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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닮은 사람들-南冥 曺植 선생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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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웅환
댓글 0건 조회 840회 작성일 16-06-20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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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닮은 사람들-南冥 曺植 선생을 중심으로

6월 18일(토)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 중 진주시립도서관(연암도서관)이 주최한 '산에서 만난 우리의 삶이야기' 현장 탐방이 있었다. 그에 앞서 6월 4일과 11일에 강의실 강연 있었고 이날은 '지리산을 닮은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는 날이었다. 

 

南冥 曺植(1501~1572) 선생의 생애와 그를 중심으로 한 지리산과 역사 인물에 관해 살펴보는 일정이었다. 경남 산청군 시천면에 위치한 山天齋부터 이야기는 시작됐다. 南冥이 지리산을 12번이나 유람했고 그의 나이 61세 때 아예 거처를 옮겨 지리산 아래 산청군 덕산에 山天齋를 짓고 72세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곳에서 생활했다. 

 

 그는 號를 지리산의 다른 이름인 方丈山이라 했고 장남의 이름을 次山이라 지을 만큼 지리산을 좋아했다. 그가 말년을 보낸 山天齋는 智異山 天王峯이 가장 선명하면서도 아름답게 보이는 위치이다. 재실의 이름은 周易의 '강건하고 독실하게 수양하여 빛이 발하도록 날마다 자신의 덕을 새롭게 한다'는 문구에서 따왔다. 

 

그는 이곳에서 평생 갈고 닦은  학문과 정신을 제자들에게 전수했다. 그 제자들이 南冥학파이자 학맥이 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의병을 일으켜 국난극복의 선봉이 되었다. 

 

南冥은 왜 환갑을 지내고 進甲인 61세 말년의 나이에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맨몸으로 지리산 자락을 찾아 山天齋를 지었을까?  

 

南冥은 조선 전기에 일어난 四大士禍를 직간접으로 모두 경험했다. 그가 태어나기 2년 전인 1498년에 무오사화가 일어났고 1504년 갑자사화,1519년 기묘사화, 1545년 을사사화를 직접 체험했다. 각 사화를 거치면서 친인척과 주변 친구들이 사약을 받는 등의 숱한 픔을 겪어야만 했다. 

 

선비는 무릇 세상에 나아가 뜻을 펼치는 출사를 해야하고 또 한편으론 물러나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은거를 상황에 맞게 대처해야 했지만 그는 세상에 나아가기보다는 은거와 은둔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젊을 때 부모님과 주변의 뜻에 따라 과거 공부에 매진하기도 하지만 을사사회를 계기로 그의 절친한 벗들이 사약을 받으면서 세상과는 완전 담을 쌓았다. 

 

 1555년 조정에서는 南冥의 학문과 덕행을 높이 평가하여 丹城현감을 제수했는데도 이 관직조차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상소를 올려 당시 나라 상황이 몹시 피폐돼 있음을 지적하고 임금이 대오각성하기를 촉구했다. 이 상소가 바로 '乙卯辭職疏'이다. 조선 오백년 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는 이 사직소에서 나라 상황을 백년이나 벌레가 갊아먹어 속이 텅빈 나무와 같아 언제 쓰러질지 모른다고 비유했다. 또 당시의 폐단을 낱낱이 거론하고 감추어진 썩은 부위를 드러냈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이 들을 올린다고 마무리했다. 가히 신념과 뜻을 가진 참선비다운 배짱이었다.   

 

南冥 이 같은 시대를 살았던 退溪 李滉과는 달리 지방에 은거하고 운둔하며 학문의 길에 매진했던 이유도 바로 이런 기질에 있었다. 그 기질의 중심축이 바로 지리산이었던 것이다. 

 

그는 61세에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아우에게 넘겨주고 홀로 산청 덕산으로 들어와 산천재를 짓으면서 세상사람들에게 던진 싯귀가 있다. 

 

春山底處无芳草 只愛天王近帝居 

白手歸來何物食 銀河十里喫猶餘 

봄산 어디엔들 꽃다운 풀 없겠는가?

다만 천왕봉이 上帝와 가까움을 사랑해서라네

빈손으로 왔으니 무얼 먹고 살꼬?

은하수 같은 십리 강물 먹고도 남음이 있네 

 

 南冥은 산천재에서 오직 후진양성에 힘썼다. 개인의 자질에 따라 가르치고 제자백가를 섭렵하여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실용교육과 학문을 중시했다. 성리학 일변도가 아니라 천문과 지리, 의학, 궁마, 진법 등을 다양하게 교육했다.

 

그는 67세 나이에 宣祖 임금이 즉위하면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나아가지를 않았고 68세에는 戊辰封事를 올려 당시의 정치폐단과 이를 개혁할 대안을 제시하였다.  

 

일생동안 올곧은 선비의 삶을 지키며 국정 쇄신과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던 그는 1572년 2월 8일 72세의 나이로 산천재에서 일생을 마감했다. 선천재와 함께한 만 12년의 세월이었다. 

 

선생의 부음을 전해들은 宣祖는  "사람들은 진실을 꾸미고 순박을 깨뜨려 세속에 아부했지만 公은 뜻을 굳게 지켜 끝내 변절하지 않았다"고 칭송했다. 임금은 또 스스로를 가리켜 "小子는 어디에 의지하며 백성은 누구에게 期望하랴"고 탄색했다. 

 

南冥선생의 학문은 敬과 義로 집약된다. 敬以直內 義以方外, 즉 내적 수양을 통해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하여 근본을 세우는 것이 敬이요, 義는 敬을 근본으로 하여 제반사를 대처함에 있어 과단성 있게 실천하는 삶을 강조했다. 그는 특히 학문과 실생활에서의 삶이 일치되는 것을 주장했고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을 마음 아파하며 백성을 중시하는 민본사상과 위민정치를 역설했다. 

 

南冥 선생이야말로 지리산이 낳은 사람이자 지리산 같이 살다간 사람이었다. 이로움에 뜻을 굽히지 않았고 해로움에 절개가 변하지 않는 선비의 우뚝한 지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길이었다. 그것이 바로 지리산이다. 

 

지리산은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고 그 자리에 웅장하게 서 있음을 사랑했던 南冥 曺植선생. 그가 혼탁한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 외곬 삶을 살았던 것도 바로 지리산의 이같은 기질을 스스로 닮으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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