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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만난 우리의 삶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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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내희
댓글 0건 조회 959회 작성일 16-06-20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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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만난 우리의 삶 이야기

산에서 만난 우리의 삶 이야기 수강 소감문

도서관 앞에 「길 위의 인문학」 수강자를 모집한다는 플랭카드를 보고 신청을 하였는데, 플랭카드에 적시된 강의주제가 「山에서 만난 우리의 삶 이야기」이고, 탐방 장소가 지리산 둘레길이어서 지리산 둘레길을 탐방하며 인문학을 탐구하는 것으로 알고 신청하였다. 그러나 수강을 하면서 남명 조식의 학문과 삶과 유적지를 한하여 탐방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실망하였으나, 막상 강의와 탐방을 하는 과정에서 매우 만족스러운 결과를 산출하였으며 그 자세한 것은 아래와 같다.

1. 2016. 06. 04. (토) 10:00-12:00

강사(전병철, 경상대 경남문화연구원) 선생님은 “예전에 살았던 분, 그 분들의 삶을 통하여 현재 자신의 삶을 생각한다.”하셨고, 남명은 지리산에 오른 후 “看水 看山 看人 看世”(물을 보고 산을 보며 그 속에 살던 사람들을 보고 그 세상을 본다.) 하셨다. 조식이 칭송한 세 명의 군자는 한유한, 정여창, 조지서이다.

- 한유한은 고려 무신시대의 혼란기에, 벼슬은 통치자에 대한 아부하는 것이고, 약탈하여야 하므로 자신의 이상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지리산에서 은거를 하여 자신의 삶과 이상을 지켰다.

- 조지서는 연산군 때 학자로, 세자 연산군의 보덕(교사)을 하였다. 연산군이 즉위 후 외직을 자청하여 창원부사로 재임하다가,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 아래에 터를 잡아 정자를 만들고 지족(이 정도면 만족한다)이라 하였다. 갑자사화 때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 후 사신이 강물에 던져졌다. 조식은 “조지서는 의로운 사람이다. 거세 바람이 부딪치는 곳은 벽을 사이에 두고 있어도 춥고 떨리는 법이다.” 하였다.

- 정여창은 김종직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천성적으로 자연을 사랑하여 젊은 시절에 지리산 기슭에 터를 잡고 평생 수양할 계획을 세웠고, 1489년 4월 14일 내지 28일 김일손과 지리산을 등반하였다. 세자 연산군의 설서(책을 읽어주는)을 수행하다 지방관을 자청하여 인서(仁恕)를 실천하였다. 무오사화 때 곤장 100대를 맞고 귀향을 갔고, 7년 후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그 후 갑자사화와 관련하여 부관참시를 당하고, 중종 2년에 도승지로 증직되었다.

조식은 이 세 명의 군자를 “10층이나 되는 높은 봉우리 끝에 옥을 하나 더 올려놓은 것이며, 천 이랑이나 되는 넓은 수면에 달이 하나 비치는 격이다,” 하였다.

2. 2016. 06. 11. (토) 10:00-12:00

조식은 4번의 사화(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를 직, 간접으로 겪으며 관직에 관한 부정적인 사고를 하였다. 기묘사화(19세) 때에는 숙부가 죽었고, 을사사화(45세) 때에는 절친한 벗들이 죽었다. 그 영향으로 관직에 나가 자신의 뜻을 펼치기 보다는 은거하여 올 곧은 정신을 기르고 참된 학문을 닦는 삶을 추구하였다. 1555년에 나라에서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나라의 상황이 위태하므로 임금이 대오각성하기를 바라는 내용의 을묘사직소를 올려 수용하지 않았다. 61세에 산청 덕산에 산천재를 만들고 학문 연구에 매진하였다. 덕산에 정착한 것은 천왕봉이 웅장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조식은 12번 지리산을 유람하였는데, 지리산을 “청컨대 천석들이 큰 종을 보라!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네. 그러나 어찌 두류산과 같을 수 있겠는가?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네.” 하여 혼란스런 세속을 벗어난 지리산을 표현하였다. 또, 말년에 산천재에 입주한 것을, “봄 산 어디엔들 꽃과 풀이 없겠는가? 다만 천왕봉이 상제와 가까움을 사랑해서라네. 빈손으로 왔으니 무얼 먹고 살까? 은하수 같은 십리 강물은 먹고도 남음이 있겠네.” 하는 문답식 시를 지어 답하였다.

3. 2016. 06. 18. (토) 탐방

가. 산천재는 기둥이 좌우 4개, 앞뒤 2개인 소박하지만 단정하고, 기와로 지붕을 한 집이었다. 인접한 곳에 선비문화연구원이 있었고, 천왕봉과 중봉 써리봉이 보였지만, 노고단 방향은 보이지 않아서 지리산의 반쪽만 볼 수 있어 실망스러웠다. 그곳에 조식이 심었다는 남명매가 있었는데 큰지는 않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풍상을 견딘 역전을 용사를 보는 듯하였다. 강사 선생님은 “산천은 주역에 있는 것으로 강건, 독실하게 공부를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고. 지리산에 발원한 시천강이 지금은 댐 공사로 인하여 멀어지고 수량 또한 적지만 그 당시에는 가까이 있으면서 수량이 많았고, 천왕봉을 보고 삶을 비추어 보았다, 일제 때 불에 탄 것을 주춧돌이 그대로 있어서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었다.” 하였다. 낮은 높이의 4각형 돌담이 둘러서 있었다.

나. 다음에 산천재 뒤 산에 있는 무덤으로 향하였다. 흙길이 나무들로 인하여 그늘이었고 가꾸지 않은 것 같지만 세련된 멋이 있었다. 앞에 부인의 봉분이 있고 그 뒤에 있었으며 보통의 무덤보다 크고, 정면의 하단에 용이 있는 비석이 있고 뒤에는 돌담 뒤에 큰 소나무가 둘러싸고 있었다. (선생님은 “비석 밑에 있는 동물이 거북이라고 생각하지만 거북이는 무거운 것을 지는 것을 싫어한다.” 하였다.) 비석에 남명은 벼슬을 하지 않아서 처사로 하길 원하였으나 제자들이 징사(나라의 부름을 받은 사람)로 기록하였고, 사후에 의정부 영의정의 벼슬을 추수 받았고, 문정공으로 제수 받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무덤 옆에 별도의 제단이 있어 궁금하였는데 산신에게 음식을 바치는 곳이라고 하였고, 놀라운 것은, 옛 비석 세 개가 있었는데, 6.25전쟁 중에 군인들이 그것을 세워두고 사격 훈련을 하였다고 하며 살펴보니 여러 곳이 망가져 있었다. 그곳에서 보니 덕산의 마을이 조망되었다.

다. 길을 되돌아와서 남명기념관으로 갔다. 기념관 뒤에는 매화나무가 있고, 앞에는 큰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더운 날 이었지만 느티나무 그늘에 앉으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서 고마웠다. 우측에 옥으로 만든 조식의 동상이 있었는데 왼쪽 손에 상소문을 들고 있었고, 아래에 방울(성성자) 2개가 있었는데, 그것은 스스로를 깨우치기 위하여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울리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기념관은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듯 한가하였고 유물이 전시된 곳과 관리하는 곳의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고 실내에 유물이 곳곳에 전시되어 있었지만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한자로 작성한, 교서와 자필서신(보내지 않은 듯)과 덕산서원 등 건물들의 배치도가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한 것은 神明舍圖이다. 학문을 쌓는 것을 전쟁(마음을 지키는 것)에 비유하여 설명을 한 것으로, 임금을 중심으로 하여 성을 지키는 것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성의 출입문이 세 개가 있으니, 눈, 입, 귀이고 그것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즉 현대적으로 설시하면, 정보의 입력 수단이 눈과 귀를 조심하고, 출력 수단인 입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것만 보고 듣고, 올바른 말을 하여야 학문 수련에 정진할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선생님은 이 부분에서 “안 좋은 것을 처음부터 보거나 듣지 않아야지, 보고나서 잊으려고 하면 안 된다.” 하였다.)

라. 중식을 한 후 덕천서원에 갔다. 시골에 이렇게 큰 서원이 있다는 것을 예상하지 않았는데 규모가 컸다. 서원의 출입문 앞에 435년(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는 표지판 기준) 된 은행나무가 있어서 놀랐고, 더 놀라운 것은 그 나무에 기생하는 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것 이었다. 기는 자 위에 뛰는 자가 있고, 그 위에 날아가는 자가 있고, 그 위에 날아가는 자에게 붙어가는 자가 있다고 하더니 그 꼴이었다. 은행나무 덕분에 유명해졌지만 반면에 생육환경이 열악하여 제대로 성장하기 어려울 것 같고, 남에게 기생한다는 것의 궁박함에 연민의 정을 느꼈다. 덕천서원의 본관에 먹으로 기록한 서면(한자)이 부착되어 있었는데, 진주 정치인 최구식(부지사로 기록)의 이름이 기명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작년에 의식의 절차와 역할 분담자의 인명을 기록한 것 같았다. 나무로 된 건물에 올라가니 너무 편안하여 잠이 올 지경이었고, 바람이 솔! 솔! 불어와서 시원하였다. 그 뒤에는 숭덕사라는 건물은 조식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고 하며, 본관의 좌우에는 학사 역할을 하였던 건물이 각 1채씩 있었고 그 건물 앞에는 백일홍이 각 1그루씩 있었는데, 재질이 단단하여 가지를 매로 사용하였다는 설명을 참가자가 하였다. 나무 밑에 검은 바위가 있었는데 농담으로 “학업에 소홀한 학생들의 종아리를 쳤던 곳이다.”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학생은 벼슬하는 자가 아니고 공부하는 자이므로 프로의 근성으로 공부를 잘 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 정자가 있었는데, 그곳에 올라가니 강은 물론이고 덕산의 너른 들판이 조망되어 감탄을 금할 수 없었고, 문득 평화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 단속사지 터에 도착하여 좌,우 삼층석탑을 살펴보았다. 여타 절의 탑보다 확실히 덩치가 크고 탑 간의 간격이 넓고, 단정하고, 균형이 있어 보여 장인이 종교의 열정으로 만든 것 같았다. 양 탑의 간격으로 판단하면 큰 규모의 대웅전이 있었던 것 같았고, 불국사와 유사한 크기의 절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현재는 건물들은 망실되었고 탑만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 마치 본안소송을 하면서 증거는 제시하지 못하면서 주장만 일삼는 것 같은 황당무계함을 느꼈다. 민가에 포위된 탑을 둘러싼 비좁은 철제 울타리를 보니 어색하고 허전한 기분이 들었고, 지리산에 인접한 이런 산골에 이 정도의 절을 만들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탑의 옆에 고려시대 강희백이 단속사에 심었다는 매화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를 정당매(강희백이 정당문학을 지냈다고 한다)라 한다. 나무울타리안의 정당매는 고려시대에 심어 노화가 심각하여 검은 돌이 부축하는 듯하였고(머리가 좋은 사람이 만든 듯 처음 보는 사람은 돌을 매화나무로 착각하게 한다.), 본 나무가 고사한 후 다시 심은 것이라고 하여 수령이 500년을 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바. 남사예담마을에 도착하여 탑을 살펴보았다. 그 탑은 이성계의 사위인 이제와 경순공주의 후손들이 남사마을에 이주를 하여 건립한 것이라고 하며, 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제가 죽고 경순공주가 비구니가 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하였다. 그 후 한옥인 이씨고가를 방문하였는데 입구에 서있는 나무 두 그루가 인상이 깊었다. 서로 기대는 형상의 노거수는 그 자체로도 가치가 높아 보였고, 이 집의 가치의 대부분을 차지할 만 하였다. 집은 주인이 거주하는 것 같았지만 개방되어 있었고, 전통적인 농기구와 놀이기구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그 다음 아름답게 조성된 돌담길을 따라서 가니 泗陽精舍(선생님은 공부를 하는 곳이라고 하였다.)가 나타났다. 그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큰 규모이었고, 높이가 높고 튼튼하게 건립된 것 같았다. 대문을 통하여 입장하니 갑자기 큰 건물이 나타나 어리둥절하였고, 집을 천천히 둘러보니 칸칸마다 글이 적혀있고, 중간에 회합을 하는 곳인 마루가 있고, 마루의 양 옆으로 방이 있었다. 그리고 규모가 크지만 잘 지어진 건물이어서 인지 압도적이지 않아서 좋았다. 그곳에서 한옥체험도 할 수 있다고 하니 달 밝은 날 그곳에서 달을 구경을 하고 싶어졌다. 그곳을 나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매화라는 원정매(고려 말 문신 元正公 河楫이 식재한 600년 이상 됨)는 출입문이 잠겨있어 입장하지 못하여 구경하지 못하였고 대신 외부에서 보이는 700년?(그곳에 700년으로 기록된 안내판을 본 것으로 기억한다.) 수령의 감나무가 보여 놀람과 경이로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 감나무는 밑둥의 일부가 비어 있었으나, 오랜 세월동안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 자리에서 여전히 강건한 자태를 간직하고 있었다.

사. 유림독립운동기념관

에담마을에서 도랑을 건너니 곽종석을 주로 하는 유학자들의 독립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었다. 그곳에는 곽종석은 유학자의 대표로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글을 작성하여 제자인 김창숙에게 주어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도록 하였으나,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병을 얻어 출옥하여 서거하였다는 내용이 사진과 글이 전시되어 있었다. 곽종석은 일제가 2년형을 언도하자 “종신형으로 하지 않고 2년형으로 하였다.”며 일제에 항의를 하였고, 감옥에 구금된 후 감옥 관리가 항소를 하라고 하자, “국가가 없어서 항소를 못 하고, 반드시 항소를 한다면 하늘에 해야 할 것이다.” 하며 의연한 자세를 하였다는 내용이 있었다.

4. 강의와 탐방하는 내내 재미있어 시간이 가는 것을 몰랐다. ‘인문학이 이렇게 재미가 있을 줄이야’ 하는 생각에 놀랐지만, 옥에 티끌을 발견하듯이 구태여 문제점을 지적한다면 시간이 부족하여 체계적인 강의를 받지 못하고 주마간산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조식에 관한 탐방은 하루에 충분하지만 강의실에서의 수강은 시간을 넉넉하게 편성하여야 할 것 같다. 강사 선생님도 첫 강의를 마치고 “수강하는 태도가 대단히 휼륭하다.”는 칭찬을 할 만큼 재미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강사선생님의 열성적인 태도와 도서관 담당자의 친절하고 헌신적인 봉사가 있어서 수강자들은 편하게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고, 그것들이 융합되어 성공하였다고 평가한다. 도서관에 감사의 뜻을 표시하고 이런 기회가 많았으면 하는 청원을 한다. 수강을 하고 달라진 것은 흔히 ‘아는 것만큼 느낀다.’는 말이 있듯이 선생님을 모시고 설명을 들어가면서 관람을 하니 문화재의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문화재의 의미를 제대로 알려면 선행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남사예담마을은 천왕봉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여러 번 방문하였지만 물레방아 앞에서 사진만 찍고 지나쳤는데, 알고 보니 엄청나게 문화재와 기타 볼거리가 많았다. 내가 모른 것이 너무 많고 그동안 모르는 것을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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