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평생학습관] 어머니의 틀니 - 유영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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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틀니
-길위의 인문학 1차 “내 안의 평화를 만나는 소설” 참여 후기-
(유영분)
지난 4월 우연히 이경자 선생님의 특강을 수강한 것을 계기로 마포평생학습관 길위의 인문학 1차 강좌와 2차 강좌를 연달아 수강하게 되었다.
서로 주제도 다르고 강의하신 선생님들도 다르고 강의에서 다뤄진 문학가도 박완서, 이육사, 권정생 선생님 세 분으로 각기 달랐지만 강의를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나 생각, 주제의식이 있는 강좌였다.
내 나름대로 느낀 일관된 주제는 소설이든 시든 작가가 나고 자란 고향산천과 가족 환경, 성장과정, 역사적 배경과 무관할 수 없으며 작가마다 마치 영혼의 고향처럼 평생 맴돌며 천착하는 주제가 있다는 것이다. 또 작가의 삶이나 행동, 인생 여정이 녹아있는 작품이야말로 생명력과 진정성을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소설 읽는 걸 좋아하는 편이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문학상 수상작이나 좀 들춰보는 수준이었고 한국문학보다는 외국문학이나 철학에 더 관심이 있었다.
특강을 들으면서 처음엔 이경자 선생님 특유의 부드러운 말씨와 몸짓에 끌렸고 깊어가는 강의 속에서 소설가라는 직업이 얼마나 많은 슬픔과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면서 나에게 문재가 없음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안도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결국 소설가는 머릿속에서 상상의 집을 짓는 단순한 이야기 제조꾼은 아니었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 산천과 가족사, 사회 환경 속에서 체화된 감성과 주제의식을 평생 껴안고 살아가며, 인간의 삶에 관해 질문을 던지고, 마치 누에고치처럼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안으로 삼켜 문학으로 토해내는 고통스러운 존재임을 깨달았다.
선생님의 특강을 계기로 오랫동안 무관심하게 지나쳤던 한국소설에 관심을 갖게 되어 마포평생학습관 길 위의 인문학 1차 강좌인 이경자 선생님의 “내 안의 평화를 만나는 소설”을 신청하였다.
이경자 선생님은 강원도 양양에서 자란 어린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평생 여성문제와 분단문제에 천착하여 작품활동을 해오셨다. ‘계화’와 ‘빨래터’, ‘세번째 집’ 읽으면서 문학은 내면의 독백이나 마음속에 떠오르는 심상을 붓가는 대로 적어 내려가는 것으로 여겼던 나의 조악한 소설관이 여지없이 깨졌다. 치열한 주제의식과 성찰없이 문장의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소설이 우리 문단을 빈약하게 만들고 독자의 관심을 멀어지게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박완서 선생님이 그리는 어머니상과 신경숙 선생님이 그리는 어머니상의 다름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그 다름이 구체적으로 어떻다고 말씀하신 건 아닌데 이상하게 이 말이 가슴에 와 닿았고 과연 두 소설가가 그리는 어머니상의 차이점이 무얼까 탐구하고 싶어졌다.
신경숙 선생님의 ‘엄마를 부탁해’는 몇 년 전에 읽었기에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을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기 시작했다. ‘엄마의 말뚝1,2,3’을 읽고 ‘나목’을 읽고 ‘그남자네 집’을 읽으면서 박완서 선생님 특유의 재치있고 흡입력있는 문체에 감탄하면서, 주제의 참신함과 파격에 놀라면서도 끝내 나를 멈칫거리고 울먹이게 만든 건 박완서 선생님의 어머니이자 나의 어머니에 관해 묘사한 대목이었다.
젊은 시절 보라빛 코트로 한껏 멋을 부리고 학교로 찾아와 나를 우쭐하게 했던 어머니가 지금은 딸 앞에서 틀니를 뺀 채 우물거리며 힘겹게 식사를 하시는 것도, 겉으로는 딸 아들 구분없이 똑 같이 대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남부럽지 않게 대학교육까지 시키셨으면서도 마음 속으로 의지하는 버팀목은 오로지 장손인 오빠라는 것을 딸 앞에서 은연중에 노출하고야 마는 것도, 집안 대소사나 온갖 경제적 어려움도 아프다 소리 한마디 없이 맨몸으로 견디셨으면서도 오랜 옛날 시누이한테 들었던 서운한 말 한마디를 못 잊고 눈물 흘리는 것도 너무나 닮았다. 혼자계실 때면 노래부르다 울다, 허공을 향해 얘기하시는 것까지 박완서 선생님 작품에 나오는 어머니와 나의 어머니는 너무도 닮은 꼴이었다.
늘 어머니가 어려웠고 어머니 앞에서 긴장했던 나는 어려서부터 실수를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모범생으로 행동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린애다운 충동과 욕심으로 가끔 어머니를 지능적으로 속이는 교활한 면도 가졌던 아이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스스로 내가 뉘우쳐 비행을 그만둘 때까지 기다렸지 한번도 잘못을 들추어 야단친 적이 없다. 그런 어머니의 훈육방식 덕분에 난 자라면서 늘 필요 이상으로 자기 검열에 철저한 사람이 되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거나 몸을 비비대는 애교 짓을 해본 적이 없는 나는 지금은 많이 늙고 쇠약해진 어머니께 여전히 무뚝뚝하고 인정머리 없는 딸이다.
마음 속 깊이 어머니에 대한 연민, 어머니가 산 모진 세월에 대한 안타까움과 경외감이 있고, 언젠가는 닥쳐올지도 모를 어머니의 부재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늘 퉁퉁부은 얼굴과 씹어뱉는 듯한 말투로 어머니의 마음을 잡아 뜯는 못된 딸이다.
박완서 선생님의 아치울 자택을 방문했을 때 호원숙 작가님이 어머니인 박완서 님을 너무나 사랑했노라 말씀하시면서 눈시울을 적실 때 다시한번 온 몸이 타는 듯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어머니는 오랜 세월 자식들 곁을 지키며 자신의 전부를 희생하지만 자식들은 어머니를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구속으로 느끼는 아이러니함, 이것이 어머니와 딸, 부모와 자식 간에 존재하는 근원적 슬픔이 아닐까?
이경자 선생님과 만난 두 번의 강좌는 내게 한국소설에 대한 관심을 되찾아 주었고 소설가의 삶이 어떤 것이고, 작품은 어떤 과정을 통해 얼마나 고통스럽게 태어나는지 깨닫게 해주었으며, 한국 현대문학에서 어머니와 같은 존재인 박완서 선생님의 드넓고 풍성한 작품세계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지치고 노쇠한 나의 어머니, 하지만 여전히 젊은 시절의 자존감과 기상을 잃지 않고 당당한 나의 어머니에 대해 돌아보게 해주었고, 어머니의 약해진 관절과 입안에서 겉돌며 덜걱거리는 틀니를 이해하게 해주었으며 어머니의 상처와 슬픔, 어머니의 바람을 어렴풋이 짐작이나마 할 수 있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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