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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의 산하, 사람의 향기를 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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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857회 작성일 16-06-16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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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의 산하, 사람의 향기를 뿜다"

주말, 직장인들의 바램은 아무 간섭도 받지 않고 늦잠을 자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은 아무리 일찍 일어나야 되고 힘이 들어도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다. 

토요일, 자꾸 나를 잡아앉히는 잠을 뒤로하고  내 옆지기와 같이 간단한 간식을 준비해서  

원주시립중앙도서관으로 향한다. 

"7시 40분까지 오라고 했는데.. " 도착하니 많은 분들이 벌써 버스에 탑승해 계신다.  

그간 여기저기서 뵈었던 반가운 얼굴들과 인사를 하고 자리를 잡아 앉는다.

8시 정각 버스가 평창을 향하여 출발한다. 오늘 함께 하실 분들은 모두가 시간을 잘 지키시는 문화시민분들답다. 지각을 하신 분이 한 분도 안계시니.. 

 

1시간여를 달려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을 낳은  평창군 봉평면  소재한 팔석정(八石亭)에 도착한다. 

경치좋은 곳에 정자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정자는 없고 절경만 있다.

조선시대 4대 명필가의 한 분이며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하더라"의 작자이신 봉래 양사언이 작명한 바위로 이루어진 정자한다.

양사언이 평창군수 시절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이를 기리기 위해서 본래 평촌이었던 지명을 봉래의 봉자와 평촌의 평자를 합쳐서 봉평이 되었다는

유래도 있다고 하니 한 관리의 선정은 후대에까지 길이 기억되는가 보다.

양사언이 후에 승급하여 강릉 도호부사가 된 이후 영서지역의 제일경으로 이곳을 꼽아 봄,여름,가을에 찾아 시문을 즐겼다는 설명과 서자이었던

양사언이 어머니의 비범함에 힘입어 적자로 인정받고 과거에도 나아가 백성을 위하여 일을 할 수 있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어머니의 자식사랑을 변함이 없는 듯 하다.

팔석정(八石亭) 바로 옆에 위치한 고종대에 세워진 봉산서재를 들려 강릉으로 향한다.  

 

강릉 경포바닷가에 위치한 횟집에서 회덮밥으로 배를 채우고 선교장으로 향한다. 

선교장(船橋莊)은 102칸의 본채와  그 부속건물로 구성되어 있는 현존 고대가옥 중 최고의 건물이다. 

1703년 효령대군의 자손인 이내번이 신축하기 시작하여 1800년대 중반까지 지속적으로 증축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인솔하여 주시는 홍인희 교수님의 덕분에 선교장의 관장님이신 이강백님의 설명을 직접 들을 수 있는 호사를 누리기까지 하였다.

23칸의 줄행랑과 안채, 3개의 사랑채, 안채, 별당, 연못에 활래정 등 우리 전통가옥의 아름다움과 기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외형뿐만이 아니라 조선시대 예술인들을 사랑하고 어려운이들을 보살피며 사대부들의 노블리스오블리제를 실천한 결과 일제강점기와

6.25동란을 거치면서도 이 건축물이 보존되었다니 고마운 일이다.

 

시간을 두고 이 편안한 공간에 더 머무르고 싶었으나 경포대를 향하여 이동한다.

경포대는 몇번이나 방문하였으나 처음으로 누각에 올라본다.

고려시대에 지어졌다는 누각이 잘 보전되어 있으며 제일강산(第一江山)이라는 큰 현판이 눈에 띈다.

아쉽게도 누가 언제 썼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주위에 작은 글씨가 빼곡한 현판이 여럿 있으나 내가 무식하여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니.....

경포호가 생긴 설화와 아직까지 경포호에 사람이 익사한 사건이 없어 군자호(君子湖)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음도 알 수 있었다.

또한 경포대의 5가지 달에 대해서도 설명을 들었다.

벚꽃이 흐날리는 봄날 하늘에 달이 뜨니 천월(天月)이요, 호수에 달이 어리니 호월(湖月)이고, 벗의 술잔에 달이 뜨니 준월(樽月)이요,

벗의 눈동자에 달이 뜨니 안월(眼月)이요, 그대와 나의 가슴에 달이 뜨니 심월(心月)이라 하였다 한다.

 

경포호 주변에 고려시대복장의 남녀가 마주한 포토존과 둘의 사랑이야기를 형상화한  조형물들이 줄지어 있다.

고려시대 중신 박신과 강릉기생 홍장의 사랑이야기다.

우리나라 관리와 기생의 사랑은이야기는 그 끝이 슬프거나 기생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 것이 통상적이나 박신과 홍장의 이야기는 함께 개경으로 돌아가 해로하였다는  Happyending이라는 특징이 있다. 

이 조형물들은 홍인희 교수님의 저서 '우리 산하에 인문학을 입희다' 2권을 강릉시장님이 보시고 설치한 것이라 하니 과연 관광도시 강릉시장님의 열성을 알 만하다. 

 

경포를 떠나 바로 옆 '허난설헌 생가터'로 향한다. 

'허난설헌 생가터'는 초당두부로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강릉시 초당동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 생가터에는 건축년도를 알 수 없는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중국에서 시인으로 유명세를 떨쳐 '난설헌집이 발간되면 종이값이 올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하니 난설헌은 진정한 한류의 원조라 할 수 있겠다. 

양천허씨 명문가에 태어나 오바 허봉과 동문수학한 손곡 이달(원주인)에게 동생 허균과 함께 수학하였고 

안동김씨인 김성립과 15세에 결혼하여 수많은 시문을 남겼으나 27세에 요절하였다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더 없이 안타까운 것은 난설헌이 ' 본인의 시작을 모두 불사르라 '유언하여 그의 작품이 모두 없어지고 단지 

그의 사후에 친정에 남아잇던 작 품들을 모아 허균이 ' 난설헌집'을 발간한 것이 남아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허씨 5문장가가 있었으니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 오빠 허성, 허봉, 허난설헌, 동생 허균이라하며, 그 유명한 초당두부는 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이 집앞의 우물물과 비싼 간수 대신 강릉 바닷물을 이용하여 두부를 만들게 함으로서 생겨난 음식으로 6.25당시 남편들을 잃은  많은 부녀자들의 생계수단이 되기도 하였고 현재까지 그 명성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초당순두부가 만들어진 고장에서 순두부를 맛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어 그만 원주를 향하여 발길을 돌려야 했다.

 

아침 8시부터 저녘 8시까지 12시간의 강행군이었으나 조금이라도 더 많이 알려주고 설명해주시려고 노력하시는 홍인희 교수님의 열정과, 참가자들이 조금이라도 불편함이 없도록 세심하게 배려하여 주신 원주시립중앙도서관 김해영 사서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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