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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기행을 마치고(수원선경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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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형하
댓글 0건 조회 902회 작성일 14-10-19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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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기행을 마치고(수원선경도서관)

{길위의 인문학} 안동기행을 마치고

 

오늘은 수원에 있는 선경도서관이 기획한 길 위의 인문학 세 번째 탐방일이다. 탐방장소는 경북 안동이다. 길 위의 인문학 컨셉에 어울리는 장소선정이 딱이다. 아침 640분까지 집결이다. 전날 밤에 내일아침 비 예보가 있으므로 우산을 준비하라는 선경도서관 담당자의 문자를 받았다. 친절하고 자상한 안내가 내가 뭔가 대우받고 있다는 느낌이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으로 비약한다. 아침에 일어나 밖을 보니 마른 번개와 천둥이 요란하다. 집을 나서니 비가 쏟아진다. 억수다. “포기할까라는 생각이 든다. 집결지에 도착하니 보슬비로 가늘어 졌다. 현명한 선택이었음에 대한 안도가 나를 위로한다.

 

탐방의 해설은 지난 여주의 문학 탐방 때 수고해 주신 음식문화학교 김학민 교장선생님이 다. 버스 안에서 퀴즈쇼로 분위기를 띄우신다. 퀴즈는 안동하면 떠오르는 것이다. 하회탈춤, 안동포, 안동소주, 간고등어, 한우 등 다양한 답변이 나온다. 가장 먼저 나와야 하는 답변이 안나왔다고 하신다. 안동김씨 란다. 본인이 펴낸 책으로 포상까지 하신다.

조선후기의 세도정치는 안동에 사는 김씨가 아니었다고 하신다. 한양의 장동에 사는 안동김씨였다고 하신다. 조선시대에 영의정(대략 300명이 못된다고 함)중에서 영남출신은 노수신, 유성룡, 체제공 세 사람뿐이란다. 영남의 선비는 권력보다는 학문에 뜻을 둔 사림이 주류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시다. 안동의 하회별신굿탈춤은 탈이 갖는 은폐성, 상징성, 표현성을 빌어서 피압제자들이 압제자에 대한 불만과 비판의 표출이다. 탈춤의 3요소는 서민, 양반, 스님이다. 관객이나 악공은 공연의 제3자가 아니라 극중 현실에 개입하는 또 다른 배우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탈춤은 지배층이 내세우는 도덕의 추악함과 비리를 풍자와 해학으로 서민들의 응어리를 대변한 것이라는 버스안 강의이다.

 

버스는 영동고속도로를 지나 중앙고속도로에 접어든다. 이 길은 승용차로는 많이 다녔지만 버스는 처음이다.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연신 감탄이다. 아침에 뿌린 비로 구름과 안개가 산허리에 걸쳐져 있다. 그 사이로 보였다가 사라지는 가을 산과 스카이라인의 신비는 동양화의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선계를 달리고 있다. 내가 신선이다. 두고 온 세사는 멀고 아득하여 떠오르지 않았다.

 

선계에서 노니는 나를 하계에 추방한 것은 옥연정사의 주차장이다. 버스에서 내리니 내가 엘도라도에 서 있는 것 같다. 지평선 멀리까지 황금의 바다가 펼쳐져 있다. 10월의 들녘이다. 모든 인간은 황금을 갈구한다. 그 황금을 다툼없고 공평하게 소유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시각적 소유이다. 신의 공평함에 경외심이 우러난다. 너무 바라보면 눈이 멀 것 같아 시선을 돌린다. 눈이 멀면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마비된 이성은 세상을 뒤흔든다. 세상을 뒤흔든 세월호다.

 

옥연정사는 서애선생이 은퇴 후에 저술하신 징비록의 산실이다. 주변에는 솔숲이 잘 조성되어 있다. 한적하고 은일한 느낌이 온다. 고아한 풍취에 마음이 경건해진다.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징비록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의미란다. 그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을 이어받지 못하고 300년 후에 당하였으니.... 다시한번 미리 징계해 보아야겠다.

뒷산이 부용대다. 부용대에 오르니 가슴이 탁 트이며 건너편 하회마을이 보인다. 연꽃형태의 마을을 볼 수 있는 곳이라서 부용대라 한다. 낙동강 자락이 마을을 휘돌아 나가서 하회(河回 : 물이 돌아가는곳)란다. 기와집은 중심에, 초가집은 외곽에 있는 것이 보인다. 신분의 차이였음을 나타낸다. 부용대 정상의 오른쪽에 겸암정사가 있다. 서애선생의 형 유운룡이 공부하던 곳이다. 두 형제가 우애를 쌓고 학문과 덕성 그리고 호연지기를 길렀던 곳이다.

 

해설사 선생님의 안배로 부용대의 정상에서 국악을 들었다. 남자는 용인대 국악과에 재학중이고 여자는 졸업생이란다. 여자는 춘향가중에서 수심가와 경기민요 아리랑을, 남자는 가곡을 부르는데 국악가수를 뺨친다. 이 두 분의 출연으로 길위의 인문학 분위기는 더욱 달아 올랐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부르는 노래를 가곡이라 한단다. 처음 배웠다.

 

부용대를 뒤로 두고 병산서원으로 향했다. 일견하여 서원의 건물배치와 다듬어진 정원수, 앞산의 어우러짐이 그림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조선시대 5대서원의 하나이다. 서원은 강학건물(복례문, 만대루, 입교당, 명성재, 경의재, 장판각), 제향건물(존덕사, 신문, 전사청), 부속건물(주소, 광영지 등)을 두루 갖춘 한국 서원건축의 백미란다. 입교당 앞에서 만대루 기둥사이로 보이는 병산은 마치 7폭 병풍을 보는 듯한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일행중 한 분이 만대루 올라가는 계단을 보고 진짜 통나무일까요? 묻는다. 살펴보니 통나무다. 탄성이 절로 난다.

 

병산서원에서 하회마을까지 거리는 4kM이다. 비포장의 한적한 길이다. 제법 운치가 있다. 등에서 땀도 난다. 길 위에 도토리가 떨어져 지천으로 널려있다. 나도 줍고 너도 줍고 줍는다. 도토리는 다람쥐와 청솔모 등 야생동물의 겨울양식이다. 다람쥐가 물어다 땅속에 저장해 놓고 잊어 버리면 싹을 틔운단다. 헌신공양으로 종족을 번식하는 자연의 섭리에서 내손에 있다고 모두가 내 것이 아니니 베풀어야겠다.”는 삶의 지혜를 깨닫는다.


하회마을은 주민들이 거주하는 것 같지 않다. 기념품가게와 막걸리집을 제외하고 대분분의 집들이 고요하다. 관광객들만 부산하다. 삼신당의 나무에는 소원성취를 비는 수백만 개의 종이가 붙어있다, 이곳에서 인간의 나약한 심리를 본다. 영의정까지 지낸 서애선생의 충효당이 형의 집인 양진당보다 여러 면에서 미치지 못한다. “조선시대 양반가의 장자는 부모를 모시고 가문을 지켰다. 벼슬에 나간 사람들은 차자들이다.” 라는 해설사 선생님의 말씀이다. 왜 집의 규모에 차이가 있는지 이해가 된다.

 

탐방을 마치고 차에 오른다. 배우고, 느끼고, 깨달음이 많은 2014년 가을의 하루였다. 36명의 탐방단원의 얼굴에도 만족감이 충만해 보인다. 길 위의 인문학은 지역민들의 잠재해 있는 감성을 일깨운다. 너와 나의 감성이 깨어난다면 국민정서의 순화로 이어진다. 순화된 국민정서는 사회를 건강하게 한다. 건강한 사회는 천문학적인 사회적비용 지출을 줄인다. 국력 신장의 통로이다. 길 위의 인문학에 참여만으로도 국력신장에 일조한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서투른 글이지만 내가 기행후기를 써야 하는 이유이다. 이번 행사를 기획하신 수원선경도서관 관계자분들과 강의해 주신 음식문화학교 김학민 교장선생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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