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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향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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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창배
댓글 0건 조회 817회 작성일 16-06-15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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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향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 다녀와서

   

문학의 향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

-신석초 시인, 이문구 소설가 고향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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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월 나는 예산군립도서관에서 실시하는『길 위에 인문학』 강의를 신청했다. 인문학 하면 범위가 광범위하여 수강신청 하는데 조금 망설였다. 인문학 강의 받는 중에 2회중 1회를 받아야 문학탐방(서천, 보령)을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6월 3일 예산군립도서관 다목적실에서 2차 강의를 들었다.

 예산군립도서관 인문학강의실에 가보니 『문학의 향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의 주제로 김현정 세명대 교수님이 관촌 수필작가 이문구, 상록수의 작가 심훈을 찾아서 문학 강연이었다.

이날 참석한 사람은 학생, 교수, 주부, 직장인등 연령이 다양했다.

1차 강의는 5월 2일 예산군립도서관에서 <바리 침의 시인 신석초>, <금강의 시인 신동엽>을 찾아서 강연이 있었던 것을 알았다.

 나는 강의를 마치고 내일 버스 탐승하여 문학의 향기를 떠나는 여행 을 간다고 생각하니 밤에 잠을 설레었다.

 다음 날 30여명이 예산군립도서관 주차장에 모여 서천으로 향했다. 나는 집에서 나올 때 참가자에게 나누어 주려고 최근 문학지 40권을 가지고 나왔다.

나는 우리지역에서 ‘문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많다.’라는 것을 이번 기회에서 알게 되었다. 예산군도서관에서 실시한 ‘길 위의 인문학’에 참여하게 되어 나는 마냥 즐거웠다.

 

1. 신석초 시인를 찾아서

 

 우리일행 버스가 도착한 곳은 신석초가 태어 난 활성리 마을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걸어서 생가가 있는 신석초 시인 고향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도중에 가랑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신석초시인 생가터 표지석 양옆 나무가 많이 자라 잘 보이지 않아 찾는데 애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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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석을 지나 우측에 신석초 시인 묘가 보여 일행은 올라갔다.

‘천지’이란 시비가 있었다. 자연석에 시를 새겨 비가 내려 빗물에 비석에 새겨진 시구가 잘 보이지 않았다.

 

 

  천 지

        신석초

 

밝아오라

너의 높은 蓮花로부터

하늘로 솟아오른

너의 크낙한 심연으로부터

神龍이 살아 굼실거리며

오색 영롱한 벽으로

천둥 번개를 하며

진동하는 하늘의

정수리로부터

그 높은 심장으로부터

일월은 천지 개벽을 하고

天桃花를 피우고

태초에 하나의 무리의

조상을 낳았다니.

 

 

 신석초 시인은 1909. 6. 4일 충남 서천군 화양면 활동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천석군’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다. 많은 토지가 한국전쟁 때 토지개혁으로 당과 토지를 잃게 된다. 고 신석초 시인의 집은 현재 구자연씨가 살고 있다. 그는 문화재대목수이기에 옛 집터에 ‘신석초 시인 생가터 표석’을 세우게 되어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 일행은 서천에서 유명한 시인의 생가 터를 알리는 이정표가 없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신석정 시인은 16세 때 고향을 떠났다. 23세에 일본 호세이(法政)대학 철학과에 입학을 했다. 이후 그는 급진적인 사화주의 사상을 접했다. 신석초는 정보인, 이육사 시인 등을 만나 교감을 같이 했다.

 1946년 『석초시집』첫 시집을 발간했다. 많은 활동 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시인은 1975. 3. 8일 자택에서 영면을 했다.

 

신석초 시인 시비

 

우리 일행은 버스로 한산모시축제가 열리는 한산모시관에 도착했다.

작은 공원 오른쪽에 신석초의 시비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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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적거리는 한산모시축제 장을 떠나 우리일행은 점심을 보령에 도착하여 <관촌면옥>식당에서 갈비탕과 메밀소바 등을 먹었다.

식당주인이 시인이라 반가웠다.

 식당 입구에 ‘미리내’ 운동을 시행하고 있어 책꽂이에 책이 가득 들어 있었다. 책도 가격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1천원에서 1만원내면 마음껏 책을 가져가도 된다고 한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우리 일행은 다시 버스로 이문구 생가로 일행은 이동을 했다.

 

 

2. 이문구 소설가를 찾아서

 

 

 우리들의 큰 기대와는 다르게 보령문학관에 이문구 문학관은 있었으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흔적이 없어져 우리 일행은 서운했었다.

일행은 서운한 것을 달래며 남포벼루전시를 관람했다.

우리 일행은 다시 이문구 소설가 생가로 버스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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冠村마을

 

우리 일행은 버스에서 내려 한내문학회가 1995.10. 8일 세운 ‘관촌마을’비에서 김현정교수로부터 유녀시절 노닐고 유해가 뿌려진 곳에 대하여 설명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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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문학관에서 이문구 관련 유품 등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또 다시 이곳 冠村마을에서 느꼈었다. 생가는 다른 사람에게 팔려 문패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내천에서 물고기를 많이 잡았다.’라는 관촌수필을 의미하면서 걸어서 천천히 생가주변 마을을 돌아다보았다.

 이문구 소설가는 1941. 4.12 보령군 대천면 대천리 387번지 태어났다. 유년시설 시골에서 이문구 소설가는 한학을 할아버지와 사법대사서인 아버지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1950. 6.25 한국전쟁으로 그의 집안은 온전치 못했다. 아버지, 둘째· 셋째 형도 잃게 되어 그의 가정은 풍비박산되었다.

그는 고향을 떠나 좌판을 벌여 건어물과 마늘등을 팔았다.

1967년 1월『현대문학』등단하게 된다.

이후 그는 『일락서산』, 『화무십일』. 『행운유수』, 『관촌수필』작품을 발표했다.

1976년에는 임경애 여사와 결혼을 했다.

1977년에는 『관촌수필』을 발간했다.

2003년 2월25일 타계했다. 대학로 마로니 광장에 4대 문학단체 합동문인장으로 장례를 거행했다.

 

 3. 충남의 거목 두 문인 생가를 다녀와서

 

신석초 시인과 이문구 소설가는 당대에 화려한 문인활동을 했지만 우리일행의 기대와는 다르게 사후에 두 분 문학관이 없어 서운한 마음을 가졌다.

두 분 작가를 가난의 美學으로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 같다. 시대적 상황에서 문인들의 아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일부 문인은 생존시 문학비를 자비이든 문학단체 후배를 이용하여 문학비세우고 있다. 일부는 문인은 전국에 시비 등 5개 이상 세웠다.

무릇 이번 예산군도서관에서 문학의 향기를 떠나는 여행(문학탐방)을 통해서 “문인평가는 사후에 후세대와 문인후배가 진정한 평가를 한다.”라는 사실을 나는 알게 되었다.

예산군 공공시설사업소 예산군립도서관에서 “문학의 향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세명대 김현정 교수님의 훌륭한 강의, 최형규 팀장, 성열식 담당자가 우리 일행에게 치밀한 지역문인 탐방을 위해 준비해주신 노고에 우리 일행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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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산군립도서관에서 산뜻한 리무진 차량을 제공하여 편안함속에 우리 일행은 지역문학탐방을

마칠 수 있었다.

 내년도에 예산군이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도서관협회에서 주관하는 ‘길 위의 인문학’공모사업에 선정되어 전국문학 탐방을 통한 문인들의 삶을 이해하고 인문정신문화 진흥과 독서문화 활성화를 가져왔으면 한다.

 

 

 

※ 이 글은 아래 김현정 교수의 강의 집에서 일부 내용을 발췌했다.

- 바라춤의 시인, 신석초를 찾아서 -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다

- 관촌수필의 작가, 이문구를 찾아서 - 문학으로 순수와 진보를 포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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