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도시 춘천 !」3.1운동 100년의 길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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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교육 문화관에서 진행하는 탐방을 다녀왔다. 더운 날씨가 계속되던 가운데 비가 오기 전의 흐린 날씨라서 탐방하기에는 참 좋았다. 다녀온 곳곳마다 가까
운 곳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깜짝 놀라게 했다. 도청 뒤에 이런 곳이 숨어있었을 줄이야.....세종호텔이란 곳에 다다르니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
로 꽁꽁 숨겨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조선의 성군이신 세종대왕님의 이름을 딴 곳에 일제의 흔적이 있다는 것이 참 씁쓸했다. 전에 원주 혁신도시 국립공
원관리공단엣 들은 세종대학교 호사카 유지 선생의 강의가 떠올랐다. 왜 일본인들이 우리 조선의 성군의 이름에 기웃거린다는 말인가? 다시 춘천 세종호텔 이
야기로 돌아와서 이야기 하자. 세종호텔 출입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시작하는 곳에 물을 담는 용도로 쓰던 돌 그릇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신사를 상징하는 나
무 구조물이 놓였을 홈이 파여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손을 씻고 이 계단을 올랐을 것이다. 세종호텔의 대문은 가운데가 솟이 있었고 문이 세 개였다. 그렇게 호
텔을 관통해 뒷마당 신사 터에 다다랐다. 돌불상이 놓여있는데 일제 시대에는 신사의 신위가 모셔졌을 것이고 돌받침이 남아있는데 나무 조형물들이 세워졌을
홈이 파여 있었다. 춘천에 우두동(牛頭洞)이 순 우리말로 '소의 머리' 그러다가 '쇠머리'가 되고 일본말로 '소시모리'라는 일본신이 된 것이다. 춘천의 신사는 일
제시대에 한반도에 설치된 신사 가운데 5대 신사에 속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너무 가슴아프다. 아직도 일본인들이 이곳을 찾아 과거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이 소름끼칠 정도로 부끄러웠다. 이제는 강원도청의 뒷길에서 이야기기를 나눴으니 이제는 앞마당으로 가보자. 조양루(朝陽樓)에 가보니
가운데 솟을 대문이요 문이 세 개인데 누각이라서 위에 서서 조망할 것이다. 특이한 것은 문이 대단히 높았는데 말을 탄 사람이 그대로 통과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관리가 누각 위에 올라와서 지시를 내리고 문을 여닫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리고 조양루 뒤에 위치한 위봉문을 바라보았다. 봉의산에서 나온 봉황
이 춤을 춘다는 의미라고 한다. 고종황제 때 만들어진 곳이라고 하는데 이궁이라고 위태로울 때 오는 궁으로 만들어진 곳의 문으로 사용하던 곳이라고 한다. 정
조대왕의 화성 행궁의 행궁은 목적성을 띠고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곳은 그야말로 위급할 때 쓰기 위함이었다. 과거 고종황제께서 아관파천할 당시 이곳으로 피
신오셨다면 어떠셨을까 싶었다. 위봉문도 세 개의 문에 가운데가 솟아있는 솟을 대문이었다. 봉황이 밤새도록 춤을 추면서 이궁을 지켜주면 아침 조(朝) 자 조양
루(朝陽樓)로 아침 볕이 들면 봉의산으로 봉황이 가셔서 잠이 들었다고 한다. 대학 시절 복싱을 하던 때 소양강을 따라 소양2교를 지나 도청 오르막길을 단숨에
오르며 달리기를 자주 했었다. 그런데 나는 겉만 보고 건물들 속에 담긴 이러한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매우 부끄러웠다. 그 다음에 들른 소양
로 비석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서 '친일파 이범익의 영세 불망비'를 보았다. 자신의 업적이 훌륭하다면 후세에 그 정신부터 널리 알려져야지 이런 비석과 같은 알
리기 위한 수단에 속하는 것에 집착하는 것인가? 정신과 얼을 대물림하려면 증거가 될만한 수단이 따라와야한다. 하지만 수단에 집착한 나머지 수단을 거짓으
로 꾸민다 한들 그것이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소양강 물에 영혼을 씻어낸다. 비석에 붙어 있는 매미를 보면서 기분이 참 이상해진다. 발길을 재촉해서 춘천 시립
청소년 도서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윤희순 의사'님의 동상을 보기 위해서 였다. '윤희순 여사'님이라고 소개되어 있어서 안타까웠다. 안사람들도 의병활동에 동
참하자는 '안사람 의병가'를 통해 의병에 참여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하던 분이셨다고 한다. 고흥 류씨 집안에 시집와서 첫날밤을 보낼 때 사람들이 첫날밤을 구
경하러 밤에 오면서 등불을 잘못 해서 불이 났다고 한다. 족두리와 옷을 벗어 던지고 물동이를 직접 들고 와서 불을 껐다는 일화는 '윤희순 의사' 님의 적극적으
로 참여하는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고 한다. 이제 류인석 의병장 님이 지내시던 가정리에서 만든 의병마을로 향했다. 대학교 시절 김유정 문학 마을에 탐
방간 적이 있는데 참 이렇게 문화 역사 컨텐츠를 잘 만들어 놓은 것을 보니 문화창의 도시를 지향하는 원주 사람으로서 부러웠다. 한참을 버스가 달려서 도착한
의병마을에 내린 까마귀들이 있었다. 까치가 있었으며 더 좋겠다. 의병마을 해설사님을 따라 사당에 가서 향불을 올리고 기념관에 가서 구경하던 차에 벼루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의암 류인석 선생님께서 중국에 쫓겨 가셔서 생활하실 때 묵을 곳을 마련해 준 중국 분에게 돈 대신에 벼루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
런데 100여년의 시간이 흘러서 류인석 선생님의 후손이 중국에 가서 우연히 만난 그 때 도와주셨던 중국분의 후손을 만나 돈을 치르고 벼루를 다시 가져오셨다
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인연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는 비가 올락말락하는 길을 재촉해 마지막으로 들른 윤희순 선생님이 생가 터에
다다랐다. 아직 후손들 고흥 류씨를 거쳐 해주 윤씨 집안에서 사셔서 '윤희순 의사'님의 기념관은 지을 수 없으셨다고 한다. 물이 줄어든 우물 터에 가서 폴짝 뛰
는 개구리의 모습을 보면서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를 발견하면서 꾸물꾸물 흐린 날씨에 승천하는 용이 되어볼작시면. 천도만기(千倒萬起)하는 모습과 생
을 마감하시기 전에 쓰셨던 '해평윤씨일생록'에서 강조하신 '충효정신'은 우리가 꼭 본받아야 한다. '사전오기(四顚五起)' 네번 다운되고 다섯번 일어선 홍수환
세계 챔피언 처럼 나도 내년에 2020 도쿄 올림픽에 나가서 일본 선수와 겨뤄서 꼭 금메달을 따는 꿈을 꾼다. 면접에 떨어지고 좌절하는 우리 청년들, 공무원 시
험에서 낙방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우리 수험생들. 모두 모두 이 지겨운 싸움에서 끝내고 싶은 마음을 담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자. 결코 이러한 부정
적인 상황과 아픈 몸과 마음을 일으켜서 다시 한 번 해보자. 나와 너와 그리고 우리가 하는 외로운 싸움은 함께 도서관에 모여 공부하고 그럴 수록 집안에서 가
족들과 따뜻한 말을 주고 받으면서 서로를 사랑하자. 그리고 우리도 짝을 만나 어려운 형편을 뛰어 넘을 따뜻한 사랑을 품고 찬란한 해를 맞이하도록 합시다.
운 곳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깜짝 놀라게 했다. 도청 뒤에 이런 곳이 숨어있었을 줄이야.....세종호텔이란 곳에 다다르니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
로 꽁꽁 숨겨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조선의 성군이신 세종대왕님의 이름을 딴 곳에 일제의 흔적이 있다는 것이 참 씁쓸했다. 전에 원주 혁신도시 국립공
원관리공단엣 들은 세종대학교 호사카 유지 선생의 강의가 떠올랐다. 왜 일본인들이 우리 조선의 성군의 이름에 기웃거린다는 말인가? 다시 춘천 세종호텔 이
야기로 돌아와서 이야기 하자. 세종호텔 출입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시작하는 곳에 물을 담는 용도로 쓰던 돌 그릇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신사를 상징하는 나
무 구조물이 놓였을 홈이 파여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손을 씻고 이 계단을 올랐을 것이다. 세종호텔의 대문은 가운데가 솟이 있었고 문이 세 개였다. 그렇게 호
텔을 관통해 뒷마당 신사 터에 다다랐다. 돌불상이 놓여있는데 일제 시대에는 신사의 신위가 모셔졌을 것이고 돌받침이 남아있는데 나무 조형물들이 세워졌을
홈이 파여 있었다. 춘천에 우두동(牛頭洞)이 순 우리말로 '소의 머리' 그러다가 '쇠머리'가 되고 일본말로 '소시모리'라는 일본신이 된 것이다. 춘천의 신사는 일
제시대에 한반도에 설치된 신사 가운데 5대 신사에 속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너무 가슴아프다. 아직도 일본인들이 이곳을 찾아 과거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이 소름끼칠 정도로 부끄러웠다. 이제는 강원도청의 뒷길에서 이야기기를 나눴으니 이제는 앞마당으로 가보자. 조양루(朝陽樓)에 가보니
가운데 솟을 대문이요 문이 세 개인데 누각이라서 위에 서서 조망할 것이다. 특이한 것은 문이 대단히 높았는데 말을 탄 사람이 그대로 통과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관리가 누각 위에 올라와서 지시를 내리고 문을 여닫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리고 조양루 뒤에 위치한 위봉문을 바라보았다. 봉의산에서 나온 봉황
이 춤을 춘다는 의미라고 한다. 고종황제 때 만들어진 곳이라고 하는데 이궁이라고 위태로울 때 오는 궁으로 만들어진 곳의 문으로 사용하던 곳이라고 한다. 정
조대왕의 화성 행궁의 행궁은 목적성을 띠고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곳은 그야말로 위급할 때 쓰기 위함이었다. 과거 고종황제께서 아관파천할 당시 이곳으로 피
신오셨다면 어떠셨을까 싶었다. 위봉문도 세 개의 문에 가운데가 솟아있는 솟을 대문이었다. 봉황이 밤새도록 춤을 추면서 이궁을 지켜주면 아침 조(朝) 자 조양
루(朝陽樓)로 아침 볕이 들면 봉의산으로 봉황이 가셔서 잠이 들었다고 한다. 대학 시절 복싱을 하던 때 소양강을 따라 소양2교를 지나 도청 오르막길을 단숨에
오르며 달리기를 자주 했었다. 그런데 나는 겉만 보고 건물들 속에 담긴 이러한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매우 부끄러웠다. 그 다음에 들른 소양
로 비석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서 '친일파 이범익의 영세 불망비'를 보았다. 자신의 업적이 훌륭하다면 후세에 그 정신부터 널리 알려져야지 이런 비석과 같은 알
리기 위한 수단에 속하는 것에 집착하는 것인가? 정신과 얼을 대물림하려면 증거가 될만한 수단이 따라와야한다. 하지만 수단에 집착한 나머지 수단을 거짓으
로 꾸민다 한들 그것이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소양강 물에 영혼을 씻어낸다. 비석에 붙어 있는 매미를 보면서 기분이 참 이상해진다. 발길을 재촉해서 춘천 시립
청소년 도서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윤희순 의사'님의 동상을 보기 위해서 였다. '윤희순 여사'님이라고 소개되어 있어서 안타까웠다. 안사람들도 의병활동에 동
참하자는 '안사람 의병가'를 통해 의병에 참여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하던 분이셨다고 한다. 고흥 류씨 집안에 시집와서 첫날밤을 보낼 때 사람들이 첫날밤을 구
경하러 밤에 오면서 등불을 잘못 해서 불이 났다고 한다. 족두리와 옷을 벗어 던지고 물동이를 직접 들고 와서 불을 껐다는 일화는 '윤희순 의사' 님의 적극적으
로 참여하는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고 한다. 이제 류인석 의병장 님이 지내시던 가정리에서 만든 의병마을로 향했다. 대학교 시절 김유정 문학 마을에 탐
방간 적이 있는데 참 이렇게 문화 역사 컨텐츠를 잘 만들어 놓은 것을 보니 문화창의 도시를 지향하는 원주 사람으로서 부러웠다. 한참을 버스가 달려서 도착한
의병마을에 내린 까마귀들이 있었다. 까치가 있었으며 더 좋겠다. 의병마을 해설사님을 따라 사당에 가서 향불을 올리고 기념관에 가서 구경하던 차에 벼루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의암 류인석 선생님께서 중국에 쫓겨 가셔서 생활하실 때 묵을 곳을 마련해 준 중국 분에게 돈 대신에 벼루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
런데 100여년의 시간이 흘러서 류인석 선생님의 후손이 중국에 가서 우연히 만난 그 때 도와주셨던 중국분의 후손을 만나 돈을 치르고 벼루를 다시 가져오셨다
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인연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는 비가 올락말락하는 길을 재촉해 마지막으로 들른 윤희순 선생님이 생가 터에
다다랐다. 아직 후손들 고흥 류씨를 거쳐 해주 윤씨 집안에서 사셔서 '윤희순 의사'님의 기념관은 지을 수 없으셨다고 한다. 물이 줄어든 우물 터에 가서 폴짝 뛰
는 개구리의 모습을 보면서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를 발견하면서 꾸물꾸물 흐린 날씨에 승천하는 용이 되어볼작시면. 천도만기(千倒萬起)하는 모습과 생
을 마감하시기 전에 쓰셨던 '해평윤씨일생록'에서 강조하신 '충효정신'은 우리가 꼭 본받아야 한다. '사전오기(四顚五起)' 네번 다운되고 다섯번 일어선 홍수환
세계 챔피언 처럼 나도 내년에 2020 도쿄 올림픽에 나가서 일본 선수와 겨뤄서 꼭 금메달을 따는 꿈을 꾼다. 면접에 떨어지고 좌절하는 우리 청년들, 공무원 시
험에서 낙방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우리 수험생들. 모두 모두 이 지겨운 싸움에서 끝내고 싶은 마음을 담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자. 결코 이러한 부정
적인 상황과 아픈 몸과 마음을 일으켜서 다시 한 번 해보자. 나와 너와 그리고 우리가 하는 외로운 싸움은 함께 도서관에 모여 공부하고 그럴 수록 집안에서 가
족들과 따뜻한 말을 주고 받으면서 서로를 사랑하자. 그리고 우리도 짝을 만나 어려운 형편을 뛰어 넘을 따뜻한 사랑을 품고 찬란한 해를 맞이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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