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꺽이지 않는 붓으로 근현대사 100년을 논하다] 탐방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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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자 이현경님의 탐방 후기입니다
처음부터 정동 길은 낯설었다. 실은 어색했다는 표현이 더 알맞다.
덕수궁과 돌담길, 시청을 수없이 다녔었지만 길 위의 인문학 탐방에서 다녀온 정동 길은 내게 전혀 다른 음식이고, 언어였다.
분명히 아는 맛인데 익숙하지 않았고, 혀에 감돌지 않는 말들이었다.
러시아 공사관 자리가 그 곳에 있었지만 나의 관심 밖에 머무른 그것은 그저 하얀 종탑에 불과했다. 그만큼 무지가 주는 충격은 의외의 빛깔로 나를 당황시켰다.
우리는 조선의 마지막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첫 임금인 고종의 자취를 시작으로 인문학 탐방을 떠났다. 한 나라의 국부에 앞서 자신의 궁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연약한 인간이자 슬픈 지아비였던 비운의 고종이 대한제국 개국에 있어 처음이니 마지막이니 하는 역사적 논란을 뒤로 한다고 해도 아관파천이 근대혁명의 발상이라는 점은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의 묘가 있던 한성 외곽 조용한 동네였던 정릉동이 여러 나라 공사관의 각축장이 된 것을 시작으로 변혁의 바람은 시작된 듯하다.
위기는 종종 새로운 시작을 불러온다. 여러 나라의 공사관이 생기면서 눈동자가 파란 외국인들의 출몰에 조선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당장 조선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공사관 관리들과 그의 가족들, 함께 온 선교사들의 생존 선택지는 교육이었다. 두 번째 탐방지인 ‘이화학당’에서 우리는 조선의 침입자요, 거만한 이방인이었던 그들도 결국에는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나약한 인간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행보가 가져다 준 의외의 산물은 우리나라 근대 교육의 출발이 될 수 있었고, 우리의 거국적인 독립운동인 3.1 운동의 시발점이 되는 방아쇠 역할처럼 느껴졌다.
우리의 마지막 여정은 정동제일교회였다. 그곳의 탐방은 수 천 년 한반도에 뿌리내리고 있던 불교와 유교에 비할 수 없게 조선에 전파된 역사가 가장 짧은 기독교가 어떻게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는 평등의식이 타락하고 부패한 신분제도 해방의 꿈과 맞닿아 있었고, 서양 문물 교육의 중심에 있던 기독교는 자유를 꿈꾸는 조선의 독립운동과 끝까지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시대의 알고리즘이었다.
이번 탐방을 통해 깨달은 것은 시대라는 거친 물살에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작고 보잘것없지만 그것 하나가 가져오는 시대적 나비효과는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을 만큼 엄청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나라의 임금과 타국의 이방인, 이름없는 민초. 치열하고 혼란스러운 조선의 마지막 나라에서 각자의 이름으로 살아남았던 고달픈 흔적들이 지금도 고스란히 가슴에 남아있다.
역사는 기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보려고 상상하는 데 교훈이 있다고 한다. 지금도 한없이 흘러가는 역사의 바다를 그저 눈과 머리로만 인식할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하고 동참하는 진정한 역사 시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처음부터 정동 길은 낯설었다. 실은 어색했다는 표현이 더 알맞다.
덕수궁과 돌담길, 시청을 수없이 다녔었지만 길 위의 인문학 탐방에서 다녀온 정동 길은 내게 전혀 다른 음식이고, 언어였다.
분명히 아는 맛인데 익숙하지 않았고, 혀에 감돌지 않는 말들이었다.
러시아 공사관 자리가 그 곳에 있었지만 나의 관심 밖에 머무른 그것은 그저 하얀 종탑에 불과했다. 그만큼 무지가 주는 충격은 의외의 빛깔로 나를 당황시켰다.
우리는 조선의 마지막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첫 임금인 고종의 자취를 시작으로 인문학 탐방을 떠났다. 한 나라의 국부에 앞서 자신의 궁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연약한 인간이자 슬픈 지아비였던 비운의 고종이 대한제국 개국에 있어 처음이니 마지막이니 하는 역사적 논란을 뒤로 한다고 해도 아관파천이 근대혁명의 발상이라는 점은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의 묘가 있던 한성 외곽 조용한 동네였던 정릉동이 여러 나라 공사관의 각축장이 된 것을 시작으로 변혁의 바람은 시작된 듯하다.
위기는 종종 새로운 시작을 불러온다. 여러 나라의 공사관이 생기면서 눈동자가 파란 외국인들의 출몰에 조선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당장 조선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공사관 관리들과 그의 가족들, 함께 온 선교사들의 생존 선택지는 교육이었다. 두 번째 탐방지인 ‘이화학당’에서 우리는 조선의 침입자요, 거만한 이방인이었던 그들도 결국에는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나약한 인간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행보가 가져다 준 의외의 산물은 우리나라 근대 교육의 출발이 될 수 있었고, 우리의 거국적인 독립운동인 3.1 운동의 시발점이 되는 방아쇠 역할처럼 느껴졌다.
우리의 마지막 여정은 정동제일교회였다. 그곳의 탐방은 수 천 년 한반도에 뿌리내리고 있던 불교와 유교에 비할 수 없게 조선에 전파된 역사가 가장 짧은 기독교가 어떻게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는 평등의식이 타락하고 부패한 신분제도 해방의 꿈과 맞닿아 있었고, 서양 문물 교육의 중심에 있던 기독교는 자유를 꿈꾸는 조선의 독립운동과 끝까지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시대의 알고리즘이었다.
이번 탐방을 통해 깨달은 것은 시대라는 거친 물살에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작고 보잘것없지만 그것 하나가 가져오는 시대적 나비효과는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을 만큼 엄청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나라의 임금과 타국의 이방인, 이름없는 민초. 치열하고 혼란스러운 조선의 마지막 나라에서 각자의 이름으로 살아남았던 고달픈 흔적들이 지금도 고스란히 가슴에 남아있다.
역사는 기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보려고 상상하는 데 교훈이 있다고 한다. 지금도 한없이 흘러가는 역사의 바다를 그저 눈과 머리로만 인식할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하고 동참하는 진정한 역사 시민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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