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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비친 '울진의 인문학' 을 다녀와서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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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울진민들레
댓글 0건 조회 677회 작성일 19-04-18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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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비친 '울진의 인문학' 죽변면 도서관 지역인문학 을 다녀와서  후기

냉이꽃


 대풍헌 앞마당에는
 까닭 없이
 냉이 꽃이 하얗게 피었다.
계절 없이 살다 간
 그리움이
 봄은 아니지만
 봄은 아니지만
 이 땅 위에 세워진
 이유를 가만히
 내게 남긴다.
줄기마다 하트를 만들어
 멀리서 아득하게
 그대들이 우리에게 남긴 꽃
 내 몸을 숙여 지금
 그대에게 간다.

한줄의 시로 시작해 보는 이번 강의와 탐방 이야기(울진문화원원장 김성준 선생님과 함께한 시간)

1강 울진의 봉수대 이야기( (2018년 10월05일. 금요일 저녁 7시 30분)

봉수대란 지금의 우정국과 전화국 역할을 했다.
외부로부터 침략이 있을 경우 신속히 본진과 중앙에 알리는 군사 통신 시설이다.
밤에는 불빛으로 낮에는 연기를 올려 지방과 지방을 연결해 중앙으로 신호를 했다.
봉수대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봉수대가 사라진지는 불과200년이 안되었다.
사라진 이유는 연료문제가 가장 큰 이유다.
연료로는 야생동물 똥 분뇨를 이용했는데 여우 똥이 연기가 퍼지지 않고 좋다고 한다.
여우 똥은 연기가 한곳으로 쭉 올라가고 옆으로 퍼지지 않아서 야생동물로는 적합했다.
그 외에는 소똥 말똥을 말려서 사용했는데, 야생동물들도 점차 사라지고 연료를 수입해서 사용했지만 그것조차 구하기 힘들었다.

울진에는 봉수대가 7개 있다.

1. 나곡봉수대(향출도산 봉수대): 나곡휴게소 건너편(향출도산 꼭대기)에 있다.
2. 죽변 봉수대(죽변곶 봉수대):(죽변농협뒷편 해군부대 옆) 시민닭갈비 뒤쪽 골목길을 지나 오른쪽 끝에 있다.
3. 죽진산봉수대:울진 대나리에 있다.
4. 전반인산 봉수대:근남망양정 해수욕장 부근 산에 있다.
5. 사동산 봉수대: 기성면 사동에 있는데 원형에 가깝게 남아있다.
6. 표산봉수대:기성공항 비행장 옆에 있다.
7. 후포 후리산봉수대:후포 등기산 에 있다
 울진의 전 세대가 우리에게 남겨준 유물인 봉수대는 울진에 오래 살았지만 모르고 살았다.
누구한사람 이야기 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이렇게 중요한 문화재가 5분 거리에 버젓이 세워져 있는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 생활해 왔다.
홍보하는 곳도 보지 못했으며 팻말이 붙어 있는 것도 보지 못했다.
역사나 문화에 관심은 많은 나로서는 안타가운 현실이다.
직접 강의를 듣고 그 유물을 알고 나서 그곳에 가서 보고 느낀 점은 보물 같은 유물이 그냥 버려져 있는 느낌이다.
누구하나 돌보지 않고 잡풀이 무성한 바닷가 귀퉁이에 길이 험해서 들어가기도 힘든 곳에 옛 선인들의 귀중한 발명품이 흔적들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후세 인 우리들은 그것들을 등한시 하고 돌보지 않고 그냥 사라지게 보고만 있는 실정이다.
안타깝고 선인들의 지혜가 그냥 없어지는 것 같아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시간이 지나면 복구하려야 할 수 없는 유물이고 보물이다.
무엇보다 현재 울진을 소중히 여기고 가꾸고 성장 시키는 것에 힘쓰는 것도 좋지만 옛 유물과 보물을 소중히 여겨 오래오래 보존하고 지키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고 유보하지 말아야 한다.


2강 울진의 산성 이야기( (2018년 10월12일. 금요일 저녁 7시 30분)

임진왜란은 7년 정도 전쟁을 치렀지만 우리나라 곳곳을 침입해 그야말로 초토화 된 전쟁이다.
물론 울진도 벗어날 수 없었고 의병과 마을 주민들도 함께 전쟁을 치러야 했다.

울진에는 산성이 2개 있는데 산성이란 왜구의 침임을 막아 울진을 지키는 역할을 했다.
울진은 바닷가와 북쪽에서 내려오는 침입자들로부터 울진을 지켰다.

1.포진성(울진 근남 사이에 위치): 삼척에서 어느 날 태풍에 날려 작은 산이 하나 있다가 지금은 없어졌다.
2.고산성(울진읍 학마을 위치)
임진왜란 때 울진읍이 살아남기 위해 울진을 지켜준 고산성은 지금도 그 자리에서 성의 위엄을 지키듯 웅장함이 감돈다.
둥그렇게 쳐진 산성의 터는 깊이깊이 그 얼을 세워 묵념을 하기에 합당하다.

고산성은 예전부터 내려오는 이야기가 여러 개 있다.
울진사람들의 항복은 끝끝내 하지 않았고 왜구들은 갖은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1. 왜구가 쳐들어와 다들 숨어 있을 때 왜구들에게 지혜로운 노파는 구만리 천고 개를 가야 한다고 속인다.
그래서 겨우 살아남았지만 지구전에 이어진 식량부족과 일본 놈들의 잔머리와 풍족한 식량으로 하여 ( 불고기 파티와 젊은 아가씨 들을 춤을 추게 해) 정신을 홀려 울진을 지키는 북문공격 고산성이 함락되었다.
일본은 총칼로 우리를 위협해서 몽땅 죽임을 당한다.
그래서 지금도 ‘구마이’‘나이많은 노파라는 뜻의 ’골패목‘ 천리를 가야 한다하여 ’천고개‘라는 지명이 그 동네 그대로 남아서 지금도 그렇게 불리고 있다.

2. 무기조차 없던 우리 들은 화살이 다였고 그야말로 피바다가 되어 바위가 빨개지고 계곡이 빨갛게 물들어 지금도 그곳을 ‘핏곡’이라 부른다.

3. 오랫동안 숨어 있는 우리들을 일본군은 예쁜 아가씨 들을 춤을 추게 해 울진을 지키던 남자들을 유혹하고 총살시킨 일 그들의 만행을 오래오래 후세에 알려야 한다. 아직도 동네이름이 ‘무월동’이라 지금도 호월리 가면 그이름 그대로 불리고 있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아픈 역사가 있는 지명)

유비무환 (有備無患)을 못해서 아니면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그런가?
그동안 왜구의 침임이 정묘호란, 병자호란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등 수도 없이 많은 전쟁을 수대에 걸쳐 치르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우리 국민은 아직까지도 일본을 우습게 여기고 있다.
우습게 여기되 안팎으로 탄탄히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해서 일어나지 않도록 국력을 굳굳히 쌓아야 한다.


3강 조선시대 역 , 원 (2018년 10월13일. 토요일 저녁 7시 30분)

역,원의 역할은 중요한 문서를 전달하기 위해 지금의 기차와 대중교통 역할이나 우편이나 메일 역할을 했다.
역은 국가가 주체가 되어 운영되었으며 원은 민간인 지역주민이 주체가 되어 보수도 없이 일을 하였다.

울진에는 5개의 역과 7개의 원이 있었다.

1.흥부역(부구나곡)
2.수산역(근남 수산 다리 입구)
3.덕신역(덕신휴계소 부근)
4.달효역(월송 초등학교 앞)
5.조서역(서면 광비 부근)

중간 중간 원이 있었고 항시 말과 잠잘 수 있는 방과 밥이 준비되어 있었다.
원은 자금이 원활하게 돌지 않아 주민들이 일반인들에게 숙박업소나 음식을 팔아서 그 이익으로 원을 꾸려 나갔다.
‘역과 원’ 역시 역사의 한 부분으로 지금 그것들을 잘 살려 관광단지로 조성하고 또한 역사보존차원에서 관리와 보존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나의 큰 바람이자 미래의 자산이 반드시 될 것이다.


4강 울진의 항일운동( (2018년 10월19일. 금요일 저녁 7시 30분)

울진은 항구로 둘러 있어서 죽변항 일대에는 일본왜구가 여러 번 쳐들어 왔다.
임진왜란 이전에도 이후에도 우리나라는 침입을 많이 받아서 물론 울진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울진에도 의병 활동이 있었고 독립운동과 민족의식이 투철한 지역이었다.

울진에 만흥학교가 있어서 겉으로는 신학문을 가르치고 속으로는 민족의식을 심어준 학교이다.
위치는 ‘매화의 제동중학교’ 학생들은62명 정도였고 그때 졸업하고 폐교되었다.
1911년에 폐교되었지만, 만흥학교는 3~4년 정도 지속적으로 운동을 했다.

기미년 4월11일 매화 장에서 1일을 시작으로 부구 흥부만세 운동은 2박3일 밤잠을 죽이며 농성하고 의병활동을 한 결과 지금의 우리는 평화를 유지하며 여유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기독교인 주축으로 만세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는데 울진에서는 의병활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그리하여 울진 장에서 하려던 의병활동은 끝내 하지 못했다.
악랄하고 지독한 일본사람들의 감시가 우리와는 사뭇 달라 보이는 정신이다.
활동하는 사람들을 잡아가 고문과 고초를 주니 견디지 못해 ‘울진 장날’운동한다는 것은 불었기 때문에 발각 되었다.
어느 누구도 견디지 못했을 정도로 고문을 늦추지 않음이 분명하다.
우리의 과거가 이토록 처절 했건만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지금 현재 나는 어떤 민족정신을 마음에 담아두고 새겨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서대문 형무소도 가족들과 오래전에 다녀왔지만 아직까지 그곳에서 죽은 유관순 열사의 좁디좁은 칸막이의 교도소를 잊지 않고 있다.


탐방 (2018년10월 20일 토요일 오전 9시~오후5시)

죽변 봉수대를 둘러보며 다시 한 번 문화유산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을 만큼 민족정신이 새록새록 생겨났다.
벌레들이 들 끊고 잡풀들이 무성한 그곳은 오열해야만 할 만큼 그 흔적이 조금씩 사라짐을 보았다.

고산성으로 이동하여 산성과 산성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머리가 숙연해 짐은 나뿐이 아니었다.
고산성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 줄로 그곳을 단정 짓기에는 역부족이다.

오후에는 역시 걷기 좋은 행곡 주천 대를 가서 주천대의 경치를 보며 주천 대에 얽힌 이야기를 풀었다.
주천 대는 천냥 암 이라는 암자가 하나 있었는데 하늘에서 바위의 작은 구멍으로 쌀이 내려와 쌀구 자 를 써서 살구가 한자로 풀어서 일본군들이 살구행자를 써서 행곡 이라 이름을 바꾸어 놓았다.

행곡이 쌀구, 살구, 행곡 이렇게 변형 되었다.
그곳은 경치가 좋기로 유명해 김시습, 임유후 오도일 같은 문인들이 술을 마시며 놀았다 하여 원래이름은 수천 대 이었는데 술주자를 넣어 주천대로 하자 하여 주천 대라고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다음 코스로는~ 대풍헌
 대풍헌은 그래도 울진에서 좀 알려진 곳이라 잘 정리되어 있었고 넓은 마당과 문화유적을 보러 오는 사람들도 이제는 꽤 많이 있어 단정하고 아담하게 보존하고 있어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대풍헌이 울릉도 독도를 연결해 주는 사슬이 되었고 지금 울진에서 울릉도 독도를 향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되어 주어 무엇보다 고맙게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매화 만세 공원으로 가서 ‘체험 활동’을 했다.

기념으로 만든 매화 만세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외치고‘흰 한복을 차려입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삼창을 불렀다.
3.1운동 하면 책에서 배운바 되로 유관순 열사가 생각난다.
유관순 열사는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어린나이에 학교와 교회 지방을 다니며 운동했고 결국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옥고를 치르며 견디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돌아가셨다.
누구나 다 아는 내용이지만 울진에도 많은 사람들이 일제치하의 만세운동을 했고 장날과 교회를 돌며 지역운동의 영혼을 불태웠다.
그 이름들은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하며 많은 홍보로 후세를 위해 알려야 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유관순 열사도 존경스럽지만 울진에 살면서 울진 열사 이름도 모른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김구 선생 밑에 들어간 주진수, 한만영, 근남행곡 분이신 장식 전병권 전도사, 등 애국 열사들의 이름과 독도를 지키다 일본에 붙들려간 ‘안용복’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
그 외 에도 많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싶다.
강의와 탐방을 위해 애써주신 죽변면도서관 관계자 선생님들과 함께 한 모두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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