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탐방 이야기(전주시립삼천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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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인문학
-조선왕조실록 탐방 이야기-
進鳳 송일섭
“천년전주,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주제의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행사에 참가하였다. 전주 역사박물관 이동희 관장님께서 해설을 하셨다. 먼저 전주사고를 찾았다. 이른 아침인데 많은 관광객들이 경기전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뜰을 거닐고 있었다. 전주사고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역사 고증을 통해, 1991년 복원된 건물이다. 방 하나 크기의 전주 사고에 들어가 봤다. 깨끗하게 진열된 조선왕조실록 몇 점이 있었다. 이곳의 실록은 복제품이란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도록 하기 위해, 왕의 언행을 낱낱이 기록하여 후세에 남겼다고 하니 얼마나 지혜로운 일인가.
이곳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을 맞아 손홍록, 안의, 오희길 선비에 의해 내장산 용굴암으로 이안 되었다. 실록과 태조 어진을 말의 등에 싣고 허둥지둥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선조들의 발자취를, 버스를 타고 편한 마음으로 여행길에 오른 것이다.
먼저 임진왜란 때 조선왕조실록을 수호한 안의와 손홍록의 위패를 모신 남천사藍川祠를 찾아 나섰다. 사당은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844에 있었다. 시산리는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조용하고 아담한 시골마을이었다. 오가는 사람도 없었는데 마을의 노부부가 길가에 앉아 있었다. 40여 명의 탐방객이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을 아무 말도 없이 물끄러미 쳐다보고 계셨다. 10년 전만 해도 마을 사람들조차 무슨 건물인지 몰랐다고 하니 우리 문화의 현실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하다. 남천사에 도착했을 때 왠지 가슴이 저며오는 듯 했다. 노구의 몸으로 실록과 태조 어진을 내장산 깊은 산골짜기에 숨기고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백성이 아닌가. 건물 외벽은 법당처럼 깔끔하게 잘 단장되어 있었으나, 내부는 위패만 덩그러니 놓여있어 관리가 소홀한 느낌을 받았다. 뒷마당 모퉁이에 비석이 외롭게 세워져있었다. 우리 일행은 선비들을 위한 묵념을 하고, 나라의 운명이 꺼져가던 그 시절, 아픈 이야기를 나누며 자리를 떴다.
다음 행선지인 무성서원武城書院을 찾았다. 마을 골목을 따라 걸었다. 집집마다 대추나무 열매가 무성하게 열려 담을 넘어 길가에까지 가지가 휘어져 있었다. 시골 마을이지만 멋진 정원이 있는 집들도 눈에 띄었다. 무성서원은 최치원을 모신 서원으로 대원군 때 전북에서 유일하게 철폐되지 않은 전북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이다. 임금이 9천 평의 땅을 내려 주었다 하여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고도 한단다. 이곳은 도서관 기능이며 교육기관이고 사당이었다 한다. 금기 사항으로 여자들의 접근을 막았다고 하니, 양성평등 세상인 지금의 눈으로 보면 황당할 뿐이다. 교육의 목적은 공자 사상을 배우고 과거 급제를 하며, 인격완성단계를 거쳐 사후 사당에 이름이 올라가는 것이 라 했다. 봄에 제사를 지내는데 음식을 생으로 올리는 것이 특징이란다. 최치원의 고향은 경주다. 그는 신라 말기의 문인이며, 유학자이다. 경주 최 씨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다. 최치원은 태인의 태수太守였으며 가야산 해인사에서 사망했다. 상춘곡을 지어 유명한 정극인도 모셔져 있는데, 처가가 태인 이어서 이곳에 우거하게 되었다 한다. 정극인은 경기도 광주 두모포리 가 고향이다. 무성서원 역사 해설사 깨서는 기타를 치며 정읍사를 노래하여 우리를 기쁘게 해주셨다. 한복을 입은 양반집 자손들이 공부에 매진했을 서원을, 두루두루 둘러보고 내장산으로 이동했다.
내장산에 이르니 아직 단풍철이 아니어서 한산하였다. 셔틀버스 기사가 졸고 있다가 우리를 기쁘게 맞이해 주셨다. 산은 온통 녹색으로 상큼하고 아름다운 가을 햇살 아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용굴암으로 향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더욱 찍찍 한 산중이었다고 하니, 실록을 옮긴 일행과 말馬들의 숙식은 어떻게 하였을까? 그들의 노고를 생각하는 동안 절 마당에 이르렀다. 우리를 맞이할 대웅전은 온데간데없고 뿌연 먼지와 큼지막한 돌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고 중장비가 오가고 있었다. 작년에 고귀한 문화재를 화재로 잃고 다시 건축하고 있었다.
금선 폭포 쪽으로 한참이나 걸어 올라갔다. 용굴암에 거의 당도하니 낙석위험으로 출입을 금지 한다는 표 말이 서 있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아무 일 없이 등산했던 일들이 엊그제 같았다. 허탈한 마음으로 조금 내려오다가 정읍시청 담당자에게 문의하니, 용굴암에 들어가도 된단다. 우리는 다시 오던 길을 뒤돌아 도전하였다. 용굴암은 상당히 가파른 산등성이나 철재 사다리가 놓여 있어서 올라가는데 별 불편함은 없었다. 굴속은 4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곳에 400여 년 전 조선왕조실록과 태조 어진을 이안했던 곳이라 하니, 앞으로는 이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후손들이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다른 장소에 보관되었던 실록은 전쟁 중 불에 타버리고 오직 이곳에 보관된 실록이 남아 있어, 조선 시대의 역사를 알 수 있다니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손홍록, 안의, 오희길의 체취를 조금이라도 느끼기 위해 굴속에 한참을 있다가 우리 일행은 철재 사다리를 내려왔다. 많은 관광객이 이곳에 찾아오기를 간곡히 기대하며, 이제는 후손들이 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튼튼한 국가가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전주로 돌아오는 길에 정읍 시립박물관에 들렸다. 마침, 정읍의 명문가 도강 김 씨 대종중 기탁유물 50여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조선왕조 개국공신 김회련 왕지와 과거 급제 교지 등 10여 편이 유리 상자에 길게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동학혁명의 지도자로 전봉준과 함께 활동한 김개남 사진이 있었다. 김개남은 수염이 덥수룩하고 머리를 산발한 모습으로 교과서에서 본 인물이라 빨리 알 수 있었다. 그는 일본군과 관군으로 조직된 연합군에 의해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서 즉결 사형당한 인물이다. 이런 전시를 보면서, 송 씨 집안에는 어떤 인물이 있을까 생각해보니, 갑자기 떠오르는 인물로 송시열 선생님이 나의 마음을 위안 시켜 주었다. 송 씨 집안도 박물관을 건립하였으면 하는 욕심이 내 가슴을 담금질하였다.
이번 여행으로 역사에 관심을 갖게 해준, 삼천 도서관 담당 선생님과 조금이라도 더 알려 주려고 애쓰신 역사박물관장님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2014.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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