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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시립중앙도서관] 참가후기(하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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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유진
댓글 0건 조회 704회 작성일 16-10-20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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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시립중앙도서관] 참가후기(하영호)

길 위의 인문학

-원주 폐사지 석물의 상징과 국제성

 

3년 전 서울의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길 위의 인문학” 12일 과정을 참석한 후 두 번째 프로그램을 원주에서 가졌다. 심재관 교수님이 강의하신다기에 망설이지 않고 참가신청을 했다.

 

내게 원주는 지금 살고 있는 도시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 강의를 통해 알지 못했던 새로운 부분을 경험하게 되었다. 지난여름 원주시립도서관은 내게 큰 그늘이 되 주었다. 냉방이 잘 되어있기에 책 읽고 글 쓰고 어려움을 달래주는 벗과 같은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가을이 되어 강의를 듣는다. 불교에 관심이 많으나 나이 오십이 지나서야 절집 몇 군데를 둘러본 정도. 그러다가 강의를 통해 중동 인도 중국 한반도. 어느 문명이나 홀로 형성되는 것은 없나보다. 초기 불교 유물에서 헤라클레스가 수호신[사천왕(四天王)] 역할을 하는 것을 보고 너무 놀라기도 했다. 멀리 지중해 지역의 문명이 아리안을 통해 인도지역까지 영향을 준 것이다. 그리고 북방천왕(北方天王)으로. 손에는 칼 대신에 탑을 들고. 북방천왕은 다문천왕(多聞天王)이라고도 불려졌다. [산스크리트어로 sramana, sra 듣다 mana 널리]

 

수도자 중에는 사찰에 속하지 않은 재가수도자들도 많이 있었다. 이들을 사문이는 산스크리트에서 유래된 말이다. 중국어로 사문(沙聞)이라고 한다. 하지만 한자로는 거의 사문(沙門)이라고 표기한다. 들음의 뜻 대신 문중이라는 의미가 강화된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으로 건너와 본디 뜻이 변형되는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새로운 문명과 만나 새로운 그 무엇을 만들어낸다. 흐름이다.

 

이런 과정을 알아가는 것은 내게 큰 기쁨이 된다. 여러 종교의 깊이[靈性]에 관심이 있으나 배울 곳을 잘 찾지 못하다가, 집 곁의 도서관에서 알게 된 것이다. 한반도에 건너와서도 이 흐름은 그대로 이어진다. 헤라클레스의 힘, 칼을 든 수호신 그리고 부처님을 상징하는 탑을 든 북방천왕. 문명이란 이렇듯 흐르는 것이다. 여기에 애국적 민족주의가 끼어들면 곤란하다. 우리의 독창성과 우수성에 지나치게 집착하다 보면, 뜻 깊은 문명의 흐름을 놓칠 수도 있겠다. 내게 가람의 사천왕은 불교세계로의 길벗이었다. 해학(諧謔). 강렬한 절집의 사천왕상과 희미하나마 석물에 남겨진 선().

 

우리에게는 시각적 상징물이 부족하다. 대부분의 목조 건물은 불타버렸고, 석물들만 남은 것은 아닌지? 그나마 남아있는 석물들에 비춰지는 시각적 형상[image]을 온전하게 읽어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흔적이 희미하게 지워지기도 하고, 새겨진 시각적 이미지가 상징하는 바를 헤아리기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원효, 의상과 같은 위대한 사상가 말고는 소중한 불교유산이 없는 것일까?

왜 고려시대로 와서는 아름다운 불교문화의 꽃을 피우지 못했을까?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 그리고 조선왕조. 긴 흐름 속에 우리에게 불교는 무엇이었을까?

불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몇 번의 이야기는 힘 있게 나를 파고든다. 가볍게 툭툭 던져지는 말씀. 하지만 그 울림은 크게 키워진다.

 

 

 

 

 

그리고 답사여행이다.

 

나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유홍준 교수의 가르침이 싫다. 시각적 상징물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하지만 현장에 가자 무력감만 다가온다. 석물(石物) 하나하나가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머리로만 볼 수도 없고, 가슴으로만 볼 수도 없다. 내게 다가선 알 수 없는 기운 같은 것이 있다. 꽉 채워진 가람보다 폐사지(廢寺趾)가 주는 힘이 있다고. 영주 부석사에서 느꼈던 기운 같은 것이 있다. 넓은 터, 꽉 채워지지 않은 넉넉함. 건물마저도 철저하게 상업적 계산만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에 찌든 이들-나는 지닌 것은 없으나, 지니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

 

폐사지는 한 발자국 더 들어간다. 오랜 옛날로 시간여행을 하게하는 신비한 영력(靈力)이 있다. 잘 다듬어지지 않아도 좋다. 거친 바람이 불어온다. 넉넉함을 유지하는 가람보다, 더 넉넉하다. 황량함 그 너머에 넉넉함이 주어진다. 이는 느끼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축복이 아닐까?

 

우리 불교가 지닌 넉넉함이다.

 

 

 

폐사지.

그 이름이 지니는 카리스마가 있다. 버려진 자들. 아니 남은 자들이다. 언젠가 우리의 영혼 안에 되새겨놓아야 할 흔적. 아니 이어져오는, 이어가야만 하는 얼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은 것이 공존하는 자리다. 관음(觀音)의 자리다. “소리를 본다.” 울려오는 소리의 이미지를 보지 못하면 하나의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을까? 내가 알아듣든, 알아듣지 못하든 우리에게 속삭여준다. 보이는 것만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못 본다면... 얼마나 아쉬울까?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듣고.

 

이제 나의 여행은 출발선에 놓였다.

 

원주를 고향으로 삼아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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