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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와 전북(전주시립삼천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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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995회 작성일 14-10-11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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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와 전북(전주시립삼천도서관)

전주시 완산구 삼천도서관 주최 길 위의 인문학강좌 태조 이성계와 전북이라는 주제로 2014.6.26.일 전주남원임실전주 오목대 탐방을 했다. 울긋불긋 차려입은 옷을 보니 마치 어린이들 소풍 가는 것처럼 마음조차 들떴다. 출발시각이 되어가니 약 40명이 버스에 올랐다. 그중에 KBS 1TV 봉효진 아나운서와 취재진이 동석했다. 맛있는 간식도 줘서 탐방 길이 더욱 즐거웠다. 취재진은 땀을 흘리며 앞장서 촬영하느라고 수고도 많았으니 전주를 알리는 훌륭한 방송이 되었으면 좋겠다. 전주문화원 사무국장 김진돈 강사의 구수한 입담으로 버스 속 강의가 있었다. 남원시 운봉읍 여원치를 지날 무렵, 고려 후기 우왕 1380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장 아지발도가 어느 여인의 젖가슴을 만지자 그 여인은 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했다. 이성계가 왜군을 무찌르기 위해 여원치를 지날 때 안갯속에서 그 여인의 원혼(冤魂)인지 아니면 어떤 노파가 나타났다. 노파는

고남산에서 7일간 제사를 지내고 전쟁을 해라

했다. 제사를 지내는 동안 철저한 계획으로 전쟁준비를 하였다. 출전하는 날 유엽전 화살로 100보 떨어진 곳에 투구를 놓고 3발을 쏘았는데 모두 적중하였다. 또한, 미꾸라지 움직임을 보고 바람을 불 것을 예상했다. 달이 밝아오자 황산에 세찬 바람이 불어 나무 사이로 아지발도 얼굴이 환하게 보였다. 이성계는 의형제 이지란과 아지발도를 집중 공격하여 이성계가 적장의 투구를 쏘자 이지란은 화살을 그의 입에 쏘았다. 아지발도가 죽자 왜군은 5천여 명중 겨우 70~80명만 남았다. 인월면 인월리 2-5 냇가는 피비린내로 1주일간 물을 먹지 못했다고 한다. 달리는 도로 옆 냇가를 지나고 있을 때 작은 운동장 크기만 한 피바위가 보였다. 공부할 때 많이 궁금했는데 직접 보게 되어 궁금증이 풀렸다. 운봉읍 화수마을에 하차하니 봉우리가 높은 황산이 보였다. 참혹한 전쟁의 상처는 아물고 울창한 숲으로 싸여 우리를 반겨주었다. 황산대첩비를 보러 가는 중에 운봉읍 화수리에서 국창 박초월 생가를 덤으로 볼 수 있었다. 옛 황산대첩비(파비각)를 보니 글자를 파내고 갈아내고 폭파까지 시켜 3조각으로 나누어졌다. 주변에 있는 어휘각도 삼지창으로 찍어 구멍이 나고 글씨도 쪼아놓았다. 전쟁은 이렇듯 사람이나 자연까지도 잔인하게 곤혹을 치렀다.

마음이 산산이 조각난 것처럼 아프다. 어렵게 지켜낸 내 나라가 더욱 소중하고 잘 지켜야 한다는 산 교육이 되었다. 어느덧 점심때가 되어서 인근 인월요업황토옹기한식뷔페에 들려 지리산 토속 음식으로 싱싱한 나물들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고귀한 몸값을 한다는 인월 감자가 나왔다. 주변 감자밭을 보니 수확을 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 시장에서는 인월 감자라고 속여 비싼 가격에 팔기도 한다는 주위분의 얘기다. 감자는 눈송이를 뭉쳐 놓은 것 처럼 하얀분을 듬뿍 칠하고 있었다. ‘인월감자를 언제 또 맛볼까하고 3개나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옆 건물에 인월 도자기 박물관을 견학했다. 가지가지 종류의 도자기가 즐비하다. 커다란 항아리를 살짝 튀겨보니 기타 줄을 튕기는 소리가 났다. 그중에 인상에 남는 것은 도자기 정수기 1크기에 아랫부분에 수도꼭지가 달려있었다. 성능이 좋은지 인월 도자기는 전국에 비싼 가격으로 팔린다고 한다. 점심을 마치고 임실 성수산 상이암을 들렸다. 이성계가 비를 피하여 들어간 굴이 무학대사가 불공을 드리고 있었다. 불공을 마치고 무학대사는 임실 성수산 도선암으로 안내하고 이곳에서 이성계가 기도하는 중

성수만세

소리를 세 번 들었다며 무학대사에게 하니 대사는

장차 이 나라의 임금일 될 것이라며 넙죽 업드려 몰라봐서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이성계는 이때부터 무학대사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운봉 황산전투에서 승리를 얻고 여세를 몰아 전주 오목대에서, 이승길이 벌린 잔치에 대풍가를 부르며 왕의 꿈을 펼치고 마침내 조선왕조(朝鮮王朝) 건국의 기반을 다졌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뒤에 상이암으로 와서 삼청동(三淸洞)이라는 어필을 남겼다. 그 후 성수산을 팔공산 도선암을 상이암(上耳庵)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러하듯 전주는 조선건국의 산실임을 깊이 인식하고, 널리 알리고 더욱 발전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탐방은 자긍심을 높여주는 알찬 하루였다.

(2014. 7.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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