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문화관도서관]500년 역사, 조선 왕조 실록 -강화도 정족산사고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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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그 섬에 다녀왔습니다.
어린 아들들과 강화도 갯벌 다녀온 뒤로 그새 12년 세월이 훌쩍 흘러가고 기억 속에서조차 가물가물 해져가는 그 섬을
<길 위의 인문학>에서 역사탐방으로 다시 가보게 되었습니다.
이번 강화행은 그 옛날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되었던 <정족산사고>를 찾아가보는 뜻깊은 역사탐방이랍니다.
동문 주차장에서 정족산사고의 수호 사찰인 <전등사>로 오르는 계단을 거쳐 굽이굽이 길고 긴 오르막 산길을 걸어올라 찾아갑니다.
이곳이 정족산성입니다. 본디 이 축성의 이름은 <삼랑성>이라고 합니다.
삼랑성(三郞城)..
사적 제 130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 41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고려사>에 따르면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하였다 하여 '삼랑성'이라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는데 삼국시대에 이르러 막돌을 맞춰가며 쌓았고 성채 안에는 막돌을 쌓은 석성으로 축성합니다.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며 더욱 견고하게 보강되었습니다.
성 안에는 <전등사>를 비롯하여 고려시대에는 <가궐>, 조선시대에는 <정족산사고>와 <선원보각>이 있었습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났을 때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쳐 정족산사고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족보인
<선원보>를 지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정족산성의 출입문이자 정족사고의 수호사찰인 <전등사>로 들어가는 홍예문..
양헌수승전비..
지방유형문화재 제26호
양헌수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비로 앞면에는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巡撫千總梁公憲洙勝戰碑)"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1848년(헌종 14) 무과에 급제하여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났을 때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쳤습니다.
승전비에는 양헌수를 비롯하여 367명이 프랑스군 군대를 맞아 활약한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크기는 전체 높이 181cm, 비신 높이 163cm, 너비 60cm, 두께 27cm
승전비 앞에 사람들이 오며가며 쌓은 수많은 소원의 작은 돌탑들..
이곳에서 신병주 교수님의 정족산성과 양헌수 장군에 관한 역사이야기를 듣고 갑니다.
동문에서 전등사 대웅전까지 긴 산책로가 나 있습니다.
전등사 윤장대(輪藏臺).. 보물 제684호(복제품)
윤장대란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윤장대를 한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합니다.
언덕 위로 전등사가 보입니다.
전등사 대조루(對潮樓)..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전등사로 37~41
<대조루>는 사찰의 불이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 누각으로 전등사 경내로 들어가는 출입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 지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고려말에 쓴 목은 이색의 '전등사' 시에서 대조루를 읊은 시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에도 이 대조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이 대조루는 1932년 사찰 안의 건물들을 수리하면서 다시 지어진 것이랍니다.
바닷가에 지어진 사찰이라 그런지 대조루 이름에 밀물과 썰물인 '조수'를 뜻하는 '潮'가 들어간 것 같습니다.
대조루 누각 밑으로 해서 계단을 올라오면 전등사 마당이 나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때마침 전등사 축제기간이라 좁은 공간에서 마당극 공연이 열리고 있어 어수선하였습니다.
전등사(傳燈寺)..
인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온수리 635)
고구려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이 지은 고구려 절.
처음 이름은 진종사(眞宗寺)라 하였습니다.
고려 고종 때 몽골침입을 피해 이곳 강화로 천도를 하고 39년을 보내고 그의 아들 원종이 개경으로 환도한 후 최씨 무신정권에서
벗어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원나라에 항복하고 이후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어서 왕위에 오른 충렬왕(재위 1274∼1308)에게는 첫 왕비 정화궁주가 있었는데 원나라 세종 쿠빌라이 칸을 만나고
통원을 결정하고 부마체제로 바뀌면서 충렬왕이 원나라 제국대장공주와 다시 혼인을 하면서 정화궁주는 뒷선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남편에게 버림 받은 정화궁주가 이곳 강화도의 절을 찾아와 옥등과 대장경 경전을 전하게 됩니다.
옥등을 전하였다 하여 '전등사'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이때 정화궁주는 승려 인기(印奇)에게 대장경을 인쇄하여 간행해서 이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고려 제27대 충숙왕, 28대 충혜왕, 30대 충정왕 때에 수축하여 전등사를 키웁니다.
현재 남아있는 전등사는 1621년(광해군 13)에 다시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 건물인데, 1625년(인조 3)과 1906년에도
중수하였으며, 또 일제 강점기에도 두 차례 중수하였습니다.
이 절에는 보물 제178호 전등사 <대웅전>, 보물 제179호 전등사 <약사전(藥師殿)>, 보물 제393호 전등사 <범종>이 있습니다.
또 대웅전에는 1544년(중종 39) 정수사(淨水寺)에서 다시 펴낸 <묘법연화경>의 목판 104장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전등사는 효종 때 지어진 <정족산사고>의 수호 사찰이 됩니다.
전등사 대웅보전.. 보물 제178호
축제 기간이어서 그러겠지만 대웅전 앞에 주렁주렁 내걸린 글귀로 인해 정갈한 사찰의 정취가 사라져서 아쉽습니다.
빛 바래기는 하였어도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인 공포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으로 되어 있어 화려합니다.
기둥은 가운데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였고 네 모서리 기둥 윗부분에는 용머리 대신 쪼그려앉아 있는 벌거벗은 여인상을 조각하였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 절을 짓던 목수의 사랑을 배반하고 도망간 여인을 조각한 것으로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짓게 하기 위해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고 합니다. 교수님 말씀으로는 원숭이 조각이라고도 합니다.
불교적 해석으로는 원숭이들의 석가모니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기 위해 조각상을 넣었다고 합니다.
전등사의 상징이 원숭이 여인이런가.. 곳곳에 원숭이 형상이 있습니다.
미처 안에는 들어가보지 못했는데 자료에 따르면 내부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천장은 용, 극락조, 연꽃 등으로 채색이 되어 화려하고
부처를 모신 불단과 닫집의 장식도 무척 화려하다고 합니다.
전등사 축제를 맞아 특별히 마니산 참성단의 칠선녀가 하강하였나봅니다.
인증샷을 찍고계신 신병주 교수님..
전등사 향로전..
전등사 삼성전..
전등사 범종각..
범종은 보물 제393호
범종각 옆의 운치있는 나무..
전등사 뒤쪽으로 100m쯤 걸어올라가니 이정표가 나옵니다.
강화 정족산사고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던 사고인 <장사각>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였던 <선원보각>이 있던 곳입니다.
원래 조선왕조실록을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 네 곳에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본을
평안도 묘향산사고로 옮겼다가 다시 강화 마니산으로 옮기게 됩니다.
1660년(현종 1) 정족산성 안에 사고 <장사각>를 마련하고 다시 이곳으로 실록을 옮긴 다음, <선원보각>도 함께 지었다고 합니다.
1910년 국권침탈 이후 정족산사고의 실록은 서울로 모두 옮기고 이후 서울대 규장각에 보존, 관리하고 있습니다.
1931년 간행된 <조선고적도보>에는 옛 정족산사고 사진이 실려있는데, 이후 모두 없어졌던 것을 사진을 참고하여
1998년 두 건물을 복원하고 옛 현판의 장사각과 선원보각을 다시 달았다고 합니다.
1931년 간행된 <조선고적도보>에 나오는 옛 정족산사고..
1998년 새로 복원된 정족산사고..
장사각..
선원보각..
장사각(藏史閣)과 선원보각(璿源寶閣) 현판은 옛 건물에서 떼어 보관하던 것이라고 합니다.
"자. 자유시간 드리겠습니다. 정족산사고를 둘러보세요."
우리 건축물에 관심 많은 느꽃지기라 앞뒤로 돌아보고 구석구석 올려다보며 신이 나서 여러 컷 찍어왔습니다.
새로 지어져 세월의 더께가 앉지 않아 고풍스런 멋은 없지만 잘 지어진 전통 건축물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장사각으로 들어서며..
마루 밑의 구멍들을 보니 온돌을 설치하였나 봅니다.
대청마루가 깔린 사고..
개방하지 않고 있는 선원보각..
정족산사고 건물 뒤꼍..
정족산사고지를 나서자마자 신병주 교수님께서 느닷없이 후미진 산길로 일행을 이끄십니다.
이 숲속은 천년 비밀이 담긴 숲입니다.
1232년(고종 19) 원나라의 침략때 무신정권의 최우가 강화도로 천도하여 1232년~1270년, 39년간 머물게 됩니다.
1225년(고종 12) 압록강 근처에서 몽골의 사신 저고여가 고려에 왔다가 귀국하던 중 살해된 사건이 일어납니다.
사실 여진족에 의해 죽은 것이지만 몽골은 고려에서 죽인 것이라 하여 대군을 이끌고 1차 고려에 쳐들어옵니다.
하지만 몽골군은 1차 침입 때 귀주성에서 고려군에 의해 격퇴되고 그 다음 2차 침입 때는 용인 처인성에서 격퇴당합니다.
이후로도 계속 몽골의 침입이 이어지자 고종은 당시 막강세력인 무신정권 최우에 의해 강화도로 천도를 하게 됩니다.
정족산 가궐지(鼎足山假闕址])..
강화군 향토유적 제11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吉祥面) 온수리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숲속 터는 고려 시대에 궁궐이 있었던 옛 궁궐터로서 궁궐들은 몽골 침입으로 불에 타 없어졌답니다.
이곳에 궁궐을 지으면 나라가 부강해진다 하여 궁궐을 지어 왕이 머물지 않을 때에도 금침을 깔고 의복을 놓아두었다고 합니다.
가짜 궁궐터라는 뜻으로 <가궐지>라고 합니다.
원종은 개경으로 환도한 후 지긋지긋한 무신정권에서 벗어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원나라에 항복을 하고 앞서 본 것처럼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고 그의 아들과 자손들은 '충'이라는 이름을 달고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까지
이어지다가 31대 공민왕부터 왕의 이름의 계보가 달라집니다.
이곳 <가궐지>에서 신병주 교수님께서 깜짝 이벤트로 '정족산성' 4행시를 제안하셨습니다.
교수님께서 펴내신 책 두 권을 걸고 좋은 4행시를 지어보라고 하기에 함께 간 일행들이 4행시를 짓습니다.
끙끙거리다가 어설프나마 짧게 4행시를 지어보았습니다.
정족산성..
정녕 이 강화도가 역사의 섬임을 알겠네
족히 천년 세월의 자취가 곳곳에 서렸구나
산성을 오르며 옛 사람의 숨결 느껴보네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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