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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시립중앙도서관] 참가후기(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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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유진
댓글 0건 조회 811회 작성일 16-10-20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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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시립중앙도서관] 참가후기(박상현)

지역 탐방 릴레이

-강원의 산하, 홍천을 찾아서-

홍천군은 강원 영서 내륙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며, 홍천에서 발원한 맑고 깨끗한 홍천 강과 원시림이 잘 보존되어 청정함과 풋풋한 인심을 자랑하는 곳이다. 남한의 시·군 가운데 면적이 가장 넓기도 한(서울 전체 면적의 2.8) 홍천은 군 전체의 87%가 산지로 형성되어 오염되지 않은 청정 휴양지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있다. 또한 나라꽃 무궁화를 보급하기 시작한 남궁억 선생의 애국충절의 고장이며, 선조들의 숨결이 담겨있는 각종 문화유적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고장이다. 계절마다 다양한 풍경을 연출하는 아름다운 산들과 시원한 계곡들은 홍천의 색다른 아름다움을 더한다.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한국도서관협회 주관하는 강원의 산하, 사람의 향기를 뿜다(강원의 산하, 명불허전의 문학·예술가를 낳다)라는 테마 기획으로 원주 시립중앙도서관이 시행하는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2차 프로그램(6/1718)에 참가를 하였다. 홍인희 강원인문진흥원장이 진행한 프로그램은 전날에는 강연을 듣고 이튿날 탐방을 하는 형태로 진행 되었다.

17일 홍인희 강원인문진흥원장은 강원도를 대표하는 문인들이라는 주제로 조선시대 강원도를 대표한 문인인 5세 신동 매월당 김시습,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남긴 허균, 김삿갓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김병연을 다루었고, 이어 암울했던 일제시대 인물로 김유정, 이효석, 박인환, 김동명을 다루었다. 강연 도중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바 있는 송강 정철과 망상 해수욕장으로 널리 알려진 망상 등 강원도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도 들려 주었다.

탐방이 있던 18일 아침 8시 시립중앙도서관 정문에서 40명 가까운 탐방 인원을 태운 관광버스가 홍천을 향해 출발했다. 홍천으로 가는 길 위의 간판들은 홍천이 인삼과 한우의 고장임을 알려주고, 제곡리로 가는 버스 차창가로 마치 어린 최승희를 기억하라는 듯 논 위를 날아다니는 몇 마리 백로가 보였다.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홍천군 남면 제곡리에 도착하였다. 최승희는 1911년 홍천군 남면 제곡리에서 부친 최준현과 어머니 밀양박씨 박성녀 사이에서 22녀중 막내딸로 태어나 다섯 살까지 홍천에서 살다 경성(현재의 서울)으로 이사하여 숙명여학교를 졸업한, 조선의 혼과 전통을 바탕으로 세계무대를 종횡 무진하던 불세출의 무용가로 세계적 인기를 구가하던 현대판 한류스타다. 일찍이 한반도와 일본, 중국 등 동양권 무대를 섭렵한 후 미국, 유럽을 거쳐 중남미 지역까지 진출하여 150여 회 순회공연을 선풍적인 갈채 속에 마쳤던 국제적 슈퍼 스타며 진정한 한류의 원조였다. 당대 내노라 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물론 유력 정치인까지 그녀의 뛰어난 매력에 빠져 흥미롭고 경이로운 일화를 많이 남겼다. 1차 파리공연에서 초립동춤이 큰 반향을 일으켜 그곳 여인들 사이에서는 한동안 조선식 초립동 모자가 유행하였으며, 파리 국립극장 샤이오에서 2차 공연할 때에는 20세기 미술계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 마티스를 비롯한 저명한 영화감독 쟝콕도, 노벨문학상 작가 로맹롤랑 등도 객석에 자리한 가운데 보살춤이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미국 뉴욕 공연에서는 승무’, ’무녀’, ’낙랑벽화’, ’신라궁녀의 춤등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자 존스타인백(‘에덴의 동쪽작가), 전설적 배우 찰리 채플린과 로버트 테일러, 세계적 지휘자 스코토피스키 등 국제적 저명 인사들이 다수 관람하였다. 오늘날 최승희는 그녀를 예찬하는 많은 글에서 모던댄스의 어머니로 불리우는 전설적인 무용수 이사도라 덩컨에 비유되곤 한다. 그러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최승희도 무대 밖 세상에서 일제 강점기를 거쳐 남북이 분단되는 왜곡된 시대상황에 휘말려 비운과 질곡의 삶에 허덕였다. 스무 살에 결혼한 와세다 대학교 출신 남편 안막(본명 안필승)이 골수 사회주의자로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카프) 활동을 하다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최승희 마저 요시찰 대상이 되었고, 끝내 남편을 따라 월북함으로써 우리들에게 잊힌 비운의 인물이었다. 최승희 선생 생가 터, 최승희 선생이 유년시절 물을 깃던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물동이 춤을 배우던 옻나무재 우물터, 너래 바위를 둘러보았다.

홍천읍 검률리에는 이괄암(이괄바위)과 이괄산성(대미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괄 하면 떠오르는 것은 조선시대 인조반정이괄의 난이라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괄은 원래 13세에 벼슬길에 나선 문무를 겸비한 무장으로서 인조반정 때 공이 제일 컸음에도 2등 공신으로 책봉,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외지로 부임하고,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여 군사조련, 성책보수, 진의 경비강화 등 직책에 충실하였지만 인조반정 후 반정을 주도해 정권을 장악한 공신들이 반대 세력에 대한 경계가 심해 반역 음모 혐의로 잡히는 자가 많았고, 이괄 또한 그러한 피해자 중의 하나였다. 군중에 머무르고 있던 외아들 전을 모반의 사실 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서울로 압송하기 위해 금부도사와 선전관이 영변에 다다르자 이에 격분하여 난을 일으켰고 끝내 신원 회복을 하지 못한 비운의 인물이다. 당시의 반란이 원인이 되어 청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청의 세력을 막아낼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로 백성들에게 회자되기도 하였던 인물이다. 민간의 아기장수 설화등의 배경 인물이었고, 조정에서는 이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애를 썼고, 그러한 흔적들로 청개구리 설화등이 민간에 유포되기도 하였다. 인절미, 피맛골 등의 말이 생겨난 배경이기도 하다.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란 각자에게 알맞은 몫을 주는 것이다.” 라는 말과 함께 도둑 에게도 다섯 가지 도가 있다고 한 춘추전국시대 노나라 공자와 관련된 도척의 일화 등을 진행자로부터 들으면서 우리가 정사로 알고 있던 역사의 감춰진 배경에 얼마나 많은 왜곡들이 난무하는 가를 느끼게 되었다.

곤드레나물밥 정식으로 맛있는 점심식사를 한 뒤, 공작산 자연생태 숲을 지나 연 잎이 활짝 반기는 연못과 보물 월인석보를 간직하고 있는 조계종 제4교구 수타사였다. 수타사는 영서 지역 최고의 사찰 중 하나로 708년 원효대사가 창건(? 원효대사는 686년에 입적)하고, 조선 세조의 비인 정희 왕후 태가 묻힌 곳이라 세조와의 인연이 깊어 세조 때 보호 사찰로 지정되었던 사찰인데 수차에 걸쳐 명칭이 변경되어 온 몇 가지 점에서 미스터리 한 점을 갖고 있는 사찰로 19711216일 강원도유형문화재 제 17호로 지정되었다.

미스터리한 점이란 소나무에 기생하는 오래된 뽕나무가 있었다는 점으로 오랫동안 기생하던 뽕나무가 3년 전에 죽었다고 한다. 소나무 껍질은 까져 있는데 그것은 일제 강점기 때 송진 공출 때문이었다고 한다.

또한 지난 83년 보물 745호로 지정된 월인석보가 보관되어 있는데, 가로 21세로 31크기로 권 17, 1821책으로 지난 70년대 초 사천왕상을 수리하기 위해 해체했을 때 사천왕상의 복부에서 발견돼 복장유물로서 수타사에 소장돼 왔다. 월인석보는 세조가 왕자 시절 지었던 석보상절(한글 반포 후 최초로 한글과 한문 병용 기록물)과 이를 본 부왕 세종이 찬탄 하며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나중에 세조가 합본하여 지은 책이다. 사천왕상은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수미산(須彌山)의 중턱에 있는 사왕천(四王天)의 주신(主神)인 네 명의 외호 신을 말하는데 동방 지국천(持國天), 서방 광목천(廣目天), 남방 증장천(增長天), 북방 다문천(多聞天) 등 사방의 천왕을 사천왕이라 한다. 보물이 발견된 곳은 . 월정사에 보관 중이던 보물 745호 월인석보는 총 사업비 4억 원을 들여 특수 경보 안전장치 및 무인감시시스템을 갖춘 25평 규모의 수타사성보 박물관이 2005510일 개관 되면서 박물관이 없어 도난 및 훼손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지난 99년 월정사에 임시로 이관해 보관해 오다가 동년 10월 준공식 때 수타사로 되돌아와 보관되고 있으며, 월정사에서는 월정사 박물관 보관용 영인본을 제작해 두었다.

사찰을 둘러본 뒤 가까이 있는 용담을 보았다. 용은 동양 문화권에서는 기린, 거북이, 호랑이와 더불어 4대 신물의 하나로 여겨진 신성한 것으로 비가 내리지 않을 때 비가 내리려면 용이 승천을 해야 한다는 의식이 횡행하던 무렵에는 잠을 자고 있는 용을 깨우는 의식으로 기우제를 지냈고 그 때 침호두(沈虎頭)라고 호랑이 머리 또는 호랑이 머리 형상물을 물속에 던져 넣어 용을 깨우는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횡성의 원래 지명은 횡천 이었는데 홍천 때문에 바뀌었다고 한다.

어느덧 오후 4시가 다되어 간다. 탐방 일정표상으로는 동학혁명군 전적비와 평창 봉평의 화서 이항로 생가 터를 둘러보는 것이 남았는데, 시간상으로 모두 탐방하기에는 부족하다. 일행을 이끌고 있는 홍인희 강원인문진흥원장은 얼마 전 탐방일행의 많은 사람과 화서 이항로 생가 터를 보았으니 이번 탐방에서는 빼자고 한다.

구한말 위정척사의 정신으로 조선의 정체성을 지켰으며 유인석, 최익현, 양헌수 같은 항일투사를 배출한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1792~1868)는 조선 문화의 절정기인 18세기 말에 태어나 그 문화의 사양 시기에 살면서 국가의 영고성쇠를 직접 체험했던 역사적 인물이다.

강원도 평창 봉평에 봉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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