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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립서강도서관] 미술관으로 떠나는 인문학 여행, 2차 후기 (이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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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동석
댓글 0건 조회 911회 작성일 15-08-01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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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립서강도서관] 미술관으로 떠나는 인문학 여행, 2차 후기 (이갑주) <p class="바탕글" mousey="11" mousex="1"># 모가지가 길으면 슬픈 모양이다. 노천명 시인이 그랬다. 오드리 헵번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풍만함은 여성미의 상징이었다. 지금시대는 역사 이래 최초로 살을 줄이려는 풍요의 시대를 맞고 있지만 우리 아버지 시대만 해도 그러지 못했다. 비너스조각처럼 선사시대 이후 경제적 풍요로움과 정신적 삶의 만족은 풍만한 몸집으로 표현되어왔다. 반대로 삶의 불만과 가난한 사람의 쇠약함은 비쩍 마른 모습로 대표되었다. 세상에 대한 생각이 많고 고민이 많은 사람들은 앙상한 몸이 깊은 생각을 의미했다. 삶의 또 다른 표현인 미술은 그 사람의 마음상태와 그가 처한 형편을 표현해주기도 한다. 긴 목과 긴 얼굴, 무표정으로 대표되는 모딜리아니가 불행한 인생을 산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p> <p class="바탕글"> <p class="바탕글">&nbsp;</p> <p class="바탕글"># 서강도서관과 이동섭님의 정성어린 준비로 함께 한, 이번 전시회 제목은 모딜리아니, 몽파르나스의 전설전이다. 몽파르나스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몽마르뜨 언덕과 함께, 당시 만들어진 예술가의 거리다. 새로 생긴 예술인 마을이니만큼 더 젊고 더 예술적인(일반인은 ‘이상한’이라고 읽는 것이 좋겠다) 사람들이 모였다. 생전에 인정받지 못한 모딜리아니는 술집에 가야만 인정받았다.&nbsp;혼자 먹고 있는 모습이 매일 밤 보일만큼 유명했다고 하니, 몽파르나스의 다른 이들보다 더 예술적(?)이었을 것이다. 세기말의 질풍노도 시대를 살았던 모딜리아니는 서른다섯의 짧은 삶을 살았고, 유명한 어린 아내 잔느와의 러브스토리를 남겼다. 그녀는 모딜리아니가 죽은 다음 날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뱃속의 아이와 함께 투신자살했다. 이런 비극적 스토리와 함께, 이탈리아 특유의 잘생긴 훈남얼굴을 가진 그는, 작품을 400여점 밖에 남기지 않아 후세에 작품을 보는 사람에게 여운을 떨구어준다. </p> <p class="바탕글">&nbsp;<p class="바탕글">&nbsp;</p> <p class="바탕글" mousey="95" mousex="296"># 전시회의 그림들은 전에 보았던 고갱에 비해 작품크기가 작았고, 특히 아랫층에서 전시하고 있는 ‘뚱뚱해서 행복한’ 보테로의 그림에 비해 작은 크기였다. 대상도 궁핍한 생활로 인해 전문모델을 쓰기 보다는, 자신이 만나던 화랑의 인물들을 주로 그린 작품들이 많아 당시 미술계 인사들을 보여준다. 여자들만 그리는 것으로 알았는데 남자들도 있고, 눈동자가 없는 그림만 그리는 줄 알았더니 눈동자가 있는 것도 많았다. 차마 표현하지 못했던 눈은 아몬드같이 그렸는데, 뇌부분중 아몬드같이 생겨 아몬드란 별명으로 불리는 것은 편도체이다. 편도체는 공포 등 원초적인 감정을 담당하는데, 유명한 투쟁-도피 반응(fight-flight response)을 만들어낸다. 사바나에서 짐승과 맞닥뜨렸을 때 싸울지 도망갈지 즉각 결정해야 하는 뇌이다. 모딜리아니는 파리에 온 지 십수년째 그림이 팔리지 않는 절망상태에서 투쟁보다는 도피를 선택했다. 하시시와 압생트로 일그러진 짧은 삶을 살았지만, 그가 그린 그림은 긴 목만큼이나 생명력이 더해간다. 배부른 돼지보다는, 예술에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려 했는지도 모른다. 살아서 박제였던 그는, 죽어서야 비로소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사슴이 되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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