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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문화관도서관]500년 역사, 조선 왕조 실록 1강 - 편찬과 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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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희숙
댓글 0건 조회 817회 작성일 16-10-20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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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문화관도서관]500년 역사, 조선 왕조 실록 1강 - 편찬과 보관

<관악 도서관>길 위의 인문학 가을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난여름 제1차 <조선 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강의에 이어서 이번 가을학기에는

제2차 <500년 역사, 조선 왕조 실록> 강의가 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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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쌀쌀해진 가을 날씨에 어둑어둑한 밤길을 걸어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습니다.

애초에 정원 40명으로 정해져 있었지만 이번 관악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에 신병주 교수님의 강의가 있다는 입소문이 더해져

어린 초등학생들부터 대학생, 직장인들뿐만 아니라 역사에 관심 많은 중년들과 나이 꽤 지긋하신 어르신들에 이르기까지

100여 명 넘는 많은 사람들이 조선왕조실록 강의를 들으러 참여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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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역사, 조선왕조 실록> 커리큘럼에 보니 다섯 차례 강의와 함께 강화도 <정족산사고> 역사탐방을 다녀오게 되는데 

신병주, 강문식 두 분 강사의 깊이 있는 강의로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 일기>를 비롯하여 <일성록>과 <동의보감> 등

조선왕조의 기록문화를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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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7시부터 두 시간 넘게 강의가 이뤄지는데 첫날은 <역사 스페셜>과 <역사저널, 그날> 등으로 널리 알려지고

수많은 역사책을 펴내신 역사 분야의 스타 학자이신 신병주교수님께서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 보관'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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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께선 조선왕조실록의 모든 내용이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으신지 다양한 실록 이야기가 막힘없이 술술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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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내용을 추려 정리해봅니다.  

 

1.실록의 편찬  

 


 

조선왕조실록은 현재 <태조실록>부터 <순종실록>까지 기록이 남아있습니다만, 1997년 10월에

태조~ 철종실록(25대 472년간의 기록)만이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규장각(정족산본 1187책, 오대산본 27책+47책)


사고에 고종과 순종실록은 다른 곳에 보관되어 있는 바람에 세트로 보관되어 있던 태조~ 철종까지의 기록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일제시대 편찬이라 하여 빠트린 것은 아닌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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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청 구성 


조선 왕조 실록은 왕의 사후에 <실록청>에서 작성하게 됩니다. (많게는 250명까지 구성)

실록 편찬은 왕이 살아계실 때 사관(史官)옆에서 기록한 사초(史草)와 각 관청의 문서들을 모으고

춘추관에서 만든 시정기(時政記- 각 관청의 업무기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내의원일기, 관상감일기)를 토대로 하여

<실록청>에서 편찬합니다.

 

-사관(한림)은 예문관의 봉교(정7품) 2명, 대교(정8품) 2명, 검열(정9품) 2명 등 총 8명으로 품계상 매우 낮은 등급이지만,

‘한림 8원’이라 불리며 당시 선비들이 열망하던 직책이었다고 합니다.

왕의 모든 말을 다 받아 적어 기록해두는 일을 하니 왕도 허투루 말도 못하고 사관의 기록을 두려워했을 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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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의 편찬 과정


사초는 초초, 중초, 정초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실록에 올릴 내용을 고르게 됩니다.

초초(初草)- 사관들이 처음으로 쓴 기록인 만큼 마구 갈겨썼을 법합니다.

중초(中草)- 초초 내용을 실록이나 일기 등으로 기록하기 위해 수정한 것을 옮겨 적습니다.(중초본은 춘추관에 보관)

정초(正草)- 중초의 잘못된 내용을 다시 고치고 문장을 통일하여 최종적으로 핵심 내용을 실록에 수록하기 위한 기록입니다.

 

세초(洗草)- 조선왕조 실록을 편찬한 다음, 시비의 소지를 예방하기 위해 사초나 초고를 없애는 제도입니다.

실록 편찬을 하고 난 후 사초는 세초 작업을 거쳐 그 내용을 모두 없앴는데 <조지서- 종이 만드는 일을 관리, 담당하였던 관서> 부근의  

<세검정> 정자 옆 흐르는 개천 물에서 사초한 종이깨끗이 씻어냅니다. 

 

여지도 <도성도>에 보면 길게 흐르는 개천은 '홍제천'으로 이는 근처에 있던 홍제원(빈민구제소, 중국사신 숙소)에서 유래하였으며,

모래가 많이 쌓여 '모래내'나 '사천(沙川)'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창의문 안쪽으로 개천가에 <세검정>과 <조지서>가 있고 그 사이에 군사훈련기관인 <총융청>이 있습니다.

총융청 건너편에 연산군이 세웠다는 <탕춘대>가 있는데 영조 때 총융청으로 인해 탕춘대가 <연웅대>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한양의 북서문인 <창의문>은 현재의 이름인 <자하문>으로 바뀝니다.

탕춘대에는 한지마을이 있으며 절벽처럼 높은 곳에 있는 정자는 이처럼 '대'라는 이름이 붙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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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은 본디 인조반정 때 이곳에서 칼을 씻었다는 데서 유래한 곳이라 하며 세검정 정자는 영조 때 세워진 것인데 없어지고

1977년에 다시 복원된 것이 현재에 이릅니다.

세초를 마치면 관례적으로 이를 축하하는 세초연을 베풀어 수고한 관리들에게 차등 있게 하사품을 내렸다고 합니다.

 

"세초연을 열어주었다. ..이때에 이르러 일을 끝냈으므로 차일암에다 잔치를 열어주었는데 이는 관례이다. 

이어 총재관 김육, 대제학 채유후, 윤순지 등에게 안장 갖춘 말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 효종실록 1657(효종 8) 9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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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암(遮日巖).. 해를 차단하는 바위라는 뜻. 정자 아래쪽 널찍한 너럭바위를 말합니다.

차일암 위에는 세초한 종이를 재활용하기 위하여 자연스럽게 잘 말릴 수 있게 하는 한편, 이곳에서 세초연을 베풀기 위해

차양을 쳤던 말뚝 구멍이 남아있습니다.

 

"세검정은 창의문 밖 탕춘대 앞에 있으며, 차일암이 있다.

열조의 실록이 이루어진 후에. 반드시 여기서 세초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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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산과 백악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운 이곳에는 한양도성의 4소문 중 하나인 <창의문(지금의 자하문)> 밖에 홍제천이 흐릅니다.

현재의 <세검정>은 겸재 정선이 그린 <세검정도>를 바탕으로 1977년에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겸재 정선, <세검정>, 1748, 61.9 x 22.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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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실록의 편찬-필사본, 밀납본, 인쇄본 


태조실록..필사본 (4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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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금속활자(밀납본) 

 

벌집 왁스를 발라서 방충과 방습 효과는 있으나 햇빛에 노출되었을 때 백화현상이 일어나 종이가 희끗희끗 해졌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주사고에서 내장산으로 실록을 옮길 때 햇빛에 노출되어 세종실록 200여 권이 훼손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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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목활자 

비용 적게 하려고 나무 활자를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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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실록의 보관과 관리-사고(史庫)


 

"고려는 조선의 역사다."

고려 시대에도 실록이 있었지만 1질씩 밖에 안 만들고 거란족 침입 때 소실되고 후기 몽골 침입 때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고려의 전통을 이어받아 실록을 만든 조선..

 

①임진왜란 이전- 4사고 체제(경복궁 춘추관관 충주, 전주, 성주 등 지방 읍성)


*내사고(內史庫).. 궁궐에 있는 사고

실록을 처음에는 개성 수창궁에서 보관하다가 이어 중추원, 장생전을 거쳐 최종 <경복궁 춘추관> 보관합니다.

*외사고(外史庫)​.. 지방에 있는 사고

​-처음에는 <충주사고>에 태조, 정종, 태종실록을 봉안합니다.

-세종대에 <전주사고>와 <성주사고>를 설치합니다. 

-중종대에 비둘기 잡다가 <성주사고>가 불에 탑니다.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 이외의 경복궁의 <춘추관>과 <청주사고> 실록이 모두 소실됩니다. 

현재 전주사고가 남아 있는 경기전에는 전주 한옥마을과 연계되어 <어진박물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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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참봉 오희길, 유생 안의, 손흥록 등이 태조의 어진을 들고 나오면서 <전주사고>본의 실록(태조~명종실록)을

정읍 내장산 용굴암에 보관하고 숙직하며 지킵니다.

-전주사고본은 이후 해주를 거쳐 강화도로 옮겨집니다.

 

②임진왜란 이후 험난한 곳에 사고 설치

-강화도(마니산→정족산 이전), 묘향산(후금침입이 잦아 → 무주 적상산 이전), 오대산(강릉, 지금은 평창), 태백산(봉화)에 보관

​경복궁 춘추관의 소장실록은 임진왜란 이전 실록은 병화로 모두 소실되고 선조 이후 실록만 보관.

 

 사고의 구성

-2층 구조의 목조기와집, 방화벽 설치, 방습을 위해 2층에 보관,

다만, 정족산사고만 바다가 가까운 터라 해풍이 적은 1층에 보관하였더니 확인을 쉽게 하려고 정족산사고를 주로 이용했다고 합니다.

-수호사찰을 두고 유사시에 관리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참봉 벼슬 관리)


강화 정족산사고(전등사)

강릉(평창) 오대산사고(월정사)

무주 적상산사고(안국사)

봉화 태백산사고(각화사)

 

태백산사고(1930년대) 이후 소실되어 전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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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족산사고(사고와 선원보각 복원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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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대산 사고..(사고와 선원보각)복원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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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산사고(사고와 선원보각 복원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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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를 중시한 자료들..  

 

김홍도<오대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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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이 전국 지도 479장을 그리게 합니다. 보물지도..

1871년 그림에 보면 광한루 오작교가 크게 그려져 있고 평양지역은 냉면 지도 그림도 있습니다.

각 지역별로 책임지게 하였더니 각 지방별로 특색이 있습니다.

 

오대산사고(강릉, 평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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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족산사고(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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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의 태백산사고는 간결하고 수수한 그림인데 반해, 무주의 적상산사고는 오밀조밀 상세하고 예쁘게 그려져 비교가 됩니다. 

 

태백산사고(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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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산사고(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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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산사고가 그려진 예쁜 실제 지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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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포쇄[曝曬] - 사고에 보관된 실록에 햇볕과 바람을 쐬는 것.


 실록을 넣는 궤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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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풍을 시켜서 습기를 제거하여 부식 및 충해를 방지시킴으로써 서적을 보송보송하게 보관하게 됩니다.

​햇볕과 바람에 잘 말린 실록을 다시 궤짝에 넣어 봉하는데 이 포쇄한 내용은 실록청지안에 기록합니다.

 

"각처 사고에 있는 실록의 포쇄는 2년마다 1번 한다.

한림 1명이 왕명을 받들어 내려가 사고의 문을 연다.

이때 흑단령을 갖추고 사각 앞에서 4배를 한다.

사고 문을 열고 봉심(받들어 살핌)한 후에 궤짝을 열어 포쇄한다.

포쇄일수는 마땅함을 헤아려서 한다.

포쇄가 끝나면 궤짝에 넣고 돌아와 봉인한다.(이때는 4배를 하지 않는다)"

-한원고사 포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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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실록의 이동과 현 보관 상태

 

-일제시대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돼 있던 <사고>는 철저히 방치되고, 파괴됩니다.

1907년 일본군 방화로 각화사와 태백산사고 소실. 

 

 

①<정족산사고> 실록은 <조선총독부> 학무과를 거쳐 1930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지고 현재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존.

②<태백산사고> 실록<조선총독부> 학무과를 거쳐 1930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지고 현재는 행정자치부 산하 부산지소 

 ​<정부기록보존소> 보존, 전쟁이 나자 서울대에 있던 실록을 사서들이 부산으로 옮긴 것으로 1994년 남한에서도 태백산본으로 완역.

③<적상산사고> 실록은 창경궁에 있던 이왕직 왕실도서관인 <장서각>으로 옮겼던 것을 6.25전쟁 중에 방치되어 있다가

북한이 가져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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