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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립도서관]월봉서원, 필암서원에서 호남도학 정신을 만나다.후기 -김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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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숙진
댓글 0건 조회 583회 작성일 16-06-10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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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립도서관]월봉서원, 필암서원에서 호남도학 정신을 만나다.후기 -김순와

남도 서원 그 안에 깃든 정신

월봉서원, 필암서원에서 호남도학 정신을 만나다.

도서관 현관 앞을 지날 때면 나의 발걸음을 머물게 하는 것이 있다. “책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스스로 보인다.(삼국지 위지중에서)”라는 문구이다. 그때마다

! 그래서 나는 아직도 뜻이 스스로에게 보이지 않는 걸까?’ 질문을 던져 본다.

도서관에 오면 이렇게 무언의 스승을 만날 수 있어서 기쁘다. 또 읽고 싶은 책을 맘껏 읽을 수 있어서 더없이 즐겁고 행복하다.

그런데 길 위의 인문학탐방은 이론을 바탕으로 더 깊이 있게 조명해 볼 수 있고,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을 체감할 수 있다. 이번 탐방 주제는 월봉서원, 필암서원에서 호남 도학의 정신을 만나다.이다.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1510~1560) 선생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학자로 문묘에 배향된 동국 18현 가운데 유일한 호남 출신이며, 이 지역의 선비 문화를 대표하는 선생을 모신 곳이 필암서원이다. 선생은 군신과 절의를 지킨 의로운 선비이며 면암정 송순의 문인이고, 송강 정철의 스승이시다.

학문에 대한 깊은 성찰과 계산풍류를 노래한 1600여수의 시를 남겼으며, 소쇄원의 48영가도 유명하다. 퇴계 이황과 사단칠정논변을 펼침으로써 조선 지성사에 한 획을 그은 고봉 기대승의 학문에도 기여를 한 유학자이다. 율곡의 붓 아래 완벽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라고 말했던 율곡 이이도 맑은 물에 뜬 연꽃이요, 화창한 봄날에 비 온 뒤의 달이라고 하서 김인후를 칭송했으며. 제자인 우암 송시열도 우리 나라의 많은 인물 가운데 도학과 절의의 문장을 겸비한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데 하서 선생은 이 세 가지를 모두 겸비했다고 평하였다.

 

고봉 기대승 선생 또한 퇴계 이황이 당신이 나보다 한 수 위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대성리학자 퇴계 이황 선생은 기억하지만 그와 쌍벽을 이뤘던 고봉 기대승 선생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니 안타깝다.

월봉서원은 1578(선조 11)에 김계휘를 중심으로 한 지방 유림의 공의로 기대승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후 정조가 기대승 선생을 상징하여 '빙월설월'이란 뜻으로 빙월당 액호를 하사 하였다.

32세에 과거에 응시, 문과의 을과에 급제해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여기서 퇴계 선생을 만나게 된다. 고봉 선생은 퇴계 선생과 첫 대면에서 바른 선비의 처세에 대해 물었다. 퇴계 선생은 자신이 깨끗하고 옳은 일만 하면 된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두 사람의 우정은 26년간 계속되었다.
기대승 선생의 이런 끊임없는 비판의식과 대쪽 같은 성품은 자신을 결국 외롭게 만들고 44세의 나이에 관직을 버리게 만든다. 기대승 선생은 선조에게 백성을 위한 선정을 펼쳐줄 것을 강조하고 짐을 챙겨 한양을 떠났다. 선조는 기대승 선생이 경연에서 강의한 것을 모두 상고하여 등사 해 내고 책으로 엮었는데, 책이 바로 <논사록>이다. 이 책에는 기대승 선생의 정치경제사회문화에 대한 논리 정연한 학설과 민심을 바로 잡으려는 성리학의 도가 담겨있다. 지식인이 목숨을 걸고라도 능동적으로 항거해서 뚫어야 한다는 적극적인 언로 개통책을 내놓았다. 정의로운 고봉 기대승 선생을 기리고 있는 곳이 바로 월봉서원이다.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았던 시대를 살다간 선생의 고민과 외침이 얼마나 답답하고 외로운 것이었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두루두루 다 함께 잘 살아가자는 사회 구현의 정신을 아직도 우리 곁에서 역설하고 있는 듯하다.

소쇄원! 그곳에서 하서 김인후를 또 만났다. 소쇄원을 조성한 사람은 양산보이지만 소쇄원의 가치를 더욱 높인 사람은 하서 김인후라고 한다. 소쇄원을 읊은 <소쇄원 48>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는 양산보의 벗이며 사돈지간이었다. 또한 딸이 요절하고 홀로 남겨진 사위 양자징과 술로 벗하며 애틋한 연민의 정을 나눈 장인이기도 했다. 그는 사돈집이었던 소쇄원을 좋아해서 소쇄원에 오면 돌아갈 생각을 잊고 독서와 토론에 빠져서 연못의 물고기들조차 그를 알아볼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소쇄원 사랑을 알 것 같다. 말년에는 아예 광풍각에서 10년을 생활하였다고 한다.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아 옷깃을 열어젖히게 한다는 광풍각 마루에 걸터앉아,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겸비한 하서 선생의 삶을 생각하면서 그가 지은 <소쇄원을 위한 즉흥시>를 음미해 보았다.

대숲 너머 부는 바람은 귀를 맑게 하고/ 시냇가의 밝은 달은 마음 비추네.//

깊은 숲은 상쾌한 기운을 전하고/ 엷은 그늘 흩날려라 치솟는 아지랑이 기운.//

술이 익어 살며시 취기가 돌고/ 시를 지어 흥얼노래 자주 나오네.//

한밤중에 들려오는 처량한 울음/ 피눈물 자아내는 소쩍새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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