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꺾이지 않는 붓으로 근현대사 100년을 논하다] 탐방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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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자 정은혜님 탐방 후기입니다
정동입니까? 정동입니다.
“정동입니까?”
변경된 길 위의 인문학 탐방 장소를 듣자 실망감이 스쳤다. 낯선 장소에 들려 새로운 감상을 느끼기를 원했던 나에게 정동은 무척이나 익숙한 장소였다. 시청과 덕수궁, 그 앞을 오가며 숱하게 지나쳤던 그곳에서 새로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도 버스에 여럿이 올라타자 제법 소풍을 가는 느낌이 났다. 서울로 가는 길은 익숙했고, 서울 시내에 들어서자 보이는 아스팔트의 색과 건물의 색은 일정했지만 말이다.
우리가 처음으로 들린 곳은 구 러시아 공사관이었다. 서울에 살았을 때도 가본 적이 없던 곳이었는데 그럴만했다. 이곳은 일반적인 관광지로는 부적합했다. 을미사변으로 인해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한 ‘아관파천’의 그 역사적인 현장은 이미 폐허가 된지 오래였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지금은 모퉁이의 탑만이 외롭게 서있었다.
풀이 무성히 자라있는 넓은 터에 기형적으로 솟아있는 회백색의 탑은 스스로 국적을 밝히고 있는 듯했다. 르네상스풍으로 지었다고 설명을 했지만 이건 누가 뭐래도 러시아의 건물이었다. 많았던 친구들을 다 잃고도 홀로 남아있는 탑은 아직도 고향을 잊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폐허가 마음에 들었다. 자연이 진공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서울은 폐허를 허용하지 않는다.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언제나 넘쳐있는 듯한 서울에서 폐허를 발견하는 일은 즐겁다.
언덕길을 내려오면 이화여고가 보인다. 이곳 역시 가본 적이 없었다. 모교가 아닌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이상하게도 어색하다.
이곳에는 심슨기념관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의 건물 중 유일하게 남은 건축물이다. 홀로 남아있다는 점에서는 구 러시아 공사관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으나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러시아 공사관의 회백색 벽은 겨울을 떠오르게 했지만, 심슨기념관의 외벽은 붉은 빛의 벽돌로 지어져 가을의 정취와 잘 어울렸다.
다만, 실내는 조금 아쉬웠다. 전시공간은 너무나 현대적으로 세련되게 만들어져있었다. 폐허를 허용하지 않는 모습이 여기에도 적용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천장에는 수많은 조명들과 에어컨이 달려있어 관람에 도움을 주면서도 관람의 흥미를 떨어지게 했다.
교문 밖을 나서 잠시 걸어가면 중명전이 있다. 본래 황실 도서관으로 만들어졌지만 덕수궁에 불이 나면서 고종의 집무실인 편전이자 외국사절의 알현 실로 사용된 곳이다. 중명전은 구 러시아 공사관과 심슨기념관의 색을 섞은 것 같다. 붉은 벽돌 사이사이로 회백색의 돌들이 보인다. 함께 풍화되며 점점 닮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곳에서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슬픔을 뒤로 한 채 다시 조금 걷다 보면 마이크 모양 동상이 나온다. 작곡가 이영훈의 노래 비다. 이영훈은 작곡뿐만 아니라 작사에도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나 역시 좋아하는 노래가 많은데 그중 하나가 광화문연가다.
이제 모두 세월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에 아직 남아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5월의 꽃 향기가 가슴 깊이 그리워지면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언뜻 시처럼 읽히는 이 가사에는 정동길이 나온다. 노래비가 세워져있는 바로 그곳이다.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역시 아직 남아있는데 그곳이 정동제일교회다. 조그맣다고 해야 하는지에는 의문이 들지만 어쨌든 역사적인 의미를 간직한 곳이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에는 추모예배가 열리기도 했고, 3.1 운동 때에는 예배당 지하실에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몰래 만들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간 곳은 덕수궁이었다. 대한제국의 정궁으로 사용되었던 덕수궁이 다른 궁궐들과 다른 점은 서양식 건축물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는 석조전과 고요하게(靜) 내다보는(觀) 곳이라는 뜻의 정관헌 등이 서양식 건축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이 건물들이 그때의 나라보다 더 오래도록 남아있다.
뻔하기만 할 거라 생각했던 탐방은 충분히 많은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했던 정동. 모든 것은 아는 만큼 보인다. 나는 다르게 보인 정동을 사랑하기로 했다.
정동입니까? 정동입니다.
“정동입니까?”
변경된 길 위의 인문학 탐방 장소를 듣자 실망감이 스쳤다. 낯선 장소에 들려 새로운 감상을 느끼기를 원했던 나에게 정동은 무척이나 익숙한 장소였다. 시청과 덕수궁, 그 앞을 오가며 숱하게 지나쳤던 그곳에서 새로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도 버스에 여럿이 올라타자 제법 소풍을 가는 느낌이 났다. 서울로 가는 길은 익숙했고, 서울 시내에 들어서자 보이는 아스팔트의 색과 건물의 색은 일정했지만 말이다.
우리가 처음으로 들린 곳은 구 러시아 공사관이었다. 서울에 살았을 때도 가본 적이 없던 곳이었는데 그럴만했다. 이곳은 일반적인 관광지로는 부적합했다. 을미사변으로 인해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한 ‘아관파천’의 그 역사적인 현장은 이미 폐허가 된지 오래였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지금은 모퉁이의 탑만이 외롭게 서있었다.
풀이 무성히 자라있는 넓은 터에 기형적으로 솟아있는 회백색의 탑은 스스로 국적을 밝히고 있는 듯했다. 르네상스풍으로 지었다고 설명을 했지만 이건 누가 뭐래도 러시아의 건물이었다. 많았던 친구들을 다 잃고도 홀로 남아있는 탑은 아직도 고향을 잊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폐허가 마음에 들었다. 자연이 진공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서울은 폐허를 허용하지 않는다.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언제나 넘쳐있는 듯한 서울에서 폐허를 발견하는 일은 즐겁다.
언덕길을 내려오면 이화여고가 보인다. 이곳 역시 가본 적이 없었다. 모교가 아닌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이상하게도 어색하다.
이곳에는 심슨기념관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의 건물 중 유일하게 남은 건축물이다. 홀로 남아있다는 점에서는 구 러시아 공사관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으나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러시아 공사관의 회백색 벽은 겨울을 떠오르게 했지만, 심슨기념관의 외벽은 붉은 빛의 벽돌로 지어져 가을의 정취와 잘 어울렸다.
다만, 실내는 조금 아쉬웠다. 전시공간은 너무나 현대적으로 세련되게 만들어져있었다. 폐허를 허용하지 않는 모습이 여기에도 적용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천장에는 수많은 조명들과 에어컨이 달려있어 관람에 도움을 주면서도 관람의 흥미를 떨어지게 했다.
교문 밖을 나서 잠시 걸어가면 중명전이 있다. 본래 황실 도서관으로 만들어졌지만 덕수궁에 불이 나면서 고종의 집무실인 편전이자 외국사절의 알현 실로 사용된 곳이다. 중명전은 구 러시아 공사관과 심슨기념관의 색을 섞은 것 같다. 붉은 벽돌 사이사이로 회백색의 돌들이 보인다. 함께 풍화되며 점점 닮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곳에서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슬픔을 뒤로 한 채 다시 조금 걷다 보면 마이크 모양 동상이 나온다. 작곡가 이영훈의 노래 비다. 이영훈은 작곡뿐만 아니라 작사에도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나 역시 좋아하는 노래가 많은데 그중 하나가 광화문연가다.
이제 모두 세월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에 아직 남아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5월의 꽃 향기가 가슴 깊이 그리워지면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언뜻 시처럼 읽히는 이 가사에는 정동길이 나온다. 노래비가 세워져있는 바로 그곳이다.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역시 아직 남아있는데 그곳이 정동제일교회다. 조그맣다고 해야 하는지에는 의문이 들지만 어쨌든 역사적인 의미를 간직한 곳이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에는 추모예배가 열리기도 했고, 3.1 운동 때에는 예배당 지하실에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몰래 만들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간 곳은 덕수궁이었다. 대한제국의 정궁으로 사용되었던 덕수궁이 다른 궁궐들과 다른 점은 서양식 건축물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는 석조전과 고요하게(靜) 내다보는(觀) 곳이라는 뜻의 정관헌 등이 서양식 건축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이 건물들이 그때의 나라보다 더 오래도록 남아있다.
뻔하기만 할 거라 생각했던 탐방은 충분히 많은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했던 정동. 모든 것은 아는 만큼 보인다. 나는 다르게 보인 정동을 사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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