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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인문학(전주시립삼천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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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013회 작성일 14-10-11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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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인문학(전주시립삼천도서관)

안녕하세요? / 생활에 활력소가 되어 무척이나 즐겁고 유익한 시간들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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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전주 삼천 도서관에서 주최하는길 위의 인문학3전주사고와 조선왕조실록에 관한 프로그램에 참여 하였다. 916일 삼천도서관 교양실에서 전주역사박물관 이동희 관장의 강의를 들었다. 아울러 919일 전주 경기전에 있는 사고를 시작으로 하여 칠보면의 남천사와 무성서원에서 문화해설사의 설명과 정읍사 노래를 경청하였다. 한참을 듣고 있으니 저절로 눈시울이 적시기도 했다. 이어서 정읍시 내장산에 있는 용굴암을 보기 위하여 계곡 깊숙이 들어가는 산행을 하였다. 오랜 시간 장맛비로 유실된 험준한 계곡을 걷다보니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그러나 서로를 의지하며 배려하는 동안 동료애가 생성되어지고 의미가 있는 고행이었으니, 고생한 만큼의 보람이 있는 감동의 시간들이였다. 예정 보다는 조금 늦은 시간 이였지만 정읍시립박물관 기획 관람을 끝으로 매우 유익하고 알찬 탐방을 하게 되었다. 모처럼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 하는 지루한 일상의 틀을 벗어나서 새로운 기운을 얻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길 위의 인문학

 

徐貴碩

 

과거에 일어났던 역사에 대하여 생각 한다거나 정보를 일일이 확인하고 찾아가야 하는 번거로움을 이유로 소홀히 하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일상생활을 함께하는 주변사람들과 관심의 대상에서 다른 시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눈 밖에 나는 처사이며 다른 행동을 한다는 것은 왕따 당하기에 충분한 연유에서 역사 탐방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때론 먹고살기에 바쁘다는 이유를 들거나, 주말이나 휴일이 되면 여가를 즐기기 위하여 먹고 노는 유희를 통하여 외로움이나 소외감을 달래려고 하였었다.

길 위의 인문학을 접하게 된 계기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삼천도서관 앞을 지나갈 때 벽에 붙은 현수막을 보고 관심을 가지고 전화를 걸어 참여하게 되었다. 이미 1(후백제 왕도 전주, 견훤과의 만남)2(태조 이성계와 전북)는 강의와 탐방이 끝난 연유에서 참여 하지 못함을 못내 아쉬워했다. 만약 3(전주사고와 조선왕조실록)를 듣지 않았다면 1차와 2차도 좋은지 몰랐을 것이 분명하다. 500만 명의 여행자가 찾는 관광도시 전주라고 하는데 우리 고장의 역사를 타도에서 온 여행자가 우연히 물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설프게 알고 있었거나, 잘 모르는 상황에서 대답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어쩌면 문화 해설사의 이야기를 들어야 정확하게 알 수 있으며, 고장의 관광 안내소에 문의 하라고 하거나, 네이버를 검색해 보라고 핑계를 대며 상황을 모면할 수도 있다. 그러나길 위의 인문학을 통하여 관심 밖에 있었던 우리 고장의 역사를 어느 정도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선인들의 업적을 통하여 자긍심과 긍지를 느끼며 전주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생성되어지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태조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을 보존하게 된 계기와 과정을 탐방하면서 전주 인으로서 자긍심은 참으로 대단하다. 이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왕이기에 이태조의 어진은 그만큼 중요한 보존 가치가 절실하며, 500년 조선의 자취가 기록된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내야 한다는 것은 민족성에도 근간임을 알게 한다. 가족의 세대를 기록한 것이 족보라 하면 조선왕조실록은 국보이다. 지금도 강대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하여 많은 소수 민족이 자기 나라를 찾기 위하여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그 중에 하나인 세계 인구의 0.2%이며, 경상남도(11,771.06)와 북도(19,442.24) 면적을 합한 면적보다 작은 이스라엘(21.946)이 국가가 사라진지 2,0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역사의 기록물을 근거로 하여 자신의 나라임을 주장하는 것은 그 국가의 역사기록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증명하고 있다.

대원군이 전국의 사원과 향교를 철폐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양반 사대부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정읍시 칠보면에 무성서원은 최치원을 주향으로 모시고 있으며, 전북에서는 유일하게 철폐되지 않은 서원으로 오랜 시간의 흐름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 오랜 시간의 흐름을 역력히 담아 간직하고 있는 서원의 고제에서도 느낄 수 있으나, 옛 선비들이 앉아서 글공부를 하였을 마루 위에서 문화 해설사의 정읍사 노래는 듣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하여, 무성서원의 옛 향취를 물신 느끼며 밀려서 나오는 감흥을 글로 옮겨 적는다. 무성서원 // 대원군이 쏜 불화살 / 서원 향교 날아들어 / 불새로 나는 서책 / 대 낯도 쪼그라드는 / 옹골진 불꽃놀이 / 기웃한 서원문은 / 제 마음 읽어 내고 / 정읍사 노래 읊는 소나무 / 가슴에 맑은 물소리로 흘러드니 / 새 한 마리 저 멀리 난다/

용굴암은 태조 어진을 이안해 수호한 곳으로 어찌나 경사가 심하던지 하늘로 오르는 착각이 들 정도여서 떨림과 설렘이 동시에 일어났다. 아마도 인적이 없어 숲이 길을 쉽게 내어 주지 않은 까닭으로 주변이 어스름 하다. 104계단을 올라야 용이 승천 하였다는 용굴에 닫는다. 영물이 살았던 곳이라서 그러 한가 생기 있는 기운이 체감되어진다. 용굴암의 흔적을 찾아 발굴을 한 참 진행 중에 있어서 용굴암의 크기와 형태를 알 수는 없었다. 이 깊은 골짜기까지 등짐을 지거나 머리에 이고, 어떤 이는 가슴에 품고 내 나라 내 땅에서 숨죽이며 밤이면 새의 낙엽 밟는 소리에도 가슴 조였을 선조들의 심경이 용굴 안에서 아직도 빠져나가지 못한 것 같다. 내려올 것을 걱정하며 올라갈 때와는 사뭇 다르게 참으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기분이 드니 영물이 살았다는 유래가 떠오른다.

천년 전주 아는 만큼 보인다 3차 탐방을 통하여 살아온 날을 뒤돌아보게 하고, 우리 고장의 역사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과 민족성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즐겁고 유익하며 좋은 날이 바쁜 일상생활에서는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4(작가 최명희와 소설 혼불, 그 천의 의미) 강의와 탐방 일정이 무척 기다려지면서도 설레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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