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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선생유적지와 경복궁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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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엄애자
댓글 0건 조회 1,204회 작성일 14-07-22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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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선생유적지와 경복궁 답사

황희 선생 유적지와 경복궁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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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동면 유동2리 엄애자

 

도서관에 나와 책을 빌려 보고 인문학 강의도 기회가 되면 나름 열심히 들으며 보낸 시간이 벌써 한손으로는 꼽지 못할 만큼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세월이 가기는 흐르는 물 같고…’ 하는 민요 가사도 있지만 정말 ‘아니 벌써!’ 다. 콩나물은 물만 주어도 자라서 살이 찐다는 데 내 경우엔? 글쎄 도서관에 나오면서 도서관 에 나오면서 조금은 유식해졌을까? 아니면 품성이 좀 더 순화 되었을까?

 

지난 6월 18일 수요일에 공공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1차 유적지 답사를 다녀왔다. 방촌 황희 선생 유적지와 우리나라 대궐의 정궁인 경복궁을 다녀왔는데 사실 경복궁은 몇 번 가 본 적이 있었으나 황희 선생 유적지는 처음이었고 황희 선생의 호가 방촌이라는 것도 이제야 알았다.

먼저 들린 황희 선생 유적지는 아담한 크기에 한가해서 좋았고 날씨는 마냥 화창 했다. 많지 않은 유물이지만 깨끗하게 전시되어 있고 벽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일화들이 써져 있어 열렬하게 이것저것 설명하던 해설사의 설명이 잠간 필요이상의 장광설로 느껴지기도 했는데 답사에 참석한 대개가 노안이 온 세대이니 눈 찌푸려 가며 안내문을 읽지 않고도 씌어 진 내용을 알 수 있고 이곳저곳 괜한 헛걸음을 안 해도 되니 나름 해설사의 존재가 필요 하구나 마음을 고쳐먹었다.

황희 정승이라면 대개의 사람들이 그 후덕한 인품을 느끼게 하는 일화를 한두 가지는 다 알고 있을 것 이라고 생각되는, 그야말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 하면 생각나는 인물이 아니던가. 아무튼 영의정 하면 난 황희 정승과 오리 이원익 대감이 떠오른다. 단 벌 옷을 빨았다가 급히 입궐 하느라 솜을 걸치고 가서 모피 옷을 입었다는 오해를 샀던 얘기를 들었기에 청빈하게 살았구나 생각은 했었는데 그 이력을 듣고 보니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상식에도 못 미친다는 것을 알았다.

한 때 그 아들들과 사위가 부정에 연루된 얘기를 읽었기에 사실 마음 한구석엔 청백리로 추앙 받는다는 사실이 좀 과한 칭송은 아닐까 하는 게 있었다. 그러나 요즘 우리로 치면 철없는 애들인 14살에 비록 조상님 덕인 음직이어도 벼슬길로 나갔으니 비범한 자질이 있었음이 분명할 터인데다 20대에 과거에 급제를 했으니 실력은 인증이 된 것이겠고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도 했었으니 고려에 충성도 바친 바가 되겠다. 사실 충이라는 명분으로 두문동에서 일생을 보내지 않은 점이 개인을 위해서도 나라를 위해서도 그야말로 탁월한 선택을 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종의 말도 저 종의 말도 부인의 말씀도 다 옳다고 해서 상대방의 시비를 차단한 일화로 무골호인이라 생각했고 그야말로 팔자가 좋아서 관직에 오래 있었고 90세란 드믄 수를 누렸다고 가볍게 생각하기엔 조선조 관직에 나가서의 행보가 존경스러운 점이 많았다으니까.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을 훌쩍 넘어 거의 20년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천한사람들의 형편을 살폈으니 분명 온후하고 청렴한 좋은 재상님이셨으리라. 문득 당신이 세자가 되는 걸 반대한 황희 정승을 기용한 세종대왕을 생각 했고 중국의 환공과 관중의 일화를 떠 올려 봤다. 앞으로는 황희 정승을 재미있는 일화만 많이 남긴 인물로만이 아닌 그 이력에 걸맞는 존경심으로 떠 올리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좀 이르다 싶은 점심을 먹고 경복궁으로.

맑은 날씨가 때 이른 더위를 느끼게 했고 나이 때문엔가 좀 피곤하기도 해서 이번에는 얌전히 해설사를 기다려서 궁궐 답사.

대체 유적지에 해설사들이 언제부터 생겼던가? 생활 한복 유니폼을 예쁘게 입은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경복궁을 돌면서 귀로 듣는 게 눈으로 보는 것보다 머릿속에 정리가 잘 된다는 걸 느꼈는데 나 만 그랬을까?

귀로 설명을 들으며 눈으로는 설명하는 실물을 보고 있으니 기본적인 시청각 병행학습이 되어서이리라.

입구에서 해설사를 기다리며 서 있었을 때 문득 앞에 중국인 관광객을 위한 듯한 깃발(배너라고 하던가?) 이 서 있는 걸 봤는 데 얼핏 ‘손안에 들어오는 경복궁 운운…’ 이라 써진 것 같아서 혼자 웃었다. 잠간 하다 만 초급 중국어를 좀 잘 배워 두었더라면 하는 후회도 부끄러운 웃음을 짓게 했지만 이곳에 오는 중국인 관광객들이라면 자금성을 구경한 사람들이 거의 다일텐데 자금성과 우리 경복궁이 그 규모에서 비교가 되겠는가 싶어서였다. 나 역시 자금성은 아프던 다리와 금색 녹색이 어지럽던 전각들과 문들 부딪치던 사람들… ,그저 ‘많고 넓고’ 만 기억에 남는데.

해설사의 안내로 임금님이 정사를 보시던 근정전, 8명의 늙은 상궁들의 불침번속에 주무셨다는 강녕전 왕비님이 거처하시던 교태전 과 동궁이 거처 하던 곳을 지나 침전의 굴뚝까지 보고 지금 봐도 멋진 경회루와 아담하니 예쁜 향원정 들을 돌고 경복궁 답사는 마쳤는데 뭣 때문엔가 가슴이 좀 답답했다. 왜지? ‛소박하지만 초라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하지 않고…’ 라는 선비정신에 딱 맞는 우리의 궁전을 보고 났는데 말이다.

삼봉 정도전이 이곳 전각에 이런 저런 이름을 붙이던 처음은 얼마나 참신하고 좋았을 텐데 세월이 가면서 왜 화재며 병란이며 철거를 당하며 옛 모습이 인멸되는 수모에다 터가 길하지 못하다는 얘기까지 나오게 흉한 역사가 그리 많았던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었으리라.

언젠가 강도를 당한 사람의 후일담을 전해 들으며 그 비분해하고 자괴감에 치를 떨더란 얘기에 공감을 했던 적이 있다.

결국은 이 경복이란 좋은 이름을 가진 궁궐도 강도를 당한 것이 아닌가. 이미 지난 일을 바꿀 수는 없지만(그 사실을 잊지는 않아야지?) 그럼 앞으로는? 우리 모두는 앞으로의 지표가 확립되어 있는 걸까?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라고? 소 잃고도 외양간 안 고치는 ×뱃장을 고쳐야지. 하긴 나부터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하루 또 하루를 허비하지 말아야 하는 건데. 병을 이기려면 내 몸의 저항력을 키워야 하듯 강도를 이기려면 내 힘을 키우고 잃어버린 자존감을 키워야겠지.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하며 살아가야 할 텐데 마음과 달리 몸은 이미 저세상 문 앞에 줄 서 있게 된 것이 너무 아쉽다.

2014.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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