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립의성공공도서관] 예술가의 흔적과 풍경들, 서촌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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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실(참가자)
6월 첫날 서울에 입성하였다. 동대문 밖에서만 살던 나는 서촌 일대를 가본 적이 없었다. 의성으로 온지 30여 년이 지났지만 서울 친정 나들이 때도 그곳을 가본 적이 없었다. 역사가 있는 그곳을 답사한다는 기쁨에 마음이 설레었다. 부암동 언덕길을 헐떡거리는 버스 안에서 내다보니 강남이나 서울한복판과는 다르게 고층건물이 없었다. 조그마한 상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초라해 보이기도 했지만 이름마저 정겨운 제비꽃다방, 세검정한의원, 산모퉁이카페……. <?xml:namespace prefix = o />
버스에서 내리니 횡단보도 맞은편에 조그마한 동상이 눈에 띈다. 1968년 1.21사태 때 청와대 폭파특명을 띠고 남파했던 김신조 외 31명과 격전을 벌이다 순직한 최규식 경무관, 정종수경사의 동상과 추모비였다. 세월이 흘러 역사의 뒤안길이 되어버린 지금 시대도 많이 흐르고 잊혀 간다는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이었다.
최석호 선생님의 안내를 받으며 세검정에 이르니 "칼"을 씻었다는 뜻의 정자 세검정이다. 광해의 패륜을 응징하기 위해 인조반정을 단행함으로써 반정공신들은 세검정에 모여 반정을 모의한 후 "칼"을 씻으면서 결의를 다졌다는 곳이기도 하다. 세검정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니 집터가 나왔다. 집터에는 두개의 연못과 정자 우물 등의 흔적이 있고 "白石銅天"(백석동천) 이라고 각자한 바위가 있었다. 계곡을 따라 산을 오르니 북악산 성곽이 눈에 들어왔다. 중국의 만리장성을 연상케 한다. 맑고 쾌청한 날씨에 멀리보이는 서울풍경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잡힐 듯한 남산타워 옛날 남편과 데이트하던 생각이 난다. 북악산 성곽이 보이는 길을 지나 내리막길로 접어드니 "라" 갤러리 라는 곳에서 "박노해" 사진전을 몇 년째 하고 있었다. 인왕산에 오르니 남산을 향하고 있는 바위에는 윤동주시인의 "서시"가 새겨져 있었다. 길을 따라 내려오니 북악산 창의문과 인왕산 윤동주 문학관이 보였다. 창의문은 한양성곽 4소문중 하나라고 한다. 창의문 밖에서 바라본 부암동 형상이 지네와 같아서 지네의 기운을 누르기위해 천적인 닭을 길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오는 창의문은 봉황무늬가 이색적이었다.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라고 했던가? 강행군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자 식당 안에 모인 우리들은 깔끔한 한정식으로 맛있는 식사를 하였다.
윤동주 문학관에 도착하니 친절하신 표준 말씨의 해설사가 우리를 반긴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가 귀에 익은 나는 고향 사람을 만난 듯 반가웠다. 얼마 전에 "동주"라는 영화를 봄으로써 그리고 김용락 선생님의 강의를 들음으로써 사전지식을 갖추고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니 이해하기가 쉬웠다. 핸섬하게 사각모를 쓰고 있는 윤동주 시인의 모습은 뭇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을 것이라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전시실 중앙에 우물목각이 전시되고 있었다. 고향마을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 하였다. 그 우물에 비친 시인의 모습을 그린 시가 "자화상"이다. 식민지를 살아가는 사람들, 굴욕스러운 창씨개명을 해야만 하는 암담한 일상, 우리말과 글을 쓸 수없는 참담한 현실을 말해주는 내용이었다. "청운 수도 가압장"을 되살려 윤동주 문학관을 탄생시킴으로써 약해진 현대인들의 영혼을 윤동주님의 시로써 승화시키려는 것 같았다. 일본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의 대상이 된 시인의 삶은 민족사와 맥을 같이하기에 가슴이 아려왔다.
누상동 윤동주 시인의 하숙집터를 지나 수성동 계곡으로 향하였다. 계곡의 이름을 눈여겨보니 물이 많아 물소리가 진동했다는 뜻이다. 이곳에서 발원한 물은 청계천을 돌아 서울을 휘감아 흘렀다지만 다 옛이야기가 된 것 같다. 수성동계곡을 내려오니 서촌마을이다. 경복궁 서쪽에서 인왕산 아래도 이어지는 이곳은 조선시대에는 중인들이 살았고 권문세가에서는 별장을 짓기도 했다고 한다. 송강 정철, 겸제 정선, 추사 김정희의 작품이 탄생된 곳이기도 하다. 이중섭 화백 역시 서촌에서 자신의 작품을 정리하고 미도파에서 전시회를 열었다고 한다. 서촌재를 지나니 박노수 미술관이다. 건축가 박길룡이 한국식 일본식 서양식 등 건축기법을 절충하여 설계한 집이라고 하는데 멋스러움과 아늑함이 더더욱 돋보인다. 송석원 끄트머리에 박길룡이 설계한 이집은 아픈 역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매국노 윤덕영이 사위와 딸을 위해 지은 집이기도 하다. 박노수 화백께서 1,000여점에 달하는 그림, 소장품 등을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더 가치가 있는 것 같았다.
박노수 미술관에서 통인시장 쪽으로 내려오니 좁은 골목 안에 남정 박노수 화백의 스승이신 청전 이상범 화백의 가옥과 화실이 있었다. "청전화옥"은 이상범 화백의 넷째 며느리께서 관리하고 계셨다. 청연산방에는 청전의 습작 그리고 동아일보 미술 기자 시절의 삽화 등을 볼 수 있었다. 아담하고 조그마한 청전화옥을 봄으로써 이상범 화백의 청렴과 결백을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청전은 "일장기" 말소사건의 장본인 중 한명으로 그 사건으로 인하여 동아일보에서 강제 해직되었다고 한다. 동양화와 서양화를 한 화폭에 구연함으로써 한국화를 새롭게 했다고 한다. 겸제가 빼어난 우리 산천을 화폭에 담았다면 청전은 두드러지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우리 곁에 있는 언덕과 계곡을 그렸다고 한다. 미술세계에 대해서 문외한이기도한 나는 제자 박노수 미술관과 비교도 안될 만큼 조그마하고 초라해 보이는 청전화백의 가옥을 나오며 정부의 관심이 필요함을 느꼈다.
청전화옥을 나와 통인시장 쪽으로 걸어가니 골목을 가득 메운 가게의 쇼 윈도우가 예술 그 자체인 것 같았다. 왼쪽 골목 필운동으로 들어가니 송석원터가 있었다. 우리 조상의 역사가 숨 쉬는 곳 풍류가 있고 예술이 꽃피던 곳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나라를 잃으면 백성만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산천이 고생하는 것 같았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김으로써 서구식 건물이 들어오고 서양식 정원양식을 겸하게 되니 말이다. 중앙에 있는 벽수산장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프랑스 공사였던 민병찬이 사온 설계도로 윤덕영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일본 광산회사에 잠시 넘어갔다가 한국전쟁 중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청사로 쓰이다가 수복 후 연합군 장교 숙소로 사용되었고 UN한국 통일부응위원회가 사용하면서 언커크라고 불렀다고 한다. 송석원터를 중심으로 한 윤덕영의 집터가 전체 옥인동면적의 54%를 차지했다고 하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욕에 빠진 권력자의 부정 축재는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 송석원의 주인이 바뀐 역사는 곧 우리 역사의 주역이 바뀌어가는 역사인 것 같다.
송석원을 마지막으로 통인시장을 걸어 나오니 서촌마을 답사는 나에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았다. 일행을 뒤로 하고 경복궁역으로 향하는 나는 아들을 만난다는 기쁨과 납골당에 계신 친정어머니를 뵈러간다는 기대감에 피곤함마저 잊은 채 종종걸음을 재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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