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도서관 - 윤동주 문학 여행 참여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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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종로도서관과 함께하는 "하늘과 바람과 별이 있는 윤동주 문학여행" 참여 후기)
지천명을 훌쩍 넘겨 은퇴를 코앞에 둔 나이에 문득 다가운 문학에의 열정.
종로도서관 홈피를 클릭했을 때 반짝 떠오른 팝업이 저의 열정을 북돋워 주었지요.
“하늘과 바람과 별이 있는 윤동주 문학여행”
미처 별을 다 세지 못하고 28살의 젊은 나이에 소천한 비운의 시인 윤동주는 저의 문학청년 시절을 수놓아 주었답니다.
첫날(7월 25일, 금요일), ‘윤동주의 시와 삶’에 대한 강의에서 그동안 놓쳐버린 소중한 정보와 지식을 접하고 무척 고무되었습니다. 1917년 태어났으니까 지금 살아계셨으면 만 97세가 되겠군요. 십여 년 전에 돌아가신 서정주 시인보다 2년 후배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의외롭습니다. 독립운동 근거지인 중국 길림성에서 태어난 탓에 사촌 송몽규 등 독립운동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저항의식이 싹텄나 봅니다. 연희전문 유학시절이던 1941년에 종로구 누상동에서 약 4개월간 하숙한 적이 있는데, ‘별 헤는 밤’, ‘자화상’, ‘쉽게 씌어진 시’ 등 주옥 같은 시는 이 하숙기간 동안 대부분 씌어졌다네요. 아마 서촌과 인왕산의 맑은 기운이 윤동주 시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는가 봅니다. 그런데 1941년말, 연희전문 졸업할 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시집을 내려고 했으나 좌절되었다네요. 1941년 4월, 일제의 우리말 사용 완전 금지조치 때문이겠지요. 평소 독립의식이 충만하였으니, 우리말로 시집을 낼 수 없었던 시인의 그 참담한 심정을 어찌 헤아려 볼 수 있겠습니까. 지금 공개되고 있는 시집은 시인의 사망 후인 1948년에 후배 정병욱 교수가 대신 출간한 것이라고 합니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쉽게 씌어진 시’ 중에서). 저항 경향의 시를 쓴 탓이었을까요. 시인은 일본 유학시절 독립운동 모의죄로 체포되어 2년간 옥살이 중, 해방을 앞 둔 1945년 2월에 28살의 젊은 나이로 의문사하였으니, 언제나 맑은 영혼으로 자기 성찰의 시를 추구하던 시인의 시어들이 새삼 아프게 다가옵니다.
둘째 날(7월 26일, 토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윤동주 시인의 흔적이 묻어있는 서촌을 탐방하는 날입니다. 시인에 대한 오밀조밀한 이야기와 서촌 전문가이드의 안내가 있다는 좋은 기회 때문일까요. 세찬 비가 날리는데도 30여명의 적지 않은 탐방꾼이 모였습니다. 저는 시인의 흔적과 더불어 옛 흔적을 아스라이 간직하고 있는 서촌을 꼭 둘러보고 싶었습니다. 동네에서 6년 동안 살고 있는데도 옛날 중인들과 에술가들이 살아 숨쉬었다는 경복궁의 서쪽, 서촌을 몰랐거든요.
경복궁역에서 출발. 3번 출구와 2번 출구 사이의 건널목은 과거에 금천교 다리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건널목 밑에 청계천 상류 물줄기가 흐른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영추문 돌담길을 따라 올라가 ‘가을을 맞이하는 문’, ‘서쪽문은 영원한 출구’ 등 영추문의 의미를 되새기고 길을 건너니 보안여관이 우리를 맞이한다. 보안여관은 지금으로부터 80여년된 역사적 여관인데 염상섭 등 옛날 문인들이 장기 숙박하면서 문학을 얘기하고 문예지를 구상하던 곳이란다. 지금은 갤러리로 변모했지만 지푸라기와 흙을 버무려 세운 벽과 지붕 위의 나무 뼈대가 옛 모습을 고스란히 반추하고 있다.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수차례 보수공사를 하여 말끔해진 영추문과 허물어진 모습을 자연미로 간직하고 있는 보안여관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묘한 대조를 이룬다. 여관 아래 좁은 골목에 들어가니 좌우로 즐비해 있는 한옥이 서촌 특유의 향수를 뿜어내고 있다. 골목을 빠져나와 또 다른 맞은편 골목에 들어가니 조선 명필 추사 김정희의 집터가 나오고, 그 집터 중앙에 600여년 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백송 둥치가 우리를 맞이한다. 지금은 고사한 상태지만 그 언저리에 어미 백송에게서 비롯된 새끼 백송 몇 그루가 긴 세월을 이어가고 있다.
백송을 뒤로하고 우리은행 효자동지점 뒷골목에 접어드니 ‘이상의 집’이 길섶에 서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시인 이상의 본가가 아니고, 시인이 양자로 들어가 성장한 큰아버지의 집이라고 한다. 시인은 1910년에 태어났으니 윤동주 시인보다 7살 선배. 그러니까 동 시대에 같은 동네에서 살았으니 서촌 골목에서 어떤 교감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이상의 집’ 맞은편 골목에 들어서니 누하동 225번지의 나무대문을 앞세운 한옥이 나타난다. ‘사슴의 시인’이라 불리우는 노천명 시인의 집. 예쁘고 여린 마음의 여류시인이었으나 대동아 전쟁을 찬양하는 친일 작품을 쓴 탓이었을까. 평생 독신으로 조용히 살다가 이 집에서 생을 마감하였단다. 친일 노 시인은 1912년생으로 천경자 화가와 친했다고는 한다. 그러나 1917년생의 저항시인 윤동주와는 같은 동네에서 어떤 교감을 가졌을지 궁금하기만 하다.
노천명 시인집에서 나와 차도를 건너 좁은 골목에 들어서니 한국산수화의 대가 이상범 화가의 생가와 화실이 나온다. 지금은 화가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마당 한켠 담장에 새겨진 희미한 모습의 꽃벽화는 지금도 화가의 삶을 화려하게 발산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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