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시립도서관-길위의인문학 1차-맥국 천년고도, 봄내 고을의 인문학적 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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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국 천년고도, 봄내 고을의 인문학적 비의
-2014 원주시립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1차 탐방후기-
원주시 태장1동 신 성기
지난해 실시한 길 위의 인문학은 원주에서 20년 이상 살아 온 나에게 강원 도민으로서 인문적 상상력을 함양하는데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고향은 홍천이지만 1970년대 초반 강원일보에 연재된 태백의 읍면 등 강원문화를 소개한 기획물은 중학생의 나이에 강원도민의 긍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연재된 신문을 모으고 총서로 발간된 책을 헌책방을 통하여 구입하고 몇 년 전에는 수정 보완하여 발간된 강원문화총서를 구입하기도 했다.
신문에 홍인희 교수님의 인문학도서 “우리 산하에 인문학을 입히다” 발간 소식을 접하고 책을 구입하였고 치악산시민대학 강의에서 홍 교수님을 뵙고 3차에 걸쳐 인문학 강좌에 참가하여 강의 후 현장탐방을 통하여 인문적 상상력이 풍부해졌다. 탐방 후 인문학도서 2권도 구입하여 지난겨울에 다 읽은 후 후속 발간된 공동 저서도 읽었다.
올해도 길 위의 인문학 강좌가 시행된다고 하여 매우 기뻤다.
1. 조용히 살고파라 강촌에 살고 싶네
첫 탐방지는 강촌이었다. 어렸을 때 누구의 노래인지도 모르고 일부만 흥얼거리던 노래 가사, 김소월의 시처럼 이름 모를 강가의 마을인줄 알았다. 홍교수님의 저서를 통하여 춘천의 강촌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춘천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대학 1학년 때 구곡폭포를 가는 중에 처음 강촌에 왔었고 몇 년 전 문배마을을 가면서 지나쳤지만 승용차를 운전하여 노래비를 발견하지 못했다. 홍교수님의 저서에서 구곡폭포와 문배마을에 대해 읽었지만 금세 잊어버리고 탐방 해설을 통하여 ‘九曲’이 아닌 ‘臼谷폭포’, 문배마을의 지명 유래를 알게 되었다.
홍교수님의 탐방 해설을 들으며 강촌 어귀에 11톤짜리 돌에 노래비를 제작하여 알리고 있으나 노래 유래를 검은색 돌에 새겨 관광객의 관심을 끌기 어려워 춘천사람들 조차도 사연과 유래에 대해 아는 이가 적다는데 공감하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2. 청풍 부원군 묘역
강촌을 떠나 도착한 곳은 서면 안보리에 위치한 청풍부원군 묘소였다. 청풍부원군 김우명은 대동법을 실시한 김육의 아들로 형은 김좌명이다. 형의 이름과 합치면 좌우명이 된다. 김우명은 숙종의 외조부이며 김유정의 9대조다. 대학 강의에서 최승순 교수님으로부터 들은 일화가 새롭게 다가왔다. 외손자 숙종이 하사한 장지를 향해 시신을 실은 배가 한강을 거슬러 오르던 중 갑자기 배가 멈추고 돌풍이 일어 날아간 만장이 떨어진 자리에 조성된 명당. 강원도 내에 있는 왕릉 이외의 묘지에는 담장이 없는데, 이 묘소는 담장이 있는 것이 특색이다. 봉분 앞에는 외손인 19대 숙종의 친필로 쓴 묘비가 있다. 묘비 위에 어필이라 쓰여 있으며 비문도 일반비와 달리 격을 높이기 위하여 좌에서 우로 쓰여 있다. 비문도 화강암이어선지 마모의 흔적이 없어 300여 년이 지난 비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김유정의 고조부가 실레마을로 이주해 태어난 김유정. 아기장수 설화와 유사한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는 1930년대 암울하던 시절에 혜성같이 나타나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걸출한 소설가요, 보배 같은 존재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3. 오백년 치세를 살려낸 장절공의 거룩한 죽음
현암리에서 막국수를 맛있게 먹고 향한 곳은 장절공 묘소였다.
나는 장절공의 33세손이다. 대학에 입학하여 4월 어느 날 학교 게시판에 평산 신 씨 장절공 묘소 춘향제 학생봉사 안내문을 보고 선배들과 서면 장절공 묘소에 갔다. 제향에 먼 곳에서 오신 어르신들께 식사를 대접하였다. 이후 매년 봄과 가을 졸업할 때까지 봉사활동을 했다. 80년에는 묘역 조성사업에 참여하여 제물을 묘소까지 운반하고 신철균 국회의원께 기념식수 삽을 드리기도 했다. 졸업을 앞두고 종중회로부터 기념품을 받기도 했다. 그 후 자동차를 구입한 97년 가을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묘소를 참배했다. 운전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도로 옆에는 보호난간도 없어 앞만 보며 운전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옆에 앉은 아내와 뒤에 계신 어머니가 호수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고 감탄을 연발한다. 묘소 기슭에서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를 업고 봉분 앞까지 올라갔다. 몇 년 전 지인들과 들르기도 했다. 대구 지묘동에도 들러 장절공의 순절 현장을 찾기도 하여 홍교수님의 해설이 다른 누구보다도 친숙하게 다가왔다. 도서관에서 준비한 제주와 간략한 제물을 진설하고 동본인 도서관 직원과 왕 씨 손인 탐방객과 함께 참배했다. 도서관과 홍교수님의 배려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장절공의 평산 본관 유래에 대해 교수님의 해설을 들으며 어린 시절 아버지께 들은 이야기도 새록새록 기억이 났다.
장절공의 일기삼묘의 해설이 끝나자 교수님이 평산 신 씨 둘을 불러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잠시 후 장절공의 머리를 금관으로 대체하여 후손들의 눈동자가 노랗다고 하여 모두가 한바탕 웃었다. 장절공의 충절과 기지가 없었다면 500여년 고려 역사는 없었을 것이라는 말을 생각하며 묘소에서 내려올 때 여러 사람이 묘소가 경관이 좋은 곳이라고 감탄하는 말을 들으니 장절공의 후손으로서 다시 한 번 긍지를 느꼈다. 학교 다닐 때 대학 건물 옥상에 올라가 서쪽을 바라보면 장절공의 묘소가 눈 안에 들어오곤 했다.
대구 지묘동에 다녀온 후 강원문화관광해설사 사이트에 지묘동 장절공 사적을 소개하며 박사마을이 금산리에 위치하여 장절공의 기운을 다소 받았을 것이라고 글을 올려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교수님의 지리적 조건과 서원의 역할 등이 일조했을 것이라는 견해에 공감한다.
묘소를 떠나 강원에니고 왼편에 조성된 박사마을 선양탑을 보니 1963년부터 50년 동안 138명의 박사가 배출되었다니 한해에 3명 정도가 1800 세대 4000명에 불과한 마을이면 줄잡아 15가구마다 박사가 한명씩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러한 사실이 자연스럽게 구전되면서 영특한 아이를 갖고자 신혼부부들이 찾는 등 유명세를 타고 있다니 요즘말로 대박!
4. 춘기 계심 순절지분비
박사마을에서 신매대교를 건너 봉의산으로 향했다. 30년 전 육림공원이 육림랜드로 이름이 바뀌었다. 소양강 다리 건너 소양강 처녀상이 눈에 들어왔다. 고기들 때문인지 소양강 처녀가 임부로 변했다는 교수님의 말씀에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다리를 건너 봉의산 기슭에 차를 주차시키고 느티나무 그늘아래에서 교수님의 춘기 계심과 소양정에 대한 해설을 들었다. 더위를 피해 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들도 열심히 들으셨다. 산기슭에서 계단을 잠시 오르다 보니 ‘춘기계심순절지분’이라 쓰인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계심의 무덤으로 생각했는데 강가에 접해있던 것이 도로 개설로 인해 사라졌다고 하니 수백 년 간 춘천 여인의 송죽 같은 절개를 상징해온 사적을 부실한 관리와 문화에 대한 무관심이 매우 안타까웠다. 당시의 순찰사가 열녀 정문을 세우고 당대 대과에 장원급제한 박종정이 묘비의 글을 짓고 제반 비용을 감영에서 지출하였다니 신분의 차이가 엄중하던 시절, 사대부들이 인간 취급조차 하지 않던 일개 기생을 위해 뜻을 모은다는 것은 참으로 파격적인 일이다.
계심을 향한 숭절의 마음이 소양문화제의 전신인 개나리축제 때 화류계 여인들이 계심을 기리는 등불 행진까지 하였다 하니, 이들의 굴곡진 삶의 애환과 정한을 몸으로 표현한 것이었으리라.
계심의 이야기는 20세기 초 이인직의 신소설 귀의 성의 소재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계심의 서글픈 죽음이 모티브가 되었다.
영월에는 월기 경춘 순절지처, 춘천에는 춘기 계심 순절지분. 지금까지 춘향의 절개에 묻혀 있던 강원도의 절개를 이번 탐방을 통해 널리 알려야겠다.
5. 소양정
계심의 무덤비를 뒤로 하고 다리에 힘을 주고 오르니 소양정이 나타난다. 삼국시대에 세운 것으로, 처음에는 이요루라고 부르던 것을 조선 순종 때 부사 윤왕국이 소양정이라 고쳐 불렀다 한다. 원래는 지금보다 아래쪽인 소양강 남안에 있었다. 조선 선조 38년(1605) 홍수로 없어진 것을 광해군 2년(1610) 부사 윤희당이 다시 짓고, 인조 25년(1647)에는 부사 엄황이 고쳐 짓는 등 여러 차례 고쳐지었으며, 지금 있는 건물은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66년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교수님이 질문을 하셨다. 소양정에서 특이한 점이 무엇이냐고. 한 탐방객이 답하였다. 보통 정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하나인데 소양정은 정자 좌우에 계단이 있다. 왜 계단이 둘일까? 답하는 사람이 없자 논어에 인자요산 지자요수에서 한쪽은 산을 즐기는 자가 다른 쪽은 물을 즐기는 자가 오른다고 했다. 자신이 어진 자라 여겨지면 오른쪽으로 지혜로운 자로 생각되면 왼쪽으로 오르라 하였다. 나는 많은 사람이 몰려 혼잡한 오른쪽을 피하여 왼쪽으로 먼저 올랐다. 내가 정말 지혜로운 자일까?
소양정에서 내려와 운곡 선생이 쓴 춘주 소양정을 읽었다. 운곡 선생의 시를 통해 1368년 소양정에 오른 자취를 보니 600년 전 소양정의 고색창연함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6. 김유정문학촌
다섯 시 40분경 김유정문학촌에 도착했다. 세 번째 방문인데 지난번에는 휴관이라 밖에서 사진만 찍었고 첫 방문 때 전상국 교수님을 만나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오늘은 폐관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서둘러 시설물을 보며 기념사진을 찍고 기념관 안에서는 스캔하듯 대강 보고 마지막으로 차에 올랐다. 이십년 전 백일장 참가학생들을 인솔하여 산국농장에서 전상국 교수님과 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던 생각을 떠올리며 아쉬움을 달랬다.
다음에 시간을 내어 탐방에 관심이 있는 지인들과 오늘 시간이 없어 가지 못한 덕두원 석파령, 학교 다닐 때 자주 갔던 공지천, 남면 발산리 윤희순여사의 시가를 방문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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