, 은행나무가 초가와 어우러져 멋진 서정성을 띄며 탐방객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 주었다. 초가 마루에 앉으니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옛 추억을 되살아나게 한다. 동생과 함께 비오는 날 마루에 앉아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발등으로 튀기며 놀던 생각에 잠겨서 해설사님의 열띤 해설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딱 하나 귀를 번쩍 트이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 유명한 무용가 최승희와의 열애설이었다. 열렬한 사이였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결혼은 하지 못하였다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런저런 옛 생각에 잠기는 것도 잠시 일행은 시문학파 기념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시문학파 기념관은 1930년대 서정성을 띤 순수 문학을 지향했던 시인들을 기념하는 곳으로 특정문인이 아닌 유파 전체를 아우르는 기념관이라 한다. 전시실에는 영랑 김윤식을 비롯하여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 허보등 아홉 시인의 육필원고 및 유품, 저서, 1920~50년대 문예지 창간호 30여점, 1920~60년대 희귀도서 500여종 등이 전시 되어 있으며 시집 단행본 5천여권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 기념관을 만들기 위해 강진군에서 준비를 참 많이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씁쓸한 생각이 든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다음 탐방장소는 해남에 있는 땅끝순례문학관이다. 차를 타고 이동 중에 비바람도 거세지고 날도 일찍 저물 것을 우려해 땅끝순례문학관 탐방은 다음으로 미루자는 의견이 나왔다. 의견이 받아들여져 강진 시문학파 기념관을 끝으로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하였다.
며칠간의 노동에 치친 몸으로 나들이 한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는 그리 힘들지 않는 여정이었다. 노동과 놀이는 별개라 했던가 그 말을 실감하는 날이었다. 가을의 길목에서 잠깐의 일탈로 마음의 여유를 찾게 해준 해남군립도서관 관계자에게 감사한 마음 전한다.
최순덕
9월 19일과 20일 해남군립도서관에서 ‘시로 풀어내는 남도정신’이라는 주제로 길 위의 인문학 수업을 듣고 21일 남도의 문학관 탐방을 함께 하기로 한 날이다. 전날 태풍 타파가 오고 있다는 소식에 예정에 없던 바닷일을 한 관계로 몸은 이미 천근만근, 아래로 가라앉는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일어나 나들이 채비를 하고 있는데 남편이 걱정 어린 시선으로 한마디 한다. 그러나 내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서랍에서 파스를 찾아 여기저기 붙여주고는 잘 다녀오란다. 몸은 정상이 아니지만 오랜만에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하다.
9시까지 만나기로 한 군청민원실 앞, 휴일도 마다하고 인문학기행을 함께하기 위하여 여러분이 이미 와 계셨다. 차에 올라 일정표를 보니 목포문학관, 국립해양유물전시관, 강진 영랑생가, 시문학파기념관, 땅끝순례문학관을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그렇잖아도 해양유물전시관에서 해남청자전시회를 한다기에 가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가게 되니 무척 기뻤다.
태풍의 여파인지 일행을 태운 차가 해남읍을 벗어나고 있을 즈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빗줄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굵어지고 있었다.
가을로 접어든 차창 밖 풍경은 눈이 시리게 아름다웠다. 길가 풀 섶의 익은 초록은 곱게 단장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들녘 벼들은 누렇게 변한 이삭을 떨구고 생의 마지막 안간힘으로 비와 바람에 맞서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영산강 하구를 지나 문학관에 도착하였다.
비가 오는 바람에 전체적인 건물의 외관을 자세히 보지 못하고 부랴부랴 안으로 들어서니 중앙 광장을 중심으로 1~2층 좌우로 나누어 1층엔 박화성, 차범석 2층엔 김현, 김우중 이렇게 네 분의 손때가 묻은 원고며 출판한 책 그리고 생활에 쓰였던 물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박화성은 4살 때 글을 깨우치고 11살 때 화성이라는 필명을 지어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10살 때는 고등과 3학년에 편입하고 월반을 거듭하여 12세 땐 여고를 졸업 그 이듬해엔 서울 숙명여고보를 졸업한 뒤 15살에 보통학교 교사를 할 정도로 천재였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자면 엄친아인 게 분명하다. 열여덟에 영광중학원으로 부임하고 독립운동가면서 시조시인이었던 조운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수업을 하게 되고,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문단 1월호에 ‘추석전야’가 발표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백화’가 동아일보에 연재되면서 여성이 쓴 최초의 장편소설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되었다. 신여성의 로망이던 양장을 입지 않고 80평생을 한복만을 고집하신 그 분의 고결한 뜻을 어찌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을지, 그분이 사용하였다는 생활도구들은 정갈하게 놓여 고스란히 세월의 흔적들을 기억하게 해 주었다. 박화성관을 둘러보면서 내내 마음 한 켠에 불편함을 느꼈는데 그것은 요즘에는 쓰지 않는 여류라는 낱말을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2층으로 오르니 김현의 전시관이다. 김현은 대학을 다닐 때 김승옥, 김치수와 만나고, 4.19에 참여한 것을 큰 자부심으로 느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황순원의 ‘인간접목’을 논한 ‘인간은 탄생하라’는 평론을 발표하면서 평론가로써의 꿈을 키워 나갔으며, 대학시절 ‘자유문학’에 문학평론 ‘나르시스의 시론-시와 악의 문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엄청난 독서량과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작품분석, 인문학 전반을 아우르는 드넓은 지적 관심, 그리고 명료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비평을 창작에 기생하는 장르가 아닌 독자적인 문학 장르로 끌어올린 최초의 비평가로 평가되고 있다.’ 라고 문학관 홍보지에서 김현을 소개하고 있다. 기행에 함께 해 주신 김경윤 선생님도 “김현은 전문가 그룹들만이 읽는 그런 평론을 쓴 게 아니고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한편의 문학작품 같은 평론으로 유명하신 분이다”며 독자층이 두터웠다고 말씀 하셨다. 전시실에서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은 바다 속을 연상시키는 듯한 ‘김현, 바다의 몸’이라는 공간이었다.
김우진관으로 이동하여 그의 사진을 보니 까칠한 귀공자 같은 인상을 풍기며 우리를 맞이한다. 김우진은 목포 최고 갑부의 아들로 살았지만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가정, 사회, 애정문제로 번민하다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과 현해탄에 투신하였다니 말이다.
김우진과 차범석은 같은 극작가 그룹이지만 김우진은 우리나라 연극에 근대극을 최초로 도입함과 동시에 그 당시 표현주의를 직접 작품으로 실험한 점에서 기성문단을 뛰어넘는 유일한 극작가였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차범석은 한국적 개성이 뚜렷한 사실주의 연극을 확립하는데 공헌한 극작가이자 연출가였다고 한다. 대표작은 tv로 방송하여 국민적 드라마로 자리매김한 ‘전원일기’와 소설 ‘산불’이 있다.
다음 장소로 이동 하려면 시간이 촉박하다는 인솔자의 말에 1층 광장으로 바삐 나와 기념사진을 찍고 곧바로 국립해양유물전시관으로 이동한다. 비가 오지 않음 걸어서 잠깐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차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정문으로 들어서니 한가운데 커다랗게 해남 녹청자 전시를 알리는 프랑이 정면으로 걸려있다. 비가오고 있었지만 간간히 관람객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흰 천으로 장막을 쳐놓은 곳으로 들어가니 해남 녹청자 전시관이 나왔다. 군산 십이동파선을 비롯하여 완도선, 태안마도1호선 등을 소개하고, 이 세척의 고려난파선에서 건져 올린 해남청자2,500여점을 선보이는 ‘고려남파선 해남청자를 품다’전이 열리고 있어 해남에 사는 우리들은 자부심 같은 특별한 마음이 들었다. 고려 시대 해남청자 운반선인 <군산 십이동파도선>을 수중 발굴 15년 만에 공개하는 전시로 1부 서남해 바닷길, 해남청자를 품은 고려남파선, 2부 해남청자의 바닷길 유통, 3부 고려의 소박한 그릇 해남청자, 4부 고려 사람들의 삶에 스며든 해남청자 등 4가지 주제로 전시가 이루어져 있었다.
소박한 멋의 녹갈색 그릇은 당시 고려에서 크게 유행하였으며 바닷길을 통해 각지의 소비처로 유통되었을 것이다. 해남 녹청자는 갈색의 투박한 빛과 녹색이 어우러져 볼수록 정감이 갔다. 특히 인상에 남는 것은 자기장구인데 저것이 소리를 낼 수 있을까 하는데 내 마음을 알았는지 해설사님께서 “전시실 행사가 있을 때 청자장구를 치는데 소리가 어찌나 청아하던지 천상의 소리인 듯하였다”는 말을 듣고 나도 언젠간 들어보리라 마음먹었다.
해남 녹청자를 보고 있자니 해남 산이, 황산의 도공들과 운반선의 선원들, 모두의 삶이 녹청자의 모양이나 색만큼 다양하게 어우러져 있음을 느꼈다.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점심을 먹기 위해 이동한다. 든든하게 배를 채운 일행은 다음 목적지 강진의 영랑생가로 향했다. 차를 타고 가는데 점심을 먹은 탓인지 나른히 졸음이 밀려온다. 꾸벅꾸벅 졸다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모란이 피기까지’의 유명세만큼이나 모란을 주제로 영랑생가 주변을 아름답게 꾸며 놓아 봄 모란이 필 때가 되면 적지 않는 탐방객이 찾아오는 명소란다.
차에서 내려 돌담에 감기어 있는 담쟁이 넝쿨이 운치를 자아내는 길을 따라 안마당에 들어서니, 마당 한 켠의 우물과 감나무, 은행나무가 초가와 어우러져 멋진 서정성을 띄며 탐방객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 주었다. 초가 마루에 앉으니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옛 추억을 되살아나게 한다. 동생과 함께 비오는 날 마루에 앉아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발등으로 튀기며 놀던 생각에 잠겨서 해설사님의 열띤 해설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딱 하나 귀를 번쩍 트이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 유명한 무용가 최승희와의 열애설이었다. 열렬한 사이였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결혼은 하지 못하였다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런저런 옛 생각에 잠기는 것도 잠시 일행은 시문학파 기념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시문학파 기념관은 1930년대 서정성을 띤 순수 문학을 지향했던 시인들을 기념하는 곳으로 특정문인이 아닌 유파 전체를 아우르는 기념관이라 한다. 전시실에는 영랑 김윤식을 비롯하여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 허보등 아홉 시인의 육필원고 및 유품, 저서, 1920~50년대 문예지 창간호 30여점, 1920~60년대 희귀도서 500여종 등이 전시 되어 있으며 시집 단행본 5천여권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 기념관을 만들기 위해 강진군에서 준비를 참 많이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씁쓸한 생각이 든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다음 탐방장소는 해남에 있는 땅끝순례문학관이다. 차를 타고 이동 중에 비바람도 거세지고 날도 일찍 저물 것을 우려해 땅끝순례문학관 탐방은 다음으로 미루자는 의견이 나왔다. 의견이 받아들여져 강진 시문학파 기념관을 끝으로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하였다.
며칠간의 노동에 치친 몸으로 나들이 한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는 그리 힘들지 않는 여정이었다. 노동과 놀이는 별개라 했던가 그 말을 실감하는 날이었다. 가을의 길목에서 잠깐의 일탈로 마음의 여유를 찾게 해준 해남군립도서관 관계자에게 감사한 마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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